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노암: 오늘은 2014년 2월23일 일요일입니다. 저는 전시 기획하는 김노암이고요. 어…저희는 오늘 파주 출판 도시에 위치한 아트 스페이스 휴에서 초대작가인 윤진섭 선생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윤진섭 선생님은 잘 알려졌다시피 오랫동안 작가활동과 평론가 활동 그 다음에 전시기획자 활동을 해왔고요. 우리 미술계의 다양한 분야에 활동을 통해서 동료 작가들… 또 후배 작가들에게 미술활동의 중요한 플랫폼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어…최근 들어 평론가, 기획자 활동 이상으로 작가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더 활발하게 이제 시작하신 걸로 이제 알고 있고요.
그래서 아마 그런 어…과정을 통해서 저희 아티 스페이스 휴에서도 저희가 보통 이제 이머징 아티스트 젊은 작가들을 주로 초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어… 오랫동안 연륜이 있고 그 다음에 있고 다양한 활동을 해주신 윤진섭 선생님을 모시고 향후 어…저희 그 젊은 작가들과 만날 수 있는 네트워킹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계기가 마련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첫 번째 제가 윤선생님에게 드리고 싶은 질문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문학적 소양...또 그 다음에 다양한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어…이미 그 청소년 시기에 예술가 또는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어… 어떤 계기로 예술가 또는 미대를 지망하게 됐고 또 가족들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네, 말씀을 좀 부탁 드립니다.
윤진섭: 특별하게 우리 집안에서 뭐 선조들이 화가가 있다던가 그런 건 아니었는데, 이제 그 농촌에서 이제 태어나서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이렇게 겪다 보니까 이 시골이라는 게 주변에 상당히 뭐…만져서 뭘 만든다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 형성이 됐어요. 뭐냐 하면 어 우리 시골 동네가 저…천…그때 당시에 천안군 성환읍 어... 면 수향리인데 찰흙이 많이 납니다. 이…뭐냐 가마에서 그 그릇을 만듭니다. 질그릇을 만드는…
그래서 그 구덩이가 많았어요. 그 찰흙 같은 것을 동네에서 가져다가 집에서도 만들고 학교에서 수업시간에도 만들고 막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는 조각을 그냥 뭐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경우예요.그래서 추상적인 어떤 형태도 흙으로 빚어서 아니면 시멘트로 집 공사하고 그럴 때 해서 뭐 벽에다 붙인다든지 뭐 그런 작업을 했던 기억도 나고, 그리고 또 이제 형제들이 많다 보니까 형들이 쓰던 공책 뒤에 그 쓰다가 남는 부분들, 뭐 이런데다가 그냥 연필, 크레파스 뭐 이런 거 굴러다니니까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심지어는 뭐 어머니 성경책, 어머니가 이제 독실한 기독교 신자시거든요. 그러니까 그 성경책에 보면은 마가복음 끝나고 그 다음에 간지가 나오고 그러면은 거기다가 그림을 그려가지고 목사님이 하루는 아…저 이 우리 권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성경책 관리를 이렇게 못하셔가지고 어린애가 그림을 낙서를 하고 그랬냐 그런 꾸중을 들으셨다는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이제 그런 거죠. 그러니까 제 어떤 실험적인 어떤 그런 배경 그러면은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아까징끼라 그랬어요 그때는
김노암: 예,예, 빨간 약
윤진섭: 예, 그렇죠 빨간 약, 그것을 형들이 가지고 있는데, 펜으로 찍어가지고 이 만화 같은 걸 그리고 그런 거예요. 그 빨간색을…요즘 화가들이 고추장으로도 그리는 작가가 있고, 뭐 귤로도 그리는 작가가 있고 심지어 그런데, 그런 거는 이제 색으로 보는 거예요. 빨간색…또… 뭐가 좀 있다고 그러면은 유년시절에 이제 뭐…에노기라 그랬어요, 에노기… 이제 어머니가 에노기라 그러는데 일본말로… ‘에’라는 것이 이 ‘회’자 그림’회’자 ‘노’, ‘구’를 기라고 발음하니까, 에노기 뭐 이렇게 해가지고 그 동그란 물감이 있었습니다. 양철통 안에 열 두 색이 들어 있는데 그런 거를 어떻게 사게 되면은 그걸 가지고 수채화를 그리고 그랬는데, 어쨌든 그런 성장 배경.
그리고 중학교 때 제가 약간….에…그… 일탈행위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감수성이 좀 예민할 때거든 사춘기고, 미술반 활동을 하는데 그때 이제 그…큰 집에 그 형님이 동국대학교 법대를 나오셨는데, 그런 분인데 저하고는 열 세 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책이 그렇게 많았어요 방에, 사상계부터 시작을 해가지고 뭐 별의 별 책이 다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그 중학교 때 제가 그거를 보는 그런 기회로 삼았는데, 그게 지금 생각하니까 대단한 거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또 한가지를 말씀 간단히 드리면은 큰 형수가 시집을 올 때 한국문학 전집 중에서 딱 한 권을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 이상, 김해경의 수필, 그 다음에 시, 그 다음에 날개, 그 어떤 단편 소설이 실려 있었거든요. 그거 굉장히 전위적이잖아요.
김노암: 그러니까 한국의 모더니스트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죠.
윤진섭: 예, 예 그래서 이제 그런 거를 읽고, 그 다음에 뭐 그냥 학교도 밥 먹다시피, 밥 먹듯이 안가고 막 좀, 약간 좀 일탈행위를 많이 했죠. 그러면서도 공부는 안 했지만 뭔가 그런 어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거는 제가 굉장히 추구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의식이 이제 꿈틀댄 거예요 그러니까, 그래서 수학여행 안 간다 그러고 그 경비로 책을 샀는데 그 중에 카프카의 성 같은 게 있었어요, 단편집, 그리고 일본의 단편문학 전집 아쿠다가 류노스케 그 상도 있잖아요. 그 하동 같은 거 그 갑빠 얘기도 나오는데 그게 나중에 페이스북 SNS 그… 글 쓰면서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 어렸을 때 이것이 형성됐다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잠재되어 있는 거예요 항상. 잠복해 있다가 다시 나오는 거죠. 그런 게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저는, 그것이 어떻게 떠오르게 됐는가, 그때, 기억력 좋을 때 그때 읽었던 것들은 다 이 내장되어 있거든요.
