[Walkthrough studio]

이인범: 아유 안녕하세요.

윤석남: 아유 반갑습니다.

이인범: 선생님, 참 오래간만입니다.

윤석남: 네, 이렇게 먼데 오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가 제가 작업하는 곳이예요. 여기가요, 선생님. 제가 작품 구상하고...구상하고, 드로잉도 하고 그런 곳이고요. 저쪽에 나가시면 거기가 이제 작업하는 곳이거든요?

이인범: 아 그래요? 네.

윤석남: 이쪽으로 가시면 되거든요.

이인범:

윤석남: 저쪽에 가시면, 거기가 이제 작업하는 방이거든요? 이게 실제로 나무 깎고, 깍아내고 갈고 하는 그런 작업을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저게 이제 기계 들이고요. 나무 깎는 기계, 뭐 이런 거고, 여기는 이제 작업하는 테이블이고요. 다 여기서 이제 끝나죠.

이인범: 작업이 다 이루어지는 거로군요?

윤석남: 저쪽에 방이 하나 또 있는데 거기 가보실까요?

이인범: 네.

윤석남: 여기가 그 아까 보신 방에서 지나가지고 여기에 이제 작품을 설치해 놓은 그런 곳이거든요. 지금은 그 1,025마리의 유기견을 여기 밖에 할데가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늘어놨죠.

이인범: 아이쿠, 뭐, 저는 너무 좋으네요.

윤석남: 어마마한 수치죠.

이인범: 네, 너무 어마어마한 광경을...

윤석남: 이렇게 보시지만, 이렇게 앞에서 볼 적에는 얘네들이 그렇게 명랑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아주 슬퍼 보이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여기 오셔서 이렇게 뒤를 보면 마치 무덤의 비석같은... 죽음을 이미 얘네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어요.근데 사실 이 작품의 주 컨셉은 이 1,025마리 버려진 개도 중요하지만 그 개들을 보살피고 있는 할머니가 사실 주인공이거든요. 근데 이게 지금 전시 중에 파손되고 다 부속품들이 잘못돼서 다시 한번 만들어서 전시할거고요.

이인범: 오늘은 2014년 9월 17일 수요일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일컬어지는 윤석남, 윤석남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선생님의 스튜디오에 와 있습니다. 저는 지금 상명대학교 교수로 일하며 큐레이터, 평론가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석남: 아유 와주셔서 너무 감사하고요.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인범: 먼저 제가 선생님을 한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작가로 소개한 것에 대해서 간단하게 코멘트 부탁드리는 것으로 시작할까요?

윤석남: 어, 저는 평소에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당신은 페미니스트 작가로 불리는 것이 좋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저는 정말 제가 죽을 때까지 깊이 있게 그쪽으로 불려지기를 아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인범: 아주 명료하시군요.

윤석남: 네.

이인범: 본격적으로 선생님 작품세계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선생님께서 어디에서 언제 태어나셨고, 어떤 가계에서 태어나셨는지, 그리고 그 성장환경은 어떠셨는지 간단하게 여쭙겠습니다.

윤석남: 어, 1939년도 음력으로 1월 8일에 태어났는데, 태어난 곳은 만주 중국의 만주예요. 만주 연평쪽에서 태어났는데, 그 당시는 한국이 일제 침략기였잖아요. 그래서 아버님이 그쪽으로 가셔서 생활을 하셨어요. 학교 선생님으로, 아버님은 이제 윤백남이라고 하시는데요. 그렇게 불려지시는 분인데. 한국의 최초의 영화 감독으로도 알려졌고, 후에는 많은 소설, 대중 소설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런데서 자라났죠. 네.

이인범: 형제는 몇 분 계셨어요?

윤석남: 형제는 6남매고요. 제가 둘째 딸인데, 사실은 셋째 딸입니다. 중간에 언니 한 분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이제 둘째 딸이고 밑으로 남자 동생이 셋이고 막내가 여자동생입니다.

이인범: 그... 만주에서 태어나셔서 그 귀국하신 것은 언제세요?

윤석남: 제가...정확한 기억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기로 한국이 해방되는 해에 봄에 돌아 왔다고 하니까 아마 한 여섯살, 일곱살 그렇게 됐을겁니다.

이인범: 그, 거주지를 옮기면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그 환경의 변화가 있으셨겠네요.

윤석남: 거주지,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정확한 기억은 잘 없어요. 그렇긴 한데 이제 그 해방 됐을 때, 굉장히 소란스럽게 만세 부르던 거는 기억을 하고 있고요. 중국 삶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억은 잘 없는데 사진으로는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이인범: 네, 네 어렸을 때 사진이 있으시군요.

윤석남: 네, 있어요.

이인범: 그렇군요.

이인범: 선생님 학창시절에 향후에 그 작가로서 활동을 하시게 될 어떤 계기가 될 만한 경험이나 그 학습환경 같은 것들이 있으셨어요?

윤석남: 저는 선생님, 아시다시피 대학을 못갔어요. 왜냐하면 가정,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정형편이 여유롭지 못해서 대학을 못갔지만 어려서 부터 이제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화가란 직업이 있다는 걸 아버지를 통해서 알았기 때문에. 그랬지만 그런 사정 때문에 못가고 있다가 어...나이가 마흔살 되던 해에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라고 이제 남편과 협의 끝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이인범: 40이 되서...

윤석남: 네.

이인범: 이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드는 시점에서...

윤석남: 네,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불혹의 나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제가 아는 바로는 외국에는 뭐 나이가 아무 상관이 없는 걸로 알고 있고요. 저도 시작할 때 저는 나이가 많다 뭐 적다 이런거에 대해서 개념하지를 않았어요. 전혀 개념하지를 않았습니다.

이인범: 어린시절에 뭐 좋은 작품을 봤다던가 그림책을 봤다던가..

윤석남: 어 그럼요.

이인범: 그런 경험이 있으실 거 같은데.

윤석남: 아, 있지요. 아주 어렸을 때에는 아버님이 옆에서 그림을 그리셨어요. 이렇게 연필로 드로잉하시고 붓으로 그림을 그리시고. 보면은 아주 재밌는 장면도 많이 있었고요. 뭐 약간 만화같긴 하지만. 이제 그런 경험도 물론 있었지만, 국민학교 3학년 적에 어떤 특별한 경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 나는 정말 화가로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이제 고등하교 때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그래서 아시다시피 가정이 어려운 형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사치에 불과했거든요. 그래서 그걸 접었죠. 접고. 어,,, 중학교 때는 이제 그림이, 불란서에도 가고 이렇게 미술활동을,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이 뽑혀서 불라서에 가서 전시도 하고 그런 경험은 있는데 기록은 없어요.

이인범: 일찍...

윤석남: 네, 일찍. 그림에 대한 굉장히 그리움이 있었죠. 갈망이 있었죠.

이인범: 그 당시에 돌아오셔서 살던 곳은 서울...

윤석남: 아 그럼요. 서울에서 쭉 살고

이인범: 서울 어디셨어요?

윤석남: 서울 전농동이라고 얘기하는데.

이인범: 아, 전농동

윤석남:네, 거기서 국민학교 3학년때까지 살고. 그러다가 이제 강남쪽으로 강남 국민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노량진쪽으로 이사를 와서 살다가 6.25 전쟁이 터졌죠.

이인범: 아, 네네. 그래요 그 정도로. 뭐 말씀 나눌 것이 많아서. 간단히 넘어가겠습니다. 그... 예술계로 뛰어들게 된 전후사정에 대해서 조금 말씀하신다면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

윤석남: 네, 그건데. 아무튼 그 갈증이, 갈등이 굉장히 힘했죠.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 굉장히 심했죠.

이인범: 그, 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40이 되시던 해에 그림을 다시 하시겠다고 하는 어떤 생각을, 결심을 굳히실 때까지 그 아주 긴 시간이지만, 한 20년 되는 시간이네요.

윤석남: 그렇죠. 네.

이인범: 20년 동안에 그 생애를 그냥 간단하게 압축해서 좀 말씀해주시죠.

윤석남: 네, 그럼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어요. 한국의 굉장히 큰 회사에 취직을 해가지고 스물 여덟살때까지 근무를 했는데 동생들도 많고, 가정 생활을 전적으로 책임 지지는 않았지만, 반은 이제 담당을 해야 됐고. 언니가 이제 기자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직업이 없으시고. 그러니까 가정을 어떻게 먹여 살리느냐하는 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이인범: 취직을 하셨군요.

윤석남: 취직을 했습니다.

이인범: 어디에 하셨었습니까?

윤석남: 한국 전력 주식회사에 취직하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님이 거기에 고문으로 계셨기 때문에 했다가, 거기서 이제 남편을 만난게 아니고, 하여튼 뭐 결혼하고, 스물 여덟살때 결혼을 하고 결혼한 다음에 또 이제 생활이라는 게 덮쳐오지 않습니까. 살다가 조금 우리가 조그만 집을 장만하게 됐어요. 아파트 하나. 그때 이제 결심을 했죠. 이제 나는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길로 가야되겠다라고 남편하고 의논을 하니까 다행히 남편이, 당신 삶이니까 할수 있는 한 하는게 좋지않겠냐. 그래서 무조건 시작했어요.