김노암: 어… 대학교 2,3학년 때 이미 20대 초반 이른 시기에 에… 당시 미술계의 화단에서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한 주류 작가인 이건용 선생이나 이런 분들과 함께 작가 활동을 같이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그… 같은 프로젝트, ST 활동을 같이 하셨는지 얘기 부탁드립니다.
윤진섭: 그…이제 그것보다 조금 전에 제가 그 고등학교 입학할 그런 무렵인데 그때 독서 신문이라고 있었어요. 독서신문이 이제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삼성 출판사의 박물관, 또 거기 명예 관장님이죠, 김종규 관장님이 그 독서 신문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그때 발행하셨다는 거예요. 아 그래서 그러냐고, 저 중학교 때 읽은 적 있습니다.
김노암: 그 원로 선생님….
윤진섭: 그렇죠, 그 원로 선생님, 그래서 아 그거 제가 중학교 때 보고 감명 받은 게 있는데 뭐냐 하면, 그때 이제, 아마 그것이 실린 거는, 70년도에 실렸던 것 같은데, 뭐가 실렸나 하면은, 소위 그…유명한, 우리가 현대 미술사에서 유명한 그…어디 사직공원에서 정강자, 김구림, 정찬승 그 다음에 고호라고 하는 연극하는 분이 있거든요 이런 분들이 제4 집단을 조직해가지고, 거기서 이제 기성문화를 장례 지내자라고 해서 관속에 말이죠 꽃 같은 거, 삽이라든지 도구를 넣고, 그리고 행진하다가 연행돼가지고 즉심에 넘어가는 그런 사건이 있거든요. 그 기사가 크게 났어요, 그거를 이제 읽었어요, 아니, 독서신문에서 이제 고등학교 1학년 때 그걸 봤던 거죠.
그것도 역시 사촌형님이 가지고 있던 그런 책이었는데, 그래서 그거를 스크랩을 했거든요. 왜냐하면 그 글을 내가 읽으니까 굉장히 이것이 쇼킹하고 저로서는 아주 아주 흥미진진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벌써 그 때 당시에 몰랐었는데 그런 걸 접하면서 아 이런… 그때 이제 해프닝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거든요. 아 이런 게 예술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것들이 이제 자양분이 됐던 거죠. 그래서 그런 것들이 기억이 나고... 그 다음에 이제 어…그 대학교 이제 입학을 한 것이 1975년, 그래서 이제 재수를 해서 들어갔는데 그때 이제 윤제명이라는 우리 이제 그 경주 출신의 친구하고 그 모래내에서 화실을 경영을 했어요 입시 미술...그랬는데 그 때 어느 날 이건용 선생님이 작품 제작을 하기 위해서 조수를 데리고 오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벽에 이제 그 천을 붙여 놓고 허상, 일루젼 그런데 막 이렇게 펌프라고 그러죠 그걸로 조수가 압축펌프질을 계속하면 스프레이로 이렇게 쏴서 그늘을 이렇게 밝은 부분을 만들어서 그 이미지, 나중에 천을 펴면 이미지가 생기는 그 유명한 작품을 했거든요, 그거를 하러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건용 선생님을 만났거든요. 근데 나중에, 나중에 2년 뒤에 3학년 때 제가 이제 누나들이 서울에 많이 사니까 넷째 누나네로 갑니다. 그게 북아현동이예요. 근데 그 북아현 동에 그…고가 고가가 있어요 지금도 그 육교가 있는데 그 옆에 4층 건물 2층에 이건용 선생님의 작업실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건용 화실이라 그래가지고 굉장히 그 때 파리 비엔날레 갔다고 신체항으로…유명한 그런 그…
김노암: 그렇죠 유명한..
윤진섭: 유명한 스타 작가였는데 이 작품이 안 팔리니까 생계가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이 입시 화실을 경영하신 거예요. 그래서 거기 이제 학교 갔다 오다 가다 들리면서 만나게 됐는데 그 때 이제 누가 거기를 자주 찾아 오셨냐 하면 어… 성능경 선생님, 김용민 선생님, 트리오니까 거기다가 장석원 선생님, 이렇게 해서 네 분이 4인 이벤트도 하고, 3인 이벤트도 하고, 그땐 이벤트라는 말을 썼거든요, 이건용 선생님이 이벤트를 75년도에 백록 화랑에서 처음으로 한 분 이예요.
그래가지고 그 위에 세대들은 이제 말하자면 정찬승, 강국진, 이런 청년작가 연립전 세대들이고 그러니까 시차로 보면은 약 한 8년 정도 됩니다 그게, 한 8년에서 10년 정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67년 이니까 청년작가 연립전이…그래서 이제 거기에 그… 화실에 이제 놀러 가면 별의 별 분들이 많이 와요. 뭐 시나리오 쓴다는 분도 오고, 자칭 철학자도 오고, 그러니까 거기 사랑방처럼 사람들이 오면서 이야기 나누고, 김한 선생 이라던지 이런 분들이 와서 또 ST, 이제 회원들, 김복영 선생님도 그 때 오시고, 그래서 어… 그 해에 77년도 서울 화랑에서 이벤트를 이제 같이 하는 거예요.