이인범: 기록에 따르면은 뭐 성균관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윤석남: 네, 그거는 이제 제가 직장생활 하면서 1년을 다녔습니다.

이인범: 아, 네네.

윤석남: 야간이죠.

이인범: 네네. 그래서 어쨌든 전격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40세가 되시던 해에 결심을 아주 저, 스스럼 없이 하실 수 있는...

윤석남: 네, 그게 이제 결정적이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지만, 홍대 나온 후배가 저희 집에 방문을 했는데 제가 나 정말 이대로는 살 수가 없어. 난 정말 그림을 시작해야된다 그랬더니, 언니 그러면 시작해 이 아파트 동네, 반포 아파트 살았는데 이종무선생님 화실이 있으니까 소개해주겠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그날로 다행히 그날 월급, 생활비 받은 게 있어가지고 그걸 가지고 가서 화구를 몽땅 샀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종무선생님 화실에 가서 두달인가를 배웠죠.

이인범: 그게 40세가 되시던 해는 아니고.

윤석남: 40때.

이인범: 아 그때가 40때네요.

윤석남: 네, 그게 79년 4월 25일이예요. 제가 날짜를 잊어버릴 수가 없죠. 그때 굉장히 큰 결심을 했기 때문에.

이인범: 그러니까 미술학교를 정식으로 다니시진 않으셨지만 이종무 라고 하는 큰 화가 밑에서 학습을 할 큰 행운을 가지셨던 거네요.

윤석남: 네, 그렇죠. 그런데 사실 고등학교 때도 저는 혼자서 미술 전시회를 많이 보러 다녔는데. 혼자서 다녔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관심이 없으니까. 근데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을 하는데 천일 백화점이라고 있었어요. 종로 4가와 청계천 4가 사이에 천일 백화점에 천일 갤러리가 있었습니다. 거길 갔는데 그 때 그 이인성작가의 그 개인전 회고전이죠.

아주 저는 놀라운 동시에 대단히 죄송하지만 '아, 이 그림이 왜 고갱하고 비슷하지?'라는 생각을 스스로 했어요. 이게 혼자서 미술책을 보면서, 하여튼 선생님이 굉장히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미술책을 다 보여주시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옛날 그 유럽의 화가들의 삶이라던가 작품을 그냥 도판으로만 봤습니다. 그래서 고갱을 참 좋아했고, 물론 고흐도 다 좋아하고 그랬습니다.

이인범: 중고등학교는 어디를 다니셨어요?

윤석남: 저는 저 중고등학교가 서울 사대 부속 중학교, 고등학교, 남녀 공학입니다.

이인범: 굉장히 교육적인 학교를 다니셨네요.

윤석남: 아, 모르겠어요.

이인범: 그 기록을 보면은 박두진 시인으로부터 서예공부도 하셨다고

윤석남: 아, 네. 서른 여섯살 때 너무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는데, 주변에 아는 친구가 박진현 선생님이 서예를 가르친다고 그래서 그룹에 여섯명의 여성과 들어가서 미친듯이 4년동안 글씨를 썼는데...

이인범: 그러니까 출발은 서른 여섯...살때 하신거예요.

윤석남: 서른 여섯살 때 한거나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근데 박진현 선생님이 어떤 분이세요. 뭐 설명할 필요도 없죠. 그때 이 붓을 쓰는 방법 그 먹이 갖고 있는 어떤 깊이 이런거를 다 터득을 했던거 같아요. 하여튼 숙제니 뭐니 무지 많이 해갔거든요. 근데 그걸 가지고는 제가 만족이 안됐어요 그 당시에. 그래서 갑자기 그림으로 바꾼거죠. 근데 지금까지도 그 붓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음, 전체 그림을 다 붓으로 쓰고 있어요.

이인범: 82년에 있었던 첫 개인전에 대해서 조금 분명하게 이렇게 확인을 해보는 건 참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82년 개인전과 관련된 에피소드나 혹은 작품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선생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윤석남: 참 저는 그때 이제 김영자, 김진숙, 윤석남 이렇게 두 분은 이제 홍대 나오신 분이고요, 저는 물론 아닌데 한 동네에서 제 집에서 같이 드로잉을 누드 드로잉을 했어요. 한 1년 했나, 그래가지고 첫번째 전시를 했고, 사실 그 전시가 대표적인 전시라고는 저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은 연습단계였기 때문에 습작 단계였기 때문에, 그 다음에 1982년도에 지금의 아르코 미술관, 그게 이제 미술 회관이죠. 그래서 일주일 동안 빌려서 개인적인 전시를 했어요. 그게 이제 어머니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머니라는 제목을 가지고 전시를 했습니다.

이인범: 사실상 이제 데뷔전이 되겠네요.

윤석남: 그게 굉장히 큰 데뷔전고, 저한테는 하나의 큰 점을 찍은...

이인범: 그 당시에 평가는 어떠셨습니까?

윤석남: 제가 정말 죄송하지만, 그 일주일 밖에 안되는데 많은 화가분이 오셨어요. 이렇게 소문을 듣고 오셔가지고, 장욱진 선생님도 오셨어요. 그때 생존해 계셨었잖아요. 와가지고 안 가시고 좋은 말씀 굉장히 많이 해주셨어요. 제 그림이 그때 그게 무슨 새롭다 이런거가 아니라 아시다시피, 그때는 다 추상화가 90% 아니었습니까? 근데 거기서 웬 젊은 여자가 구상, [?실물], 어머니라는 주제를 가지고, 근데 아마 이렇게 가슴에 와 닿으셨다고 말씀들 해주세요. 그리고 두번씩 오신 선생님들도 계시고, 전 정말 너무나 영광이고 그때는 제가 아 내가 굉장한 화가가 된 줄 알았어요. 그렇게 바보같이.

이인범: 아, 그러셨어요.

윤석남:

이인범: 굉장한 화가가 되신 거 아니었어요?

윤석남: 아니오. 그, 그 이후에 정말 많이 느꼈죠. 얼마나 내가 정말 하늘 높은줄 모르고 그랬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이인범: 1982년에 아마추어에서 프로로...

윤석남: 그걸 해서 데뷔를 했다고 생각이 들어 가고요. 그때 만난 선생님들이 당신이 만든 그 그룹에, 그룹전에 같이 하자고 그랬어요. 그거 보통 영광이 아니죠.

이인범: 그렇죠.

윤석남: 아, 저는 정말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정문규 선생님이 제 2의 저의 은인입니다.

이인범: 정문규

윤석남: 네, 정문규 선생님입니다.

이인범: 아, 네네

윤석남: 그 선생님이 주도하신 인간전 첫번째에서 부터 거의 몇번 갔는데, 그때까지 다 참여를 했죠. 저는 그런 영광이 있을 수가 없죠.

이인범: 이후에 이제 한 30여년 동안 이제 본격적으로 화단 활동을 하셨는데 첨에는 이제 페인팅에서 출발을 하셨는데 오브제나 설치작품으로 이렇게 무게 중심이 옮겨졌어요?

윤석남: 1982년도에 개인전이 끝나고 1년동안 뉴욕가서 공부를 했어요. 무슨 뭐, 하여튼 뭐 학교를 적을 두고 그게 학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 League)라고 그거 모든 사람한테 개방되어 있는 거기하고, 프렛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라는 학교에서 아티스트를 위한 그래픽 센터가 있었어요. 워크샵하는데죠. 근데 제가 이제 1회 개인전을 하면서 미협(한국미술가협회) 회원이 되니까 아티스트로서 자격을 가지고 거기서 비자가 나왔어요. 그래서 거기에 가서 1년동안 오로지 작업만 했죠. 집 생각은 전혀 안하고.

이인범: 정말 그때 프로의 세계에 진입하는 어떤 경험을 많이 하셨겠어요?

윤석남: 그건 아주 완벽하게, 제가 뭐 영어를 잘 못하지만 터닝 포인트라고 그러죠. 제 작가적인 삶을 거기서 이렇게 정말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한국에서. 정말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1년 동안 사실 작업을 한게 아니라 그냥 보러 다녔어요. 뭐 영화고 연극이고 미술이고, 미술관이고 사실 실제로 작업한 것 보다는 굉장히 많이 배우고, 아하. 눈을 확 뜬거죠.

이인범: 1980년대 초중반에 그 뉴욕에 어떤 그 예술 공기를 다 쏘이시고 오신거네요.

윤석남: 굉장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팝의, 아주 그때가 전성기였는데 어느정도 지금은 떨어진 때였나 싶지만,

이인범: 아주 기억나는 대표적인 전시 하나만 말씀해주시겠어요?

윤석남: 저기 현대미술 쪽은 제가 기억나는 게 지금 리튼슈타인 만화 리튼슈타인 맞습니까? 그거를 그 저기 어딥니까? 그 유명한 거리, 잊어버렸어요. 소호에서 그때 너무 좋았어요. 지금까지도 그 캘린더도 막 사오고 그랬고요. 그 다음에는 사실 히스토리컬 뮤지엄 있잖습니까? 저기 80, 60 몇번가에, 거기는 뭐 제가 끊임 없이 가서 보고 또 보고 히스토리컬 뮤지엄이 제게 주는 충격은 그 이후에 쭉 그림이 무엇일까, 미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거를 저 나름대로 다시 질문하게 하고 나름대로 거기서 답을 얻게 한, 완벽한 답은 아니지만 스스로...

이인범: 선생님 사실상 1982년에 그 아르코미술회관에서 개최됐던 첫 개인전이 화단에 데뷔를 하신 어떤 구체적인 계기가 되신 것이죠? 그때 그 처음 그 드로잉하고 페인팅으로 화단에 처음 발을 내딛으셨는데 그 이후에는 무게중심이 오브제나 설치 쪽으로 많이 이동을 하셨고, 주제상으로도 처음에 어머니라고 하는 주제에서 출발을 하셔서 핑크룸 뭐 또 그 유기견, 그 다량의 유기견 등등 굉장히 많으 변화가 겉보기에 확인되는데,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한 30여년 동안 작품 생활 하시면서 선생님 작품세계에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고? 몇번의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셨는지 간단하게 정리를 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윤석남: 저는 1990년도에 90년도 초반이라 생각해요. 제가 이제 약간 정신, 그러니까 정말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앞으로 또다시? 그런 위기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또 한 몇 1년 정도 뉴욕에 가 있었는데 그때 이제 루이즈 브루조아를 만났죠. 루이즈 브루조아의 그 브룩클린 뮤지엄에서 전시를 했는데. 개인전이예요. 근데 전 실제로 본 거는 처음이죠. 근데 굉장히 큰 거미 마망 있지 않습니까? 최초의 작품이예요. 제가 알기로는.

그게 이 방을 하나 완벽하게 감옥소처럼 나무를 이렇게 벽을 다 치고, 요만한 문을, 정말 거미의 집에 들어가는 것 같은 요만한 문을 하나 내 놓으셨더라고요. 밖에는 서양의 그 문이겠죠. 근데 그게 마치 감옥소에 들어가는 듯한, 못이 다 이렇게 있는, 근데 거기를 제가 들어갔어요. 뭔지도 모르고 들어갔죠. 근데 거기 거미 한 마리가, 굉장히 큰 거미 한마리가 보니까, 자세히 보니까 폐품, 그 폐품, 파이프라던가 맨홀 뚜껑 이런 걸 가지고 연결해서 굉장히 큰 거미를, 이제 거미가 어떤겁니까? 거미가 자기 등에다가 새끼를, 알을 까면 그 새끼가 그 등을 파먹고 거미는 죽는거예요.

이인범: 선생님께서 그 부르조아의 그, 저 작품에 매혹이 됐었던거는 선생님의 개인적인 체험하고도 매우 밀접한관계가 있었던 거네요?

윤석남: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거죠.. 그러니까 저도 처음부터, 그림 시작할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그릴것인가라는 고민을 했을때, 나는 정말 내가 너무나 사랑하고 내가 너무나 존경하고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중요할 수 없을 만큼의 대상이 우리 어머니예요. 어머니가 6남매를 당신이 서른 아홉살 때 혼자 되였어요. 근데 막내가 두살이었어요. 뭐 아시다시피 문인의 삶이라는 것은 집도 없고 절도 없는 거잖아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여섯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먹이고, 학교를 보내야되는 입장인데 어머니가 그 전까는 정말 집에서 살림 밖에 모르시던 어머니가 길거리 나가서 행상도 하시고, 또 밭에 나가서 김도 매시고, 또 김 매신 다음에는 꼭 껍질을 받아다가 삶아서 우거지를 만들어서 파시고. 집을 지으셨어요.

아버지 장례식 끝나고 좀 들어온 조의금을 가지고 애들을 데라고 어떤 전세집을 얻을까 했더니, 지금의 영천, 영천에 조그만 초가집, 방 2개짜리 밖에 못 얻으시겠더래요. 그래서 생각을 하시기를 서른 아홉살 먹은 어머니예요. 젊은 엄마가 생각하시기를 이 애들을 데리고 남의 집에선 못 산다. 근데 그때 그 박정희 시절에 정책이 금호동으로 가면, 청계천에 그 못사는 사람 다 그 쪽으로 소개시키는 저기 그게 있었어요.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그걸 들으시고 나서 가서 땅을 열 여덟평인가? 스무평을 얻으셨어요. 거저. 흙벽돌을 찍어가지고, 당신이. 조카하나 데리고. 흙벽돌을 찍어서 방 두개 마루 하나 부엌, 요 집을 지으신 거예요,

이인범: 집을 지으신 거군요.

윤석남: 그래서 이사를 갔는데, 저는 아직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장면을, 이사가서 자는데, 하늘에 뭐가 이렇게 반짝반짝해요. 그래서 이제 보니까 지붕과 지붕 사이에 틈이 있는거예요. 거기에 별이 보이는 거예요. 아, 저는 아직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어머니이고, 그 어머니가 보통 노동을 하면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그리도 우리한테 '아유 어떻에 우리 사냐, 큰일 났다.' 이런 말 한번도 해보신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제가 이제 학교를 그만 두려고 그랬더니, 안된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학교 선생님께 가서 학비 딜을 하신 거예요.

제가 공부는 제가 못했거든요? 그랬는데, 그러면서도 한가지 에피소드 꼭 얘기하고 싶은 거는, 어머니가 밤에 들어오세요. 일하고. 그러면 자고 있는 우리들을 다 깨우십니다. 깨워가지고, 우리 게임하자. 그 밤중에. 그러면 카드를 가지고 게임을 해요. 그럼 이제 샘베라는 거 있지 않습니까. 요만큼 사가지고 오셨던거. 하나씩 주고. 우리는 놀이를 통해서, 제가 지금 생각하기에는, 이 놀이를 통해서 이 아이들이 갖고 있는 고통이라던지, 혹시나 고통스러우면 이거는 이걸로 치유해야겠다. 이런 생각 아니셨을까요? 한번도 우리 어떻게 사니 큰일 났다 이런 적이 없고 항상 명랑하게 굉장히 옵티미스틱하게...

이인범: 선생님 작품 세계를 전체를 관통하는 그 에너지가 어머니와의 체험인거죠?

윤석남: 네, 그거죠.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어미니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저를 통해서 어머니 얘기를 하고 있는거가 그거죠.

이인범: 너무 감동스럽고 흥미진진해서 말씀만 듣고도 이 시간을 다 채울 것 같은데...

윤석남: 아 그렇습니까? 저는요 오늘은 정말 눈물이 안나네요. 다른 데 인터뷰할 때는 막 울다가 인터뷰도 못하고 그랬어요.

이인범: 여기서 간단하게 그 말씀은 이제 접고. 그 다음에 이제 90년대 초 다음에 또 한번 전환이 있다면 언제?

윤석남: 그러니까 이제 이게, 사실은 그 어머니전 끝나고 나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어머니, 그 1회 개인전 끝나고 나서 그래도 어머니 얘기가 무진한거예요. 너무나 무진한거예요. 그래서 이거를 제가 또 무슨 계기가 있지만 어머니 얘기를 이 유화, 평면 작업에서 뭔가 더 연극적으로 좀 더 사람들한테 다가갈 수 있는 뭔가 이런 환경적인 걸로 하고 싶다라는 열망이 있었어요. 근데 이게 또 이제 갔을 때 뭐 설치 미술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봤어요. 피아노 하나 놓고 뭐 이렇게 하는 거를...

이인범: 92년도에 가셨을 때?

윤석남: 네네, 근데 그 설치미술이 저하고 관계는 없지만 아, 이런 방법이 있구나. 그럼 난 벽에서 부터 튀어 나가야지. 벽으로부터 나는 튀어 나가고 싶었어요. 답답한 이 벽으로 부터. 그래서 그게 이제 어머니 1993년도에 '어머니 눈'전할 적에 나무 폐품 갖다가 이제...

이인범: 두번째 이제, 전시, 개인전

윤석남: 두번째 개인전도 이제 어머니의 눈이라고 붙이고 완전히 어머니를 가지고, 어머니 히스토리를 어머니 열아홉살 때, 어머니 서른 몇 살 때, 어머니 고생하실 적에, 어머니 노년 때, 어머니의 총 히스토리, 이런거를 작업을 했죠.

이인범: 그 어머님을 주제로 한 이제 작품에서

윤석남: 네, 거기서 이제 끝났죠.