저는 이제 완전히 무명인데, 학생인데, 이건용 선생님은 그래도 스타인데 말이지, 같이 하자 이렇게 되어 가지고 같이 퍼포먼스를 했다니까 그래서 제가 3개를 발표를 해요. 그건 아주 굉장히 파격이죠 그러고서 얼마 있다가 ST 그룹 들어와라 그래가지고, 어...경력도 일천한데 아주 그 대표적인 그룹에 들어가게 되니까 굉장히 그 뭐 자신감이 넘친다고 할까 그랬는데, 학교에서는 이제 안 좋아하는 거예요 교수님들은... 임완규 교수님 같은 경우는 부르더니, 연구실로 부르시더니 "작가는 대기만성 해야 한다" 그러면서 타이르시던 그런 기억이 나네요
김노암: 80년대 중반에 약 7~8년간 교편 생활을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 그 시기에 이제 미학 관련된 연구도 하셨고요 그 시기가 작가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또는 그 향후에 평론가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계기들이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윤진섭: 군대 갔다 와서 81년, 졸업하고 갔으니까...79년도에 군대갔다가 81년도 6월인가 제대를 하니까, 그때 당시 영등포 공고에 자형이 교무부장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제대했다고 이제 인사를 가니까 우리 학교에 강의를 나와라 그래서 처음에는 강사를 이제 6개월 하고 그 다음에 이제 전임 교사가 되어 가지고 82년 신학기 부터 89년 2월달까지 제가 교사로 근무를 하면서 그래서 이제 미술 교사를 하는 건데, 거기에 이제 이게 공고다 보니까 뭐 건축과, 전기과, 기계과 뭐 있는데 거기에 디자인과가 있어요. 그 디자인과에 이론도 가르치라는 거예요, 아니 그래서 디자인과 이론이라는 걸 과목을 보니까 의장, 의장이 뭐나면 이제 디자인의 일본식표기, 한문식표기고 그 다음에 뭐, 도학 그 다음에 재료학, 공예 재료학이죠, 색채학, 뭐 과목수가 말이에요 미술 말고도 굉장히 많은 거예요.
그래서 뭐 가르쳐야 되는 거야. 그리고 공예 재료학도 어떻게 보면 금속 재료 이렇게 보면요, 깊이 들어 갑니다. 뭐 거기서 공부한 게 많아요. 체심 입방격자니, 뭐 면심입방격자니, 뭐 그 모르는 건 기계과 선생님들한테 물어 봐가면서, 이제 도학 같은 건 굉장히 어렵거든요, 이제 건축과 선생님한테 물어 보면서, 그렇게 해서 가르쳤는데,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중에 도장 있잖아요, 도장, 도장 이라는 게 또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쉽게 말하면 페인트칠이에요. 도장이, 그래서 보니까 요즘 분채 도장이... 해서 요새 조각가들 많이 쓰잖아요. 그거를 그 공업용 자동차 도료 가지고, 분채 도장을 쓰다 보면, 그리고 평할 때는 그때 배운 기초 지식들이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이렇게 보는 거죠.
김노암: 어... 대학교 2,3학년 때, 이미 20대 초반 이른 시기에 당시 미술계 화단에서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한 주류 작가 이건용 선생이나 이런 분들과 함께 작가 활동을 같이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같은 프로젝트, ST 활동을 같이 하셨는지 얘기 부탁 드립니다.
윤진섭: 그때는 뭐 사간동에 현대 화랑이 새로 그... 이사를 가가지고 건물을 짓고 문을 연 그런 시기였고, 인사동에는 어...화랑들이 거의 없었어요. 화랑들이 제가 보기에 문헌화랑이라던지 어... 뭐 그 다음에 현대 화랑은 이미 그리 갔고, 선화랑이 그때 77년도에 막 문을 열 때거든요. 그리고 거기 또 뭐가 있나 통인 화랑 거기 그런 게 있었고, 화랑이 거기...10개 정도 있었던 거 같고, 또 미술회관이 조계사 맞은 편에 있었어요. 일본식 건물인데, 2층인데 나무 계단 삐거삐걱 하고 말이죠. 그것이 이제 저 문예회관, 동숭동 문화예술회관으로 옮기기 전까지 입니다. 거기가 이제 주로 활동을 많이 했던 데 입니다.
그러니까 대학교 가기 전에 재수를 할 때인가 제가 이제 광화문에 있는 입시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거기를 구경을 가면 박길웅이라는 작가 있지 않습니까, 국전에 최초에 추상으로 대통령 상을 받은 작가 이분이 미국에서 와가지고 암이 걸렸던가 그랬어요. 그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런 거예요. 근데 전면에, 2층 전면을 천으로다가 싸고 거기다가 그림을 그린 그런 작품을 본 기억이 납니다.
김노암: 소위 이제 설치 미술을 한 거죠.
윤진섭: 설치 미술을 한거죠. 그런 걸 봤고, 뭐 하여튼 그땐 자리가 그만큼 없었으니까, 근데 1977년도에 조계사 맞은편에 아주 한국의 전설적인 화상이라고 하죠. 김문호 선생님이 명동화랑을 접고 재기하려고, 자수 하시는 어...그...한 선생님이라는 할머니가 그 때 거기 계셨어요, 연세 드신 분이. 같이 한상수...한상수 선생님일 거예요,자수. 그래서 입구에는 자수 이렇게 샵이 있고, 그 안에는 견지 화랑이라는 그런 화랑을 다시 열어서 재기를 도모 할 땐데, 그러다가 이제 몇년 뒤에 돌아가신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거기서 ST전을 할때 제가 이제 거기 들어가서 퍼포먼스를 하죠.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이라는 거를 퍼포먼스를 하는데... 그 뭐냐면 내용이 이제 조그만 달구지에 다가 그 안에 이제 색종이라던지, 자갈이라던지, 나뭇가지 같은 거를 어... 가지고 다음 거를 끌고 들어 와서 관객들과 같이 참여하면서 울타리도 만들고, 집도 만드는 그런 작업이거든요. 그래서 얼마 전에 그 권여현 선생이 2009년도에 경기 도자 비엔날레 거기서 제가 퍼포먼스를 기획했잖아요. 국제 퍼포먼스 전, 그래서 세라믹 패션이라는 걸 했는데, 버스 타고 가면서 그런 얘기, 책을 하나 주니까 보더니, 어 선생님 이 때 선생님 유목을 하셨네요.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했던 그런 일화도 있고, 하여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제 그때 미협 회원이라고 해봐야 고작 뭐 한 이천명 정도, 지금은 이만 삼천명인가 오천명인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가리방이라고하는 등사 그걸로 해서 이렇게 뭐 회원명부가 뭐 얇아요, 이렇게 누가 보여 주시는데 그때 당시에.그러면은 만나면 다 거기서 거기서 만나는 거예요, 전시오픈인가 뭐 그 다음에 뒷풀이 막걸리집 가고, 그래서 맨날 거기서 보니까 그 분들이 그 분들이야.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친분이 다 이어져 오고, 그 분들이 원로가 되고, 이렇게 상황들이 된거죠.
김노암: 그래서 이제 윤선생님은 아주 일찍부터, 20대부터 소위 저 우리나라 미술계의 센터에서, 센터 몇명 나누기는 모양이 좀 그렇지만, 어쨌는 아주 중심적인 활동의 경험을 먼저 하신거고, 어... 그 다음에 생각해 보면, 당시 그.. 사실 이제 그 70년대에 미대를 다니고, 그 때 계셨던 분들이 히피 세대거든요, 이제 우리나라로 치면…
윤진섭: 그렇죠. 예,예
김노암: 베트남전 시기고, 어... 상당히 이제, 사회적인 어떤 그... 발언에 대한 어떤 어려움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 상당히 이제 그런 욕망을 갖고 있고, 그런 것들을 예술작품으로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에 대해 많이 고민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어...그 작가들이...그...특히 그 행위예술 같은 거는 던지는 이슈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어떤 제목이라던가, 화두라던가 이런 것들이 어...70년대에 보실 때 뭐 선생님 뿐만 아니라 어... 그 동료들이나 선배작가들이 던지는 그 이슈들이 어느 쪽에 이제 주로 이렇게 관심들을 갖고 계셨는지...
윤진섭: 그때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현실과 발언이 창립되는 것이 79년인가 그렇거든요. 그런데 제가 겪은 경험에 의하면 70년대 중, 후반 까지만 해도, 정치 참여라던가 그런 거는 별로 없었어요. 지금도 생각해 보니까, 성능경 선생님이 신문지 오리는 그런 작업이 있거든요, 이벤트가. 그거 보니까, 지금 보니까 의식이 굉장히 저항적이고, 사회적 이슈를 다룬 거 더라고요. 근데 우리는 그거를 개념 미술로 본거예요.
그러니까 개념적으로 얘기해 가지고 그거를 논리적으로 풀려고 했지, 그런 게 없었다고, 그러니까 뭐 이건용 선생님은 뭐 개인적으로 얘기할 때 남산에도 끌려가가지고 '이리오너라' 라는 퍼포먼스도 했다고 그런 일화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데, 또 이건용 선생님 재밌는게 이건용 선생님 작업실 그 밑에 그 피카소 양화점이예요. (수사관이 묻기를) 근데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린 사람이다 이거야 그래서 저항적인 사람이다 해가지고 왜 피카소라는 간판을 썼냐고 했다는 거예요.
김노암:그건 누구나 다 아는거니까
윤진섭: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 웃지 못할 얘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희한하게도 화제의 내용은 전부 다 개념 미술 쪽이거나 뭐 이 서양의 이벤트거나 뭐 이런 걸 얘기를 했죠, 그러니까 우리는 제가 이제 여러 번 이런 얘기를 썼는데, 노장사상, 그때 장석원 같은 그런 작가는 노장사상에 접근을 했고, 김용민 선생님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일상성의 문제를 다루니까...
그 다음에 저 그.. 이건용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언어학 그 다음에 장자, 노장 사상 그 다음에 논리학, 뭐 이런거, 그래서 이제 선의 논리 뭐 이런 것이 나오는 거거든요. 성능경 선생님 같은 경우는 소셜, 사회적인 시각에서 이제 신문 읽고 오리기 같은 이벤트를 이제 한거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미 건조한 그런 그 이야기들이, 담론들이 굉장히 오갔던 것으로 기억을 하고, 또 굉장히 추상적인 얘기들을 사실 많이 했어요. 근데
김노암: 관념적인
윤진섭: 그 관념적인 얘기를 많이 했죠, 그러니까 그 대화 내용을 옆에서 듣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냐, 그래서 학교에서도 이제 얘기를 하면... 나중에 이제 선배가 하는 얘긴데, 뭐 돌을 몇개 갖다 놓더니 어... 장경호라는 친구하고 궁리를 하면서 얘기를 하고...허... 되는데? 작품이 안 되는데? 뭐 이랬다는 대화를 하면서... 자기네들은 구상을 그리니까 그래서 이제 그런 것이 기억이 난다 이제 그러는데...
어... 참 재밌는 삶을 산 거 같아요. 그러니까 실기실에서 그림을 그린 거는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이제 페인팅을 좀 할려고 이제 그림을 그렸죠, 그랬더니 이제 자꾸 하품이 나오는 거예요. 지루하고, 하품이 나오고, 도저히 나 이거 할 수가 없다. 그 시간에 참고 열람실이 개가식이니까 4층, 그 문헌관 빌딩 있죠, 거기 가가지고, 개가식이니까 무한정 책을 꺼내놓고 보는 거예요. 그래가지고선, 그때 아마 제대로 좀 공부다운 공부를 했던 거 같아요. 그게 기반이 됐고 나중에.
김노암: 어... 20대 작가활동을 하실 때, 어...작가로써 그 주로 관심을 가지셨고, 어... 주 테마로 삼았던 것이 어떤 것이 있었나요?