이인범: 어머니, 어머니는 93년도에 일단락이 되는거죠? 그 다음에 이제 여러가지 핑크룸이라던가

윤석남: 네, 네네 거기가 이제 어머니 전시, 어머니의 눈전이 이제 하나의, 말을 하자면 무당이 굿을 하듯이 이제 굿이 끝난거예요. 아, 이제는 만족스러워. 어머니 얘기는 이제 끝나고 이제 감히, 내 얘기를 할 수 있구나. 내가 중산층 여성으로서 나의 삶이라는 것이 허방이다. 근데 그 허방을 이제 내가 튀어나가서 온전히 윤석남이라는 하나의 여자로서 설 수 있는 방법을 이제는 찾아도 되겠다라는 인식이 오더라고요. 이제는 자신감 같은 게. 이제 내 얘기를 할 수 있다 부끄럽지 않게. 사실 굉장히 자기 얘기를 한다는게 부끄럽고 무섭고 위험하고 그렇잖아요.

이인범: 그게 이제 쉰 다섯살 정도 되셨을 때, 이제 내 얘기를 해도 되겠다.

윤석남: 네, 이제는 내 얘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래서, 근데 그럼 나는 누구지? 나는 그, 가정주부라는 것이 무엇이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러면 나의 위치는? 이 가정에서 나의 위치는, 이 사회에서 나의 위치는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니까 이게 없는 거예요. 이게. 없다는 생각이 자꾸. 방도 하나 없지. 안전한 공간도 하나 없지. 단지 내가 정말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은 작업실 빼고요, 부엌이예요. 그리고 이게 얼마나 내가 화러하게 돈이 좀 있지 않겠습니까. 중산층이니까, 뭐 많지는 않지만. 하여튼 이런 삶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화려하고 그럴듯하고 뭐 살만 한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내부로 들어가면 굉장히 공허하잖아요.

그거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중적인 어떤, 그래서 그 핑크룸을 하게 된거는 핑크라는 색이 그게 그냥 부드러운 핑크가 아니예요. 형광 핑크입니다. 이 형광색이라는 것이 공중에 떠있는거 아니예요? 부착되어 있다는 느낌이 안들고, 그래서 그 형광핑크를 가지고 하고, 이제 의자도 굉장히 화려하고 근사하고, 서양에서 들여 온 굉장히 근사한 건데 안착되지 못한 그래서 거기에 이제 네일, 발톱 같은 거를 달고 이제 이렇게 된거죠.

이인범: 그... 그 이후에 뭐 이렇게 이제 대충 큰 틀에서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작품의 어떤 입장을 크게 이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을까요?

윤석남: 네, 그렇죠. 어머니 얘기. 물론 이제 밑으로 흐르는 얘기는 다 여성 이야기이기 때문에 한국의 여성은 무엇인가라는 거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통되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확연히 다르죠.

이인범: 선생님 화단 활동 중에서 굉장히 적극성이 돋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뉴욕에서 돌아오시자마자부터 이신 거 같아요. 그때 1985년에 민족미술협회에 가담하시고, 여성미술연구회의 일원으로서 굉장히 많은 그 활동들을 펼쳐 나가시는데, 당시에 선생님이 가지고 계셨던 개인적인 작품에 대한 생각들, 그리고 어떤 그룹에 참여하면서 이른 바 민중미술 운동 속에서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펼치고자 하셨던 어떤 생각들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윤석남: 그 민중미술이라는 것이 1985년도인가 6년도인가, 정확이는 이제 잘 모르겠지만,

이인범: 83,4년 뭐...

윤석남: 네, 그때 이제 태동이 됐는데 그때 우리가 저기 그 저, 김인순, 김진숙, 윤석남 셋이서 '반에서 하나로'라는 전시를 했어요. 그게 이제 86년도인가 5년도에 했는데 그 당시에 이제 민중미술이라는 게 왔고, 저는 제가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현실과 발언이라는 전시를 봤어요. 동산방 화랑에서 하는. 그거 보고 정말 충격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답이 거기에 있는 거 같아요. 이렇게 정말 현실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구체화 시켜서 이걸 그림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그전까지는 뭐 그냥 어쨌는 관념적으로... 정말 리얼리티한, 이게 저한테 준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임옥상씨의 그 불 그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동산방에서 첫번째 전시를, 그 다음에 제가 이제 그림을 시작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림 시작한 도중에, 개인전 시작하기 전 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그런데 그 분들이 주측이 되어가지고, 뭐 주측인지 아닌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래가지고 민중미술이라는 것이, 민족민중미술이죠. 사실 말은 그냥 민중으로 했지만. 민중미술이라는 것이 태동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우린 뭐 무조건 가입을 했죠. 가입을 했는데 그 전시들, 민중미술 전시가 저한테 준 충격은, 그게 뭐 한국 화단에 준 충격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물론 굉장히 큰 충격을 줬겠죠. 미술이 가야할 어떤 방향성 같은 거를 저한테 제시한 거 같아요.

이인범: 아 그러셨어요?

윤석남: 제가 하고 있는, 해왔던 일이 이거 정말 같은 일이야. 내가 정말 잘 가고 있어라는 어떤 답을 보여줬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제 적극적으로 참여는 못했는지 모르지만 참여했고, 그 대신 이제 여성분과라는 것이 생겼어요. 저는 그게 조금 여성분과라는 것이 기분이 별로 썩 그렇게 굉장히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여기서도 또 세컨이구나.

이인범: 아, 그런 느낌을 또.

윤석남: 아 받았죠. 그렇지만

이인범: 어떤 측면에서 받으세요? 여성분과라고 하는 걸 별도로 독립시키는 것 자체가

윤석남: 독립시키는 게 아니라 또 이렇게 이게 있고, A가 있고 B가 있고 딱 이렇게 있는 게 아니라 A 속에 있는 A' 같은 느낌. 저는 그랬습니다. 욕심이 좀 많으 쪽이거든요. 그래서, 그렇지만 거기 밖에 없으니까 그 활동을 후배들과 열심히, 또 김인순씨라는 정말 거목이 있지 않습니까? 같이 열심히 거기 참여하고 했죠. 얼마나 그 포스터 만드는데도 적극 참여하고 그랬습니다.

이인범: 그래요.

윤석남: 10년만에 해체됐어요.

이인범: 네. 미협이나 여성미술 연구회나 또 하나의 문화 동인도 하시고 문화연구 운영위원도 하시고, 굉장히 참여적인 입장에서 운동을 주도를 하신 셈이예요.

윤석남: 주도까지는...저는 워낙 주도한다라는 거에 비켜 서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주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적극적으로 했죠.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또 하나의 문화는 우리가 '반에서 하나로'라는 전시를 끝내고 나서 작가와의 대화를 했어요. 그게 그림 마당 민에서 했습니다. 작가와의 대화 할때. 그때 또 하나의 문화에 계셨던 분들이 대거 오셨어요. 그때 조혜정씨 뭐 다 오셨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런데, 그때 이제 작가와의 대화를 했을 때, 그때 비로서 아 이거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화가도 공부를 해야 되겠구나. 이론이 바탕이 되어야 되겠구나하는 걸 느꼈죠. 그래서 그 또문을 찾아가고 만나서 그때부터 정말 패미니스트라는 말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패미니즘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래서 저는 정말 반에서 하나로라는 전시가 반에서 하나로 간다는 의미니까

이인범: 이미 실천하고 계셨던거죠.

윤석남: 네, 이미 실천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아 이렇구나라는 어떤 증명이 됐다고 할까.

이인범: 아, 이론적으로도 백업이 되고

윤석남: 네, 그리고 그 또문(또 하나의 문화)을 만나서 정말 공부를 많이 했죠.

이인범: 어.. 이어서 93년도에 개최된 두번째 개인전이 이제 금호 미술관에서 개최됐죠? 그때 어머니의 눈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전시가 개최됐는데, 그것이 선생님 작품의 전개에서 대단히 중요한 분수령이 되고 있다는 느낌인데 당시에 어머니의 눈전이라고 타이틀 아래 전시를 개최하게된 배경이나 그때 출품하셨던 작품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십시오.

윤석남: 눈이라고 하는 제목은 제가 붙인게 아니고 제가 이제 그러면서 사회활동이 조금씩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하나의 여성 작가로서 사회에 공헌한다라는 의미가 되겠죠. 이제 조금했는데 이게 사회 활동이라는 것이 이제 엄혁, 김수기 이런 분들을 만나가지고 현실문화 연구라는 어떤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전 정말 영광이었어요. 거기 가서도 많이 배웠는데, 그래서 그게 이제 책을 내는 팀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나면서 비로서 저의 그 어떤 생각이, 저의 삶의 태도가 확립이 되는, 뭐라고 얘기할까요. 이렇게 구체화되는 그런 느낌을 많이 받고요. 정말 그거를 통해서 공부를 많이 하게 됐죠.

이인범:주로 이제 나무를 많이 쓰셨어요?

윤석남:

이인범: 나무도 이렇게 저... 그 3D 이라기 보다는 2D

윤석남: 네, 2 Dimention이죠. 그런 계기가 있습니다. 그 계기도, 90년도에 제가 미국에 한번 갔다 그랬잖아요 .그때 갔을 적에 이제, 보러만 다녔죠. 그림은 그때 안하고. 내가 정말 그림을 해야될까 말까, 아니면 벽에서 어떻게 튀어나올까 뭐 이런 고민을 많이 하다가 브롱스 뮤지엄이 있어요. 미국에. 아시다시피. 거기에 갔는데, 거기에 갔을 때 남미의 아티스트, 남 아메리카 아티스트 전이 있었어요. 어느 나라 특별한, 굉장히 중요한, 저한테는, 딱 봤는데, 작가 이름 잊어버렸어요. 제가 책도 사왔는데, 누구 빌려줬더니 없어져 버렸어요. 그 작가, 젊은 작가더라고요.

근데 그 제목이 퍼레이드예요, 퍼레이드. 근데 딱 전시장에 들어가는 순간 여섯명의 굉장히 큰, 키가 한, 저는 이제 한 3미터 넘는다고 생각을 했어요.그런 여섯명의 인물들이 저를 행해 걸어 오는 거예요. 근데 그 인물이 예수, 체게바라, 그리고 그 로메로 신부, 해방신학, 그리고 또 세분은 무슨 장군, 아마 콜럼비아인지 그럴거 같아요. 그 독립시킨 장군일거 같아요. 그렇게 여섯분의 인물이 딱 오는데. 첨에는 그게 입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니까 그게 투 디멘션(2D) 이예요. 2D인데 자세히 보니까 전부 쓰다 버린 나무들을 다 잘라가지고, 그거를 이어서, 다 붙여서 만든 작품인데. 체게바라 같은 경우 눈이 막 형형한게, 그니까 너무 인상적이고 그게 저한테는 충격이었죠. 굉장히 시발점이라고 할까요. 아, 내가 이제 벽으로부터 튀어 나올 수 있구나. 나도 가서 폐품 수집해서 이런 식으로 그림을 해봐야지, 작업을 해야지. 그게 이제 어머니의 눈 작업이 된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 현실과 문화연구의 엄혁씨가 어머니는 한번 했으니까 어머니의 시야, 어머니의 눈이 어떠냐고 그래서 너무 좋은 제목이라고.

이인범: 그 93년도 '어머니의 눈' 전은 그 하여튼 여러모로 선생님의 개인사에서 굉장히 대단히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네요.

윤석남: 굉장히 중요한 터닝포인트라는 것이 일단 저기 이 평면에서 튀어나왔지 않습니까?

이인범: 일단 작품으로써는 평면에서 튀어나왔고, 벽에서...

윤석남: 어머니 얘기가 정말 한국의 어머니라는 것이 우리 어머니를 대표로 어머니를 통해서 이제 이야기를 끝냈구나

이인범: 아까 말씀하셨듯이 굿을 한번 벌이신거, 그 이후에 실질적으로 굉장히 성공적인 작품전을 치르시고 나서 뭐 국립현대 미술관 <민중미술 15년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특별전, 또 오스트렐리아 퀸즐랜드 브리즈번에서 열린 제 2의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 등등 굉장히 많은 국제적인 활동을 하시는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되는 것이 출세적인...

윤석남: '어머니 눈' 전이 저를 그렇게 만듯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국에 있는 큐레이터분들이 눈여겨 봤다가, 1주일 밖에 못했어요 그 전시.

이인범: 아 그랬나요?

윤석남: 네, 딱 1주일 금호 미술관에서 했어요. 인사동에 있는. 그런데 그게 그분들한테 눈에 띄었던 것 같아요. 그 젊은 큐레이터 하시는 분들, 이영철 선생님이라던가 지금 젊지 않으시지만, 하고 그래서 전 정말 굉장히 놀랬고, 사실인가 이걸 믿어야 될까 아닐까 남한테 얘기도 못했어요. 전시 할 때까지, 그렇게 근데 이 정말 다양하게, 그때 정황을 말하자면, 했는데 그 다음에 이제 조금 침체됐었죠.

이인범: 두번 째 개인전 이후에는 작품세계에도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죠. 예컨데 이제 핑크룸 시리즈가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하고 더불어서 빛의 파종이라고 하는 전시에서 보여주는 여러 작품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1990년대 후반 쪽으로 가면은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시던 어떤 이런저런 작품에 대한 모험심이나 작가로서 가지고 있었던 체험을 쏟아내는 어떤 그 내용들이 아주 폭발적이라고 보여질 정도로 굉장히 그... 다양화되고 다변화되고 에너지틱한 모습을 보이는데, 1990년대 후반 전개 상황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윤석남: 그러니까 어머니 눈전을 끝내고 나고 내 얘기를 하니까 그것이 어떤 방이라는 어떤 의미, 공간, 여성의 방이라는 것이 이 나라에서 무슨 의미일까, 여성의 공간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라는 의문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방으로 핑크룸 이렇게 나가다가, 그 다음에 이제 이중섭 미술상을 탔어요. 미술상을 타면 전시를 하게 된다고 했을 때,

이인범: 이중섭 미술상도 뭐 여성작가로는 최초의 상이었고,

윤석남: 네, 저는 전화 받고 알았어요. 너무 놀랬어요. 그리고 사실 이중섭 상이 있는줄도 잘 몰랐는데, 이제 세상일에 어두우니까, 그랬는데, 그래서 그 상을 받으면 1년 후에 개인전을 해야 된대요. 저는 그때 머릿속에 완벽하게 나는 누군가 우리 한국 여성은 무엇일까, 이 현 사회에서 우리의 위치는

이인범: 어머니에 기대지 않고, 한 존재로서

윤석남: 정말 우리가 존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멀었어. 이것이 저의 인식이었어요. 지금도 아직 똑같지만...

이인범: 한 가정에서는 굉장히 저 ...

윤석남: 가정 안에 있는거죠.

이인범: 가정 안에서는 그래도 그 그림을 그리시겠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권장하시고 그러신 좋은 환경이었었는데도...

윤석남: 그건 제 개인적인 환경이 그렇죠.

이인범:네, 사회적으로는...

윤석남: 아, 저 개인적인 환경은 사실 페미니즘 얘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그 자유로운, 개인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갖고 있는 어떤 결핍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통해서 전체 한국의 여성, 옛날 조선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아주 옛날서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여성의 위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고, 정말 인간답게 살아왔나? 라는 그 의문이 들어간거죠.

그게 이제 비로소, 얘기를 이렇게 아주 거대한 주제를 가지고, 어머니가 아니라, 확장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이때다 이렇게 해서 상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이제 999라는 전시가, 빛의 파종이 나왔는데, 그거는 왜 1,000이 아니고 999냐 하는 거는 1,000이라는 거는 완벽수 아닙니까, 우리는 1000을 하기 위해서 여성들이 아직도 우리는 노력을 해야해, 아직도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총칼 듯고 너희들 위치를 내가 뺏어 이게 아니고, 여성으로서 남성의 위치를 내가 뺏겠다 이게 아니고, 우리 공존하자,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당신 남성들도 여성을 인정해야되고, 여성의 능력을 키워줘야지 당신들 어깨도 덜 무거워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999라는 건 하나가 모자라지 않습니까? 이 하나의 갭이 얼마나 큰지 그냥 1000에 비해서 999, 하나는 뭐 그냥 건너 뛰면 될 것 같죠. 아닌거 같다. 이 갭이 너무 크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던 건데, 그걸 제대로 표현이 잘 안되지 않았나...

이인범: 근데 그 작품들을 많이 파셨어요?

윤석남: 어 그게, 많이는 못 팔았어요. 제 생각에...

이인범: 싸게 파셨어요?

윤석남: 싸게 팔았죠. 이게 하나씩 가서, 어느 여성의 방을 장식, 거기거 빛을 발하고 있다. 어떤 희망을 주고 싶었는데, 작품 사는 습관이 잘 안되어 있나봐요.

이인범: 그래서 파종이라는 말을..

윤석남: 파종이라는 말을 그래서 썼죠. 그래서 완성이 안됐어요 그 작품은...

이인범: 단지 전시뿐이 아니라 전시 후에 그것을 나누는 문제까지, 아주 사회학적인 문제까지 고려를 하신거네요.

윤석남:네네, 그래서 그게 완벽하게 999가 어떤 999명의 품에 가서 안겼을 때, 이 작품이 완성된다. 죽을때까지 완성 못될거 같아요.

이인범: 그, 선생님이 아까 몇번에 걸쳐서 이 룸에 대해서, 우리 여성들에게 주어진 룸이라는 공간이라는게 대체 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한 질문 속에서 이제 핑크룸...

윤석남: 주어진 룸이 없다라는 얘기죠.

이인범: 없다... 이 핑크룸 작업에 대해서 좀 조금 형식적인 측면에서 어떤 배려를 하셨는지, 제작하는데...