윤진섭: 저는 어떻게 보면은 아까 이제 그 언어에 관심이 있었다 그랬거든요. 그 언어에 대한 관심은 어... 제가 어... 개념 미술 쪽에 굉장히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까, 이 말에 굉장히 그 뭐랄까, 어떤 랭귀지 게임 같은 거, 언어 게임 같은 거, 이런거를 이게 접근이 되더라고요. 어느날 하루는 이건용 선생님 화실에 갔는데, 어 변형생성 문법이라고 하는 그 번역서가, 노암 촘스키의 책입니다. 노암 촘스키 변형생성 문법에 관한 이론서가 번역이 돼서 있었어요. 그래서 그거를 빌려다가 이제 아트 인 아메리카 최신호하고 바꿨어요 그거를. 그래가지고 지금도 내가 그거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또 외국어 대학교의 언어와 언어학 연구소에서 언어와 언어학이라는 그...무크지가 나왔습니다. 그거를 제가 세 권을 구해서 샀습니다. 지금도 그 보관을 하고 있는데, 기타 뭐 이제 당시 문학과 지성사에서, 에...언어학에 관련된 책이 나왔고, 번역서 였는데, 그런 것이 나와서 이제 언어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게 됐죠.
그래서 이제 아까 얘기했던,그...어... 77년도 ST 정기전 오프닝 날, '서로가 사랑하는 우리들'이라는 퍼포먼스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이제 그 바닥에 분필로 어...뭐라고 문구를 이제 제가 쓰는 거예요. 철수네 논에는... 철수네...는 영희네 보다 부자입니다. 뭐 이런 거를 씁니다. 그거는 이제 내 나름대로의 아이디어에서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판화로도 그런 일련의 그 작품들을, 언어와 관련된 작품을 제작했고, 여기에 있는 신촌을 지나가는 여자의 구두색도 원래는 77년도에 이건용 선생님과 같이 했던 서로가 아니, 저 서울 화랑에서 했던 그 세개 퍼포먼스 중에 하납니다.
그때 당시에 나는 이제 그...노란 서류봉투를 하나 들고 나와서 거기에서 물건들을 꺼내는데 그 물건들은 이제 노란 국화꽃, 그 다음에 자갈, 흰 자갈, 노란 고무줄, 그 다음에 노란 색지 그래서 그거를 종이를, 색지를 찢고, 흰 자갈에 노란 크레용을 칠하고 그걸 다시 노란 고무, 고무줄로 감고, 어.. 그 다음에 노란 국화 꽃잎을 일일이 다 따고, 그 다음에 그거를 다시 노란 서류 봉투에 담습니다. 그리고 겉에 다가 매직으로 '신촌을 지나가는 여자의 구두색'이라고 썼다고, 이게 뭐냐, 이거를 노란색을 노란색이라고 할 때 이건 이미 노란색이 아닌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노란색을, 노란색이라고 부르면 노란색이 아니다 이게, 불교세계에 있는 불립문자하고 비슷한 얘기예요, 그렇지만 지금 가상적으로 신촌을 지나가는 어떤 여자가 신은...구두색 하고 같이 붙일 때에 이거는 그 색인 것이죠. 그러니까 언어학에서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만 뭐, 하여튼, 뭐 고무를 고무라고 하면 고무가 아니듯이, 불교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그걸 착안을 한 거예요. 근데, 그 화두가 끈질기게 따라 오는거야, 그러니까 언어에 대한 언어에 대한 문제, 그 다음에 80년대에는 제가 퍼포먼스 활동을 미학과 다니면서 재개 하거든요. 그게 86년도부터 재개 하는데 그때 이건용 선생님이 조직을 한 아르꼬스모 미술관이라고 남영동에 있었어요.
거기서 이제 86 설치 행위 미술제, 그거를 해서 이제 전국규모로 많은 작가들이 그때 좋은 작품을 작품을 보여줘서, 이게 아주 히트를 친 전신데, 거기서 제가 다시 이제 작품을 발표하고, 대학에서는 이제 미학 공부를 하면서 퍼포먼스를 이제 하게 되는거죠. 그러면서 일련의 퍼포먼스를 많이 하게 되는데, 거대한 눈 같은 것은 굉장히 스펙타클하지만 또 그렇게 굉장히 저항적인 거예요. 거기에 보면 생닭을 안고서 이거를 톱으로 켜는 그런 바이올린 처럼 그런 장면인데, 그건 뭐냐면 그때 당시 김영삼 그 전에 김영삼 그...당수가 뭐라 했냐하면...'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상당히 검은 안경을 쓰고 빅브라더 처럼 분장을 하고 그렇게 한, 참여적인 어떤 성격이 많이 있었죠.
김노암: 전두환 정부 때 가장 이제...
윤진섭: 그렇죠, 예, 70년대가 그렇게 억압적이었으니까, 우리는 장발을 하고 그때 대학생 때, 바바리를 입고, 성능경,이건용 우리 셋이 모이면, 그렇게 파이프 담배를 폈어요. 내가 수염을 기르고 그러니까, 늙수그레하게 하고 다니고 일부러, 젋을 때지만, 파이프 담배를 선배들이랑 같이 피고, 어떤 것이 좋다는 둥 얘기도 해주고, 그때는 엄혹한 시절이니까 그야말로, 그 시골에서 방학 때 같은 때 머리 기르고 올라오면, 거기 저... 어디야 그 판교 있는데, 반포 있는데, 거기 고속터미널 들어가기 전에 거기 검문소가 있어요. 검문소가 있어 가지고 경찰하고 헌병이 같이 올라와, 그러면 두근두근 하는 거야. 왜냐하면 잡혀 내려가서 잘리고 그러니까, 그때는 여자들 뭐 이렇게 미니 스커트도 잴 때 거든요. 경범죄에, 그래서...
김노암: 70년대에
윤진섭: 그렇죠. 그렇게 해가지고 그 때 스트리킹이라는 게 나온다고. 사회적 현상에. 뭐냐하면 오밤중에 어디서 옷을 벗고서 갑자기 달리는 거야 거리를. 그래서 스트...스트... 스트리킹이라고 해요. 그때 당시에 사회 문제가 됐었는데, 그런 것이 나오고, 아주 그 굉장히 살벌했던 그런 시절이라고 볼 수 있죠.
김노암: 어...90년대 그러니까 88 올림픽 이후에, 약 4,5년간 우리 미술계는 소위 그 비평가들이 미술의 그 어떤 흐름을 주도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설치 미술도 단기간 활성화 됐었고요. 어...어떤 계기로 작가활동 이후에 평론가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시게 됐는지 궁금하고요. 어... 그 와중에 90년대에 우리나라 미술계에 현황이 어땠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윤진섭: 그게 이제 87년도에 이제 우리 나라가 6.29 선언이 나고 그 다음에 이제 그 다음에 노태우 정권이 출범을 하게 되는 거죠. 비로소 이제 시민들이 일어나서 쟁취하게 된 자유고, 권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무렵에 이제 우리 화단에서는 에...뭐라고 할까...이론적으로는 무슨 포스트 모더니즘 얘기도 나오고, 뭐 그러할 때로 기억이 이제 나는거예요. 또 이제 보게되면 퍼포먼스도 더 활발해지게 됩니다. 퍼포먼스라는게 가령 이제 이벤트만 해도 70년대에 이것이 지속이 되다가 왜 80년대 전반기에 소강상태로 가냐하면은 그 주도적인 운동을 했던 이건용 선생님이 목원대 강사가 돼가지고 대전으로 가세요. 그러면서 서울에서 이제 공백기가 있고, 작가들이 이제 군대...
김노암: 그게 몇년도죠?
윤진섭: 그때...가 이제 80년대 초반 상황이죠. 81년인가 뭐 그 무렵에 그래서 86년에 86 설치 미술제가 다시 이제 부흥하는데 큰 계기가 됐던거죠. 저도 이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미학과를 88년도에 졸업하게 되는데, 그때 이제 한국행위예술협회를 결성을 하게 되고, 거기에 초대 회장을 맡고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 중단을 하게 됩니다만은 어쨌든 90년대에 제가 동아일보 신촌문예에 로즈셀라비여 왜 재채기를 하는가 이런 제목으로 하는데 그거는 알다시피 그 마르셀 뒤샹의 작품 제목을 패러디 한거 거든요. 그것도 일종의 말하자면 인용이라던가 뭐를 해서 이거 포스트 모던 적인 상황으로 풀어 간 글인데 그때는 에... 이 동구권이 이제 몰락을 초반에 하게 되죠? 90...90 몇년이죠?
김노암: 89년
윤진섭: 89년인가요? 아...그때 이제 그... 몰락을 해서,,,그 다음에 이... 소위 80년대에 그...어...초반 이후에 결집됐던 현실과 발언 중심으로 또 그 뒤에 뭐 두렁이라던지 광자협이라던지 이런 민중계열 쪽의 작가들이 활동이 아주 치열했었잖아요. 근데 그러면서도 약간 주춤했었던 그런, 어... 그런 양상을 이제 보이게 되는 거죠 . 그 다음에 이제 90년대 초반에 제가 이렇게 생각나는 걸 보면, 생각나는 것이 뭐냐면 95년 중반에, 95년에 광주 비엔날레가 첫 회가 열리고 만들어 진단 말이예요. 그래서 이거는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보면은 굉장히 재밌는 것이, 60년대, 70년대, 80년대 까지도 작가들 위주의 기획입니다. 작가들이 그룹을 만들고 기획을 하죠,전시 기획을 하고, 그때는 직업적인 큐레이터가 없었어요.
그 다음에 평론가가 가끔 기회가 오면 한다던가, 왜냐하면 그때만 해도 70년대 강력한 미협 중심에 그런 행정이고 미협 중심의 어떤 세력이고 운동이었기 때문에 그런 서울현대미술제라던지 특히 이제 박서보 선생님 이쪽 중심의 그 뭐 이사장을 맡고, 그 전에는 이제 국제 담당 부이사장을 맡고 이러면서 막 과감하게 이제 주도를 해 나가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볼때는, 이제 작가들 중심이었고, 이제 80년대 중, 후반에는 메타폭스 라던지 오상길씨 이런 사람들이 또 물의 신세대전이라던가 관훈미술관 중심으로 대규모의 기획전을 열거든요. 그러한 상황이었어요. 그러다가 90년대 들어오면서 홍대 예술학과가 생기고 배출이 되기 시작하지요
김노암: 87년도에 생겼습니다.
윤진섭: 87년도에 생겼죠. 그래가지고 91년도에 이제 첫 졸업생이 나오고 그러면서 이제 사회에 이제 퍼져 나가게 되는데, 그 다음에 뭐 이제 이대 미술사학과라던지, 서울대 미학과라던지 또는 미술사학과라던지 이런데서 고고 미술 사학관가 이런데서 충원이 되잖아요. 그런 시스템으로 이렇게 가다 보니까 이제, 광주 비엔날레만 하더라도 평론가 중심의 전시 기획이었는데, 이제 그런 인력들이 자꾸 들어 오면서 90년대 후반, 2000년대 들어서는 기획자 중심의 기획이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이... 평론의 그런 그 융성이 결국은 뭐 85년도 그 무렵에 가면은 큐레이터 중심으로 바뀌게 된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파워가...