윤석남: 네, 그러니까 그 저기 위는 그 자개, 저는 자개 참 좋아합니다. 자개장은 없지만, 자개를 좋아하는데, 자개, 아주 화려한 자개 옷을 입고 있는 어여쁜 아주 근엄하기도 하고, 자기 주장도 뚜렷한 한 여성이 그렇지만 이 핑크 소파에 앉아 있는 거죠. 근데 이 핑크 소파가 여기서부터 유기체적인 뭐가 막 튀어나오는 거는 당신의, 나 자신의 욕망,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아주 올바르게 살고 싶은 욕망이 이렇게 꿈틀대고 나오는 거고요.

핑크라는 거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형광 핑크, 아름답지만 굉장히 붕 떠있는, 안주하지 못하고 있는 색깔이고요. 또 구슬을 깔았습니다. 그 구슬을 쫙 깐거는, 거기는 누구든지 그 공간에는 여성조차도 서있을 수가 없을만큼 불안한 공간이예요. 그러니까 여성은 정말 안주할 수 있는 자기의 공간이 없구나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제 구슬을 사용했고, 아까 얘기한 그 발톱은 이제 그게 날카로운 발톱은 위태롭지만 그러나 나는 이렇게 앉아있고 싶어라는, 튼튼한 쇠로된 발톱을 제가 달았죠. 그런 의미가 됩니다.

이인범: 그, 저는 그, 핑크룸이라고 하는 작업을 여러차례 보면서, 여성의 보편적 문제라기 보다는, 정말 아까 흘끗 지나가면서 하신 말씀이, 중산층 여성들, 때로는 허영에 차있고, 때로는 [?분칠을 해 있는] 그런 그 중산층 여성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화상 정도로 이해가 됐었어요.

윤석남: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인범: 노동하고 있는, 노동계층이라던가 뭐,

윤석남: 노동 계층은 뭐...

이인범: 그건 또 아니죠?

윤석남: 네, 전혀 아니죠. 그러니까, 저는 노동계층에 대해서 잘 모른다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한때는 그런 작업도 해봤지만, 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아 이거 내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 얘기를 정말 하는게 솔직한 거지.

이인범: 이게 선생님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는 거네요.

윤석남: 네, 그렇죠. 제 자화상이죠. 그렇지만 욕망은 꿈틀거리고 있고, 네, 이제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거죠.

이인범: 그 일본에 그 가마쿠라 미술 갤러리에서 여러차례 전시를 하신거잖아요. 특별한 사연이 있으셨어요?

윤석남: 네 그럼요. 그 왜 아까 타이거 테일, 호랑이 꼬리전, 그 한국 특별전, 베니스, 베니스 한국관이 생기는 걸 축하하기 위해서 별도로 공간을 마련해가지고,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그때 계셨었는지? 네, 그때 그 전시가 어머니의 눈전에 놨던 작품의 일부를 가지고 갔어요. 일부를 가지고 갔는데, 그 때 가마쿠라 갤러니에 미쯔코상이 왔었나봐요. 저는 모릅니다.

근데 그 다음에 연락이 왔다고요. 얘기 좀 하고 싶다고. 그래서 이제 얘기하니까 당신을 전속, 자기네 화랑에 전속 작가로 하고 싶은데 하겠냐고 그래서, 저야 정말 감사하죠. 그랬더니 가마쿠라 갤러니가 긴자에 있었어요. 네, 긴자에서 처음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가마쿠라에 가 있어요. 근데 거기서 두 번 전시를 했죠. 세번했나? 네, 세번 했나봐요. 2년에 한번씩 하는...

이인범: 가마쿠라 갤러니는 뭐 저, 모더니즘 그 미술의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모노화도 거기에서 많이 전시가 되었었죠.

윤석남: 네, 그렇죠 하종현 선생님도 거기 전속되어 있었고, 굉장히 중요한 전시인데, 아무튼 저, 갤러리인데, 저는 사실 너무나 무식해서 잘 몰랐었죠. 해준다고 그러니까 너무나 감사하지 그래서 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이 역사가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이인범: 그, 일본 뮤지엄에 여러점의 컬렉션도 있고, 이제는 뭐 선생님 작품이 세계 여러나라 뮤지엄에 컬렉션이 돼 있는데, 뮤지엄 컬렉션으로 처음 된 것은 어디예요?

윤석남: 제가 생각하기에는요, 뮤지엄 저기 이 가마쿠라 갤러리에서 전시를 한 다음에 작품을 꽤 파셨어요. 그게 그 미에 현립 미술관, 현립미술관 몇군데, 두군덴가 뭐 갔는데, 정확하게 몇군데 인지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고요. 브리즈번에서 트리에날레를 했잖아요. 핑크룸이 거기에 가 있고요.

이인범: 아, 그래요?

윤석남: 네, 그다음에 타이페이 비엔날레...

이인범: 호주, 호주에도

윤석남: 네, 호주의 브리즈번입니다. 네, 브리즈번에 가면 그 핑크룸이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핑크룸이 타이페이 뮤지엄, 시티 뮤지엄에 또 그것도 이제 비엔날레 할 적에 자기들이 구입을 했고요 그 정도죠. 뭐.. 여기저기까지는 아닙니다.

이인범: 욕심이 많으시네요. 아... 그 빛의 파종이나 핑크룸 시리즈 이후에, 이제 2003년도에 일민 미술관에서 늘어나다 전이 있었죠? 근데 이제 일민 미술관 전시는 뮤지엄급에서 초대 받은 첫번 째 개인전이세요? 이게?

윤석남: 그러니까 그 전에는 이제 물론 여기 조선일보 뮤지엄도 있었고.

이인범: 아, 조선일보 미술관이 있었고, 본격적인 미술관은 아니니까.

윤석남: 네, 그렇죠. 근데 일민 미술관은...

이인범: 일민 미술관은 본격적인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죠.

윤석남: 네네, 알겠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초대 받은 거죠.

이인범: 굉장히 큰 전시였죠 그게?

윤석남: 음... 저한테는 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게 늘어다나는 의미는, 이제 굉장히 제가 부끄럼 많이 타고, 사람 많은데 못가는 그런 병이 있어요. 그래서 오프팅 때도 잘 못가고 이런 병이 있는데, 정말 제가 그런 병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내가 그 이매창이라던가, 450년 전에 여성 시인이지 않습니까? 기생이자 시인이예요, 이매창.

공부를 많이 하다보티까 이매창, 허난설헌 뭐 이런 사람들이 다 나오는거예요. 이런 위대한 여성 시인이 있었구나. 왜 나는 몰랐었지? 그래가지고 이제 공부를 하면서, 전시전에. 그래서 정말 이매창이라는 여성 시인과, 450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서, 당신을 만나고 있어, 나는 정말 이게 만나고 있는거야라는 그런 염원을 가지고 만든게 그게 이매창 늘어나다전입니다.

그러니까 늘어나다라는 거는 아주 간절한 그리움 같은 걸 얘기하고 갈망하고, 이제 이런 걸 표현한거죠. 그리고 어떤거는 손이 떨어져서, 저쪽에 떨여져 있고, 손이 미쳐 팔은 이렇게 되어있고, 뭐 이런거를. 하여튼 팔이 참 중요한 거 같아요 저는. 이 그림이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손끝으로 하고 여기 다 눈이 달려있지 않나? 뭐 그럴정도로, 저는 이렇게 그리고 싶은데 이건 또 일로 막 가고 그래요, 이 손이. 그러니까 이 팔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이인범: 이게 '늘어나다'는 팔이 늘어나다

윤석남: 팔이 늘어나다는 온 몸이 늘어나가지고 내가 당신한테 닿고 싶어. 그 갈망, 또 이제 몸의 변화. 이 늘어나다 보니까 이게 어떤거는 꽃으로, 이게 하나의 연꽃으로 변하기도 하고, 뭐 이런거 많이 했습니다.

이인범: 그때 그 일민 미술관 늘어나다전과 관련된 에피소드 몇가지 있습니까?

윤석남: 네, 그거 굉장히 중요한게, 아주 중요한게, 그 일민 뮤지엄 전시 중에 신문 기사를 하나 봤어요. 신문기사. 이게 요만한 건데 , 신문기를 봤는데, 이애신 할머니라는 사람이 이애신이라는 할머니가 1,025마리의 유기견을 보호하고 그걸 데리고 있다라는 기사를 보고, 전 너무 놀라고 감동받고, 기뻤어요. 아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하는, 내가 정말 생각하고 있는 여성의 어떤 모습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다음 작품은 이거야. 그걸 보는 순간 그냥 딱 결정해 버렸어요.

이인범: 아 그래요.

윤석남: 그래서 이제 이애신 할머니 찾아가고, 거기 그 파주에 회원도 되고, 그래서 그 5년 후에 나온게 1,025마리 사람과 사랑없이, 그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그 일민 미술관에 그 전시가 없었다면, 없었어도 또 그런 기사는 불 수 있었겠지만, 일민 미술관에서 그 전시를 계기로 그 기사를 만났라는게, 동아일보였던 거 같아요.