김노암: 95년
윤진섭: 어? 95년에 되었다가 또 이렇게 교차하다가, 비평이... 아까도 얘기했지만 강세를 보이다가 약세를 보이고 그래서 이 큐레이팅한테 밀리기 시작한 것이 2005년 그 무렵에, 그래서 제가 평론가하고, 한국미술 평론가협회 회장할 때 동북아 비평 포럼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첫회, 2005년도 포스코 미술관 강당에서 했던 주제가 바로 뭐냐하면은 '비평과 전시 기획 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관계를 따져 볼려고 했는데 2007년도에 보니까 상파울로 비엔날레도 그 문제를 어... 상파울로의 아이카 총회에서도 국제 미술가 평론가 총회에서도 그걸 다루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문제가 지금 굉장히 첨예한, 우리 큐레이터 입장에서, 어... 문제가 지금 되고 있다. 그래서 저의 삶은 뭐 그런 질문은 나중에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이 크리틱 그 다음에 큐레이터 그 다음에 아티스트, 그레서 요거를 크리큐라티스트라고 조어를 만들었는데, 사실은 작년에 슬로바키아에 국제 미술 평론가 협회 총회를 가니까 그 때 영 어워드, 아이카 영 어워드라는게 있어요. 비평가에게 주는 상이 있는데, 그 상을 받은 평론가가 자기 프리젠테이션을 하는데 보니까 작가야 거의. 그래서 용어를 큐라티스트라는 용어를 쓰더라고요.
김노암: 그 실제로 그, 작년인가요? 작년에 그 베를린 그 비엔날레 감독이 폴란드 출신 작가예요.
윤진섭: 그렇습니까? 그러니까요.
김노암: 그 작가가 예술감독 한 걸로 알고 있고요, 제가 선생님 얘기 들으면서 제가 저 부가적으로 좀 접근을 하자면, 그... 아까 그 협회, 한국 미협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사실 이제 그 88올림픽 이전 까지만 해도 해외 여행 가기가 어려웠잖아요.
윤진섭: 그렇죠.
김노암: 예술가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아주 특별한 뭐... 그...이 집안이 아니고서는 국가의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미술가들이 해외 무슨 비엔날레를 나간다던가 뭐 해외 전시를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 미협의 허락하에...
윤진섭: 승인을 받아야 했죠. 그래야 인정을 받죠.
김노암: 그렇죠. 그러니까 미협이 셀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어... 그런 80년대까지 그랬다면은, 90년대 들어서 비로서 사실은 작가 개인이 됐든, 기획자 개인이 됐든, 평론가 개인이 됐든 개인의 활동이 어... 어느 정도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가 뭐 민주화 되고 성숙되는 것과 같이 간다는 거고요. 그 다음에 이제 95년도 광주 비엔날레가 있고 그 2년 전에 93년도에 그 백남준 선생님 통해가지고, 그 국립현대 미술관 지금 저기죠? 과천 거기서? 휘트니 비엔날레를 가지고 오잖아요.
윤진섭: 그렇죠
김노암: 그게 사실은 일반 대중들한테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은 우리나라 미술 전문가들에게 있어서는 93년도 휘트니 비엔날레가 상당히 이제 인상적이었고, 사실 그 시기 전후해서 95년 그 2년 후죠? 광주 비엔날레를 여는 것이 아무래도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가 있었겠죠.
윤진섭: 그렇죠.
김노암: 어... 상당히 그 좋겠구나라는 어떤 사회적 동의를 끌어 낸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 선생님 말씀대로 95년도에 그 97년도 광주 비엔날레를 보면, 실제로 광주 비엔날레를 주도 한 거는 평론가들하고 행정가들이죠. 행정가들이고, 소위 말하는 큐레이터라던가 기획자들은 없죠. 당시에 참여한 해외 큐레이터들은 정말 직업적 큐레이터들, 당시 가장 잘 나가던 해외 큐레이터들이 초대가 된거죠, 어... 당시로 치자면 우리나라... 지금 경제 규모로 봤을 때, 20 몇년 전인데 벌써, 예산 200억 내에서 썼다고 그랬으니까 지금 한... 그 저 뭐죠? 지금 돈으로 따지면 한 천억 쓴거죠?
윤진섭: 어 그거는 굉장한거죠. 그거는 벌써...한 20년 전인데
김노암: 해외에서 깜짝 놀란다잖아요. 어떻게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에서 현대 미술 문화가 있기는 했는지, 이제 그런 면에서 어마 어마한 돈을 쓰고, 국제 비엔날레를 하는데, 당시 일본 조차도 공영 비엔날레가 흐지부지 없어지는 상황이었고 그러니까, 중국은 당연히 개방이 안돼서 현대 미술 자체가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광주 비엔날레를 만든다, 그거는 세계적인 정말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것이 95년, 97년 광주 비엔날레가 뭐 사실 여러가지 단점을 갖고 있지만, 우리나라 미술, 현대 미술 발전에 굉장히 그 기폭제가 됐다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얘기하신 95년 전, 후의 상황들이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90년대 그러면 선생님이 7,80년대에 이야기는 이제 해주셨는데, 7,80년대가 말하자면 작가로써 수습의 시대였고, 평론가로써 수습의 시대 였다면, 80년대 말, 30대 중반이죠, 그리고 90년대에 10년간 2000년 초반까지는 30대 후반에서 40대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시지만은, 그 시기를 선생님은 광주 비엔날레, 서울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 부산 비엔날레, 우리나라 현대 미술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활동 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90년대 그 시기에, 어... 물론 그 시기는 작가로서 활동은 뭐 상대적으로...
윤진섭: 그때는 뭐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김노암: 그렇죠. 어... 그 시기를 좀 어... 선생님이 10년 동안 경험하시면서 생각하셨던 아... 지금 이 작품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주셨는지, 평론가나 기획자로 활동할 때 여러가지 어떤 계기들이 지금 어...작년, 또 제작년, 최근에 이제 작가 활동...창작활동을 좀 왕성하게 늘리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어떤 그 계기들을 그 시기에 이제 생각해 볼 수 있는지...
윤진섭: 그래서 이제 90년대는 제가 연령적으로 보면은 광주 비엔날레 때가 이제 마흔 한살, 또 미디어 시티에 감독 할 때는 2004년도니까 뭐 오십살 뭐 그 정도 됐었죠. 아...그래서 이제 일반적으로는 평론을 하면서 전시기획도 상당히 많이 했었던 시기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그...현대 백화점 현대 아트 갤러리 관장, 그때 당시는 현대 미술관이라는 용어를 쓰다가 이제 미술관, 박물관 법에 의해서 바뀌게 되는데 92년도에 제가 입사를 합니다. 그때가 이제 서른 여덟 살인데 그래서 무역센터 그 다음에 압구정점을 다 맡거든요. 그 양쪽 미술관, 또 부산점 까지 있고, 부산은 뭐 직원이 관리를 했지만 저는 이 두 군데서 전시기획을 하는데, 본격적으로 전시기획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된 거예요. 그래서...