이인범: '늘어나다'에서 '사람과 사랑없이' 1,025마리의 강아지로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는...

윤석남: 연관성이 굉장히 긴밀하게 있는데, 그냥 개만 보고는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윤석님이 이러지? 이런 말투었여요. 사실 주는 여성입니다 그게..

이인범: 5년 동안 그것만 하셨어요?

윤석남: 5년 동안 그것만 하는데, 물론 중간중간 기획전을 참여하면서, 하지만 오로지

이인범: 관심은 그쪽으로 집중되었었군요.

윤석남: 아 그럼요. 이거 방해하는 게 싫은 거예요. 지금 이걸로 굳히고 있는데, 아무튼, 아...근데 뭐 이게 힘들어서 어쩌지? 뭐 이런 생각 해본 적이 없고요. 아 이거 끝날 때까지 살아 있으면 참 좋겠다. 이런 생각했어요. 끝날 때까지 못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이인범: 저는 그 지금 1,025 사람과 사랑없이 전, 이 작품 전시를 보면서, 선생님이 뭔가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는...

윤석남: 네... 저는 종교는 없어요. 그렇지만, 아마도 샤먼적인 종교가 있나? 나는 무속도 종료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저는 불교쪽이 좀 강하죠.

이인범: 그리고 그, 늘어나다 전에서도 이제 그런 염원이나 갈망같은게 있겠지만, 그것은 이제 도상적인 어떤 [?셰일]이나 거를 통했는데, 강아지를 이렇게, 이건 뭐 어떻게 생각하면, 선생님을 비우는 일로도 읽혀지고...

윤석남: 아 그래요? 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할머니를 재현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 개는 인간이 그 개를 통해서 그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그 치욕적인 면을 봐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 정말 개라는 것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고, 물론 뭐 사나운 개도 있지만, 이거를 키우다가, 자기가 싫다, 귀찮다고 해서 버리고...

이인범: 정말 이게 이제 사회 문제가 되고...

윤석남: 네, 이게 이제 사회 문제가 되는 것 까지 저는 생각도 안해요. 어떻게 자기가 그 아무 없는...

이인범: 그렇게 사랑하던 걸...

윤석남: 사랑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걸 어떻게 버립니까? 사람 버리는 거나 똑같은 행위이죠. 그런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욕적인 면, 가장 더러운 면이 바로 이런 행위 같아요. 그거 하는 동안 사람이 막 싫었어요. 막 사람에 대한 그 환멸...

이인범: 하나하나 그 개를 만들면서 인간을 만나는, 인간의 가장 치욕적인 면을 만나는 것 같은.

윤석남: 네, 치욕. 아 정말 나는 나도 사람이지만 나는 사람 너무 싫다 막 이런 얘기를 입에 댈고 살았어요. 어떻게 버릴 수 있어요? 근데 그 파주에 가보시면은 기절을 해요. 이 애들이 막 수백마리가, 백여마리가 달려들어요. 얼마나 굶주렸으면, 얼마나 인간의 손길이 그리웠으면, 뭐 무서울 정도로 달려들어요. 어떻게 그런 그 개를 버릴 수가 있나요? 나는 이런데도 보면은 떠돌이 개들이 많아요. 그러면 막 너무 가다가도 뭐가 먹을게 없나하고 찾고 그래요. 쟤네들 줄거 없나.

이인범: 그 1,205마리 개를 만드시는데, 거기에 선생님께서 이제 그 한 마리, 한 마리를 만들 때 마다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천됐는지 이제 그 느낌이나 선생님께서 만드신 작가적 제작 동기 같은 거는 제가 충분히 이해를 하는데요. 그것을 형상화 시키거나 그것을 실천 이제 실천하는 일에서 고려했던 거는 어떤 것들이 있었어요?

윤석남: 아니 실천한다라는 것이 작품이 아닌 면이 하나 있고, 작품을 통해서 하는 면이 하나 있고, 두가지 면이 있는데, 작품이 아닌 면 쪽으로는 그 운동, 카라(유기견 보호단체)라든가, 뭐 또 이애신 할머니 찾아간다던가 하는 걸로 제가 할 수 있는 한 작가로서가 아니라 운동하는 데서 같이, 뭐 만나는 건 못해도 회비라도 꾸준히 보내고, 지금도 회원이고, 뭐 이사로 되어 있더라고요. 임순례 감독이 대표예요. 그러고 있고, 작품으로 하는 거는 정말, 이거는 말도 안되는 작품이잖아요. 이게 운반하기도 쉽지않고...

이인범: 말도 안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세요?

윤석남: 이게 말도 안되는 작품이라도, 일단 형상화 하고 싶었어요. 내 눈으로 1,025 마리의 버려진 개의 묵상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어요. 다 완성 됐을 때에, 그리고 한마리 한마리를 할 적 마다, 얘네들이 나무 같지가 않아요. 저는 그래요. 마치, 얘네들이 나무 하나의 작업이 아니라 눈동자 하얀 부분 딱 찍을 때는 아, 뭐 그래 됐어 뭐. 참 이게 할머니잖아요. 제 나이가. 그래서 그런지, 어 그렇게 돼요. 나는 뭐 다리는 너무 길게 하지마 이러는 거 같고. 하여튼 미안한 마음을 그냥 쏟아 붓는 거죠. 인간으로서 이 개한테 너무 죄를 지은 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여기에다 막 쏟고 싶은 거예요. 네, 근데 나무가 돼서 막 깨지고 그래요.

이인범: 그 작품전 개최하시면서 그 어떤 그 관람객들, 또 이런저런 거기에 관련된 코멘트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선생님께서 의도하셨던 반응들이나 설득을 하신것 같아요?

윤석남: 그게 못 미치죠. 네, 이제 이런게 있는거예요. 그냥 일반 대중들은 와서, 어머 이 개, 이게 뭐지? 이래요. 뭔가 내가 잘못했구나, 뭔가 내가 부족했구나. 그것을 왜 느끼냐 하면, 아, 개 떼거리 그냥 이렇게만 느끼는 것 같아요. 근데 어떤 분들은 깊게 보신 분들은 전화가 왔어요. 자전거 타고 가다가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그런 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작품으로 봐주는 거예요.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거지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나의 애절한 마음 같은 건 안 읽히는 거예요.

이게 뭔가 잘못된 것예요. 아 이게 뭐가 잘못됐지? 이런 생각을 많이 하죠. 저는 정말 작품을 통해서 더 알려지는 작가가 되는 것도 하나의 욕망이지만 희망이지만, 일반 사람들도 와서 개는 버리면 안돼. 정말 이러면 안되지 이럴 순 없어. 이런 걸 좀 느끼게 해주고 싶은, 그래서 시청 앞에 가서 할까? 뭐 이런 생각까지도 할 정도로 근데 그거는 실패한 것 같아요. 역시 작품이다 이거죠.

이인범: 그 문제하고 그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자칭 그렇게 부르고 싶다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페미니스트 작가로서 하셨던 페미니즘운동 차원의 문제 이제, 그 문제는 어떻게 생각이 되세요?

윤석남: 저는 그 페미니즘이라는 거를 어떤 정의를 여러분들이 많이 내리시는데, 저는 나 나름대로 일종의 모성이라고 생각을 해요. 근데 여태까지는 모성은 희생만 당하고 뭐 이런 모성으로만 생각했는데, 그게 그냥 단순히 희생 당한 게 아니잖아요. 비록 자기 자식들만 위해서 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힘을 다해서 사랑을 주는 거잖습니까? 이런 행위는 정말 종교도 할 수 있을까요? 난 종교는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종교 이런 걸 다 떠나서 이 여성이 갖고 있는 자기 몸으로 자기 자식을 낳고 그런 모성성은 나는 종교고 뭐고 다 떠나서 그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을 해요.

이인범: 뭐 종교적으로도 그 모성성의 문제를 그 구비하고 있지 않은 종교는 별로 없어 보이긴 하는데...

윤석남: 네, 뭐 저는 사실 종교는 잘 몰라요. 그러니까 함부로 얘기하면 막 뭐 할텐데도 불구하고, 근데 그 모성성은 여성의 몸으로 구현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거, 그게 사실 여태까지는 그거와 이렇게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저 우리 엄마는 저래, 엄마는 그냥 고생하는 사람이야. 뭐 이렇게만 치부가 되는, 이걸 표면 위로 끄집어 내서 이것의 정체를 좀 더 구현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이제 이 1,025마리, 근데 그렇게 안 된 것은 제 잘못이겠죠 뭐.

이인범: 근데, 어머니에서 출발하셔서 뭐 그 어머니를 벗어나셨지만, 다시 또 어머니로 그 이제 또다른 차원의 어머니, 모성성의 문제, 보편적인 문제로 이제 다시 돌아오신 거네요.

윤석남: 그렇죠. 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정말 제일 중요한, 작가로서 제일 중요한 거는 늘 저한테 그 경고를 하는거는. 너 거짓말 하는거 아냐? 너 거짓말 하고 있지 않아? 이제 진짜 네 모습이야? 이런 질문을 노상 합니다 저는. 그러면 사실 대답이, '아니야'이런 말이 안나와요. 저는 막 이렇게 적당히 이렇게 작가로서, 작가로서 더 크고 싶고, 좀 더 새로운 무언가,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새롭기 위해서 무엇을 가미 시키려고 하는 그런 거가 저한테 발견할 때 마다, 저는 어머 나 이러면 안되는데, 이러죠. 그렇지만 뭐, 사람은 사람이니까. 페임(Fame)을 위해서 막 질주할 때도 있고 이런거죠.

이인범: 선생님 그 이제, 2008년에 아르코 미술관 '1,025 사람과 사랑없이' 라고 하는 전시, 전시 이후에는 보면은 다시 룸 시리즈가 이어져요. 여기에는 핑크룸이 아니라, 블루, 그린, 화이트...그 룸 시리즈에 대해서 다시 한번 좀 말씀해주세요.

윤석남: 네, 이제 그, 제가 작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굉장히 많아요. 생각이 많은데, 이 개 시리즈를 하고, 인간에 대한 어떤 그런 환멸, 그거 때문에 굉장히 괴로웠어요. 사실은. 그러니까 막연한 거 같이 느껴시겠지만, 저로서는 나도 포함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 인간이라는 큰 테두리를 봤을 때, 나도 포함되지 않습니까? 나도 포함되기 때문에, 아, 정말 나도 너무 위선적이야 내가 정말 위선적으로 살고 있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러면 정말 나는 어떻게 살아왔지?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되더라고요.

그것이 나의 어렸을 때 모습이 하나의 어떤 환경으로 구현되고 그러다 보니까 이게 20대의 나의 모습, 40대의 나의 모습, 80대의 나의 모습, 죽은 다음의 나의 모습, 이런거가 막 하고 싶더라고요. 말하고 싶더라고요. 근데 20대의 나의 모습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저는요, 아마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봐요. 그때 그 어렵게 살았던 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거는 기억이 잘 안나요. 정말 얘기하고 싶은 거는, 핑크룸, 내가 이제 그림을 시작했을 때에 핑크룸이잖아요? 그런 룸을 하다가, 그래 룸을 하는데, 그러면 죽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것은 나한테는, 다른 사람한테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빛인 거 같아요.

공허,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내가 돌아가는 거, 물론 내 뼈도 남고 살도 남고, 썩겠죠. 물리적인 거는 남는데, 나의 말하자면 정신이라는 것은, 혼이라는 것은, 그냥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어떤 빛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이 돼요. 그 전에, 바로 죽기 전에 모습이 무엇일까? 이게 화이트 룸인거예요. 그럼 블루룸을 뭘까요? 블루룸은, 제가 처음에 블루룸을 하게 된 거는 바리데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바리데기 잘 아시잖아요. 강을 건너가고, 생명을 살리고, 물을 가져오고, 물을 가져와서 아버지 살리고, 그리고 아버지가 나라의 반을 주겠다는 걸 거부하고, 죽음의 세계를 갑니다.

그러니까 죽음과 삶의 가운데 가서 죽은 혼이 오면 그 혼을 좋은 곳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게 바리데기예요. 아니, 어떤 설에 의하면 그래요. 여러가지 이본이 있지만, 저는 그걸 택한거죠. 이 바리대기가 무당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우리나라 무당의 최초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거를 정말 그림으로 작품으로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게 블루룸이예요. 푸른 강물을 건너가고 물을 가져오고 그런거고, 그 다음에 이제 핑크룸은 그렇게 내 얘기인거고, 그 다음에 인간이 망치고 있는 자연이라는 거, 우리가 인간들이, 저도 망치고 있잖아요. 여기 나무 다 베고 집을 지었으니까.

나를 포함해서 인간이라는 것이 자연을 얼마만큼 훼손하고 있는가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죠. 자연의 숲속에 갔을 때 어떤 빈터에서 우리가 느낌, 느낌, '아 이러니까 정말 좋아'라는 그 느낌을 한번 작업으로 표현해 내고 싶었어요. 그게 이제 그린룸이고, 그게 저의 이제 40대, 60대 이때의 모습이고, 흰거는 이제 80대 저의 모습이고, 이렇게 되고, 핑크는 저의 40대 모습이고, 네, 이렇게 되는 거죠. 블루룸은 이제 전체 통합된 거고. 이래서 방 시리즈가 들어간 겁니다. 앞으로 무얼 할런지 아직 잘 몰라요.

이인범: 그, 핑크룸 하실 때에 룸에 대한 생각하고는 차원이 전혀 다른...

윤석남: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죠. 그렇지만 어쨌는, 공간이,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공간의 개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거가, 지구가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너무 크게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이렇게 확장됐죠. 개인의 내 방으로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이렇게 뻗어 나갔다고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되는거죠.

이인범: 내년에 그, 서울시립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게 되어 있으시던데...

윤석남: 네, 회고전 반, 신작 반 이렇게 할겁니다.

이인범: 신작으로 구상하고 계신 건 어떤 것인가요?

윤석남: 네, 저는 지속적으로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여성 밖에 못해요. 남성이라는 대상을 만들어 본 적도 없어요.

이인범: 남성이 되실 수 없으시니까.

윤석남: 모르겠어요. 안돼요.

이인범: 지금까지 말씀하신 바대로라면은 그 선생님께서 살아온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한치도 벗어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

윤석남: 네, 한치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인범: 그런 의미에서 진정성을...

윤석남: 진정성은 있지만 상상력 부족일 수도 있지요. 근데, 작가로서 어떤 굉장히 높은 상상력 같은게 요구가 될런지 모르는데, 저는 자꾸만 이 밑으로 이 파고 들어가는 형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근데 앞으로 거기서 할 거는 지금 다섯명의 여성, 역사속의 여성과 만나는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다섯명인데 그게 첫번째는 허난설헌을 제가 만나는 거고요. 그 다음 이매창을 만나고요. 그 다음에 이제 제주도의 김만득, 제주도의 거상 김만득, 이게 제일 저는 저한테는 찍혀있는, 그 다음에 이제 황진이, 예인으로서의 황진이, 마지막에 한 분이 있는데, 그거는 지금 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한분이 있는데,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요.

이인범: 선생님께서, 정규 미술 교육을 받으시고, 미술계에 진입을 하셨다기 보다는 어...그, 삶의 열망이나 갈망이 선생님의 작품에 어떤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에너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미술사적인 어떤 컨텍스트(context)나 혹은 그 전문적인 어떤 그 미술의 어떤, 형식적인 문제 보다는, 어떤 민속학적인 소스 같은 것들이 많이 선생님의 작품에 들어오는 거 같고요.

생활과 삶의 일치나 불일치의 문제에 굉장히 민감한 감각을 가지고 계신 거 같아요. 어... 그, 미술사적인 어떤 전문성이라고 하는 것과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진정성이라고 하는 문제와는 조금 늘 부딪히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작품세계의 성격이 두드러지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선생님,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의견이 있으신지요?

윤석남: 그러네요. 말씀 그렇게 해주시니까, 음... 다른 생각이 지금까지도 막 이렇게 왔는데, 어 그런 것 같네요. 그렇지만 그게 과연 작가로서 꼭 가야할 길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죠.

이인범: 선생님 지금까지 작품생활을 평생동안 해오시고 나서도, 내가 작가인가 혹은 그런 생각을 계속 하세요?

윤석남: 죽을 때까지, 아 그거는요. 남들이 아무리 인정을 해도. 정말 그게 뭐라고 얘기를 할까요? 작가, 정말 가고 싶은 뭐가가, 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거 같아요.

이인범: 아직 잡히지 않은거...

윤석남: 아직 잡히지 않은 거,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최고의 어떤 그 아름다움을 그게 무슨 뭐 숭고의 미 그런거 말고, 최고의 어떤 그 정말 그, 현실에서 좀 유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와, 이거야'라는 어떤 그런 대상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거기에 못 가봤다고 생각을 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이인범: 내년에 개최되는 서울시립미술관전시가 대단히 기대되는데요. 제가 또 한번 선생님의 새로운 그 예술세계가 전개되는 모멘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윤석남: 아, 그랬으면 너무 감사하죠.

이인범: 오늘 아주 장시간 내에서 말씀을 여쭤야 될 일을 아주 짧은 시간에 그, 여쭙느라고 제가 허둥지둥 됐는데, 오늘 여러가지 그렇지만 귀한 말씀을 많이 들어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석남: 감사합니다. 저도 정말 이런 기회가 흔치 않거든요. 정말 만나뵈어서 반가웠고요.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작가로서는 그게 좋은 영광이면서 동시에 기회이기도 한데, 정말 감사합니다. 불러주셔서요.

제작

진행 : 이인범 교수

카메라, 조명 및 음향 감독 : 프랑수아 사이칼리

영상 편집 : 프랑수아 사이칼리

자막 및 번역 : 김소영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