김노암: 참고로, 90년대에 사실은 어...저 95년 전후로 광주 비엔날레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사립 미술관들이 상당히 생기게 됐죠. 98년 IMF때 상당히 또 많이 엎어졌지만, 그 시기에 아마 어... 기획자로써 활동할 수 있는 어떤 플랫폼, 그 현대 백화점...
윤진섭: (미술관 등록법에 의해 처음에는) 현대 미술관, (나중에는) 현대 갤러리(로 명칭이 바뀌게 되죠)
김노암: 현대 미술관이
윤진섭: 큰 역할을 했죠.
김노암: 중요한 어떤 물적 자원을 갖고 계셨던 거...
윤진섭: 그렇죠. 왜냐하면, 왜냐하면 이제, 아무래도 재벌이 운영하는 갤러리다 보니까, 초기에는 그런 기획료가 주어졌었어요. 기획적 여건이, 그래서 제가 이제 두 가지, 가자 마자 기획을 하는데, 시리즈로, 여기 압구정점에서는 갤러리 공간이 아담하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이렇게 주제를 잡다가 보니까 구상미술의 재조명 시리즈, 그니까 너무 추상이라던지, 설치라던지 이런것이 너무 저기를 해가지고, 성행해서, 구상의 진정한 의미를 한번 물어 봐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자연, 인물화, 그 다음에 아... 풍자화 그 다음에 실내 전경, 그 다음에 또 뭐...이 다섯가지 카테고리를 정해가지고 그거를 아주 책자 형태로 만들어내는, 이론가들이 글을 실어 가지고 전시 내용을... 그래서 한국 미술, 현대 미술에 그런 다섯개의 카테코리에 드는 구상회화를 재조명 했던 그런, 초현실주의가 있네요. 꿈의 해석이라고 그래서, 그 다섯가지 카테고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 저, 무역센터점은 상대적으로 굉장히 천장도 높고 전시공간이 좋거든요, 그래서 실험적인 것이 거기는 어울립니다.
그래서 아... 창작과 인용 이라는 그런 전시를 했는데 그것은 패러디라던지, 명화의 원화를 패러디 하는 그런 작품들, 인용하는 작품들, 이거를 포스트 모던 문맥에서 살펴보는 전신데,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라고 해서 계속 지속적으로 하려고 했지만, 거기는 예산 문제라던가 그 때문에 하나로써 끝났는데, 그것이 지금 와서 보니까 그 인용의 문제를 굉장히 일찍 다룬 그런 선례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네오룩neolook.com)에 가면 그것이 구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쪽에.
김노암: 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밀레니엄 전후로 해서 우리나라 미술계에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어 그시기는 어... 예술가들의 활동 이상으로 예술 정책, 그 국가적 개입에 의한 그런 대형 행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기획자로써 또는 평론가로써 어떤 문제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윤진섭: 밀레니엄 하니까 생각나는게, 제가 밀레니엄 난장쇼를 기획을 했거든요. 그게 이제 1999년 아, 12월 31일 오후 10시부터 이제 밀레니엄 시기로 넘어가는거예요. 그래서 2000년 1월 1일 새벽 4시까지 홍대 앞에 있는 아주 실험적인 공간이죠, 씨어터 제로라고 하는,그런 무대에서 행사가 벌어졌는데, 어... 전국에 있는 행위 예술가들을 30명 정도를 초청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기획비가 0원이다. 없이 시작을 한거예요 제가. 그냥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든 디자인도 내가 하고, 공문도 만들어서 보내고, 뭐하고, 작가들, 진짜 이승택 선생님부터 성능경 선생님 뭐 이런 분들 다 전국에서 한 30명 정도가 모였는데, 그건 뭐냐면 아 일종의 다다(Dada)식 게릴라 쇼였습니다.
그래서 에...관제 그때 밀레니엄 행사가 뭐 세계 곳곳에서 열렸죠, 파리 상젤리제 거리라던지 뭐 영국 그 런던에서는 국회의사당 템즈강 주변에 빅벤 밑에서 그런 행사가 열렸는데, 우리나라도 역시 광화문에서 14억원의 예산을 들여가지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거대한 말이야 종을, 뭐...시계를 만들어서 댕댕하고 말이야 울리는... 그 어떻게 보면 너무 그 천편일률적인 그런 행사 아닙니까. 그러고 뭐 가수들 와서 노래 부르고 축제 분위기, 그런거 보다도, 이 밀레니엄 행사라는 거는 하나의 난장 개념으로 보자.
그러니까 기획비가 없이 한거예요 일부러. 저항적으로 또 어디서 돈 나올 데도 없고, 그러니까 진짜 자발적으로 작가들이 전국에서 모였죠. 가령 예를 들면 김석환이라는 작가는 이... 수원에서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그 다음에 머리를 길렀잖아요. 그러고 관에다가 그 소독 기계를 집어 넣어가지고 붕붕 거리면서, 여름에 왜 저 방제용 소독기 있잖아요. 그 연기 하얗게 나오는 거, 그거를 매고서는 연기를 뿝으면서 수원성을 한바퀴 돌고 서울로 타이탄을 타고 온 거예요, 행사장으로. 그래서 씨어터 제로 앞에서 그 관을 불사르고 이런 저항을, 굉장히 강렬하게 예술가들이 모여가지고 이제 하게 된거죠.
그거는... 보면은 어...저는 이제까지 삶의 기조가 아까 전위 예기를 했지만, 그 전위적인 정신이 이 사회에 소금이 된다는 거예요. 그 예술의 그 중요한 기능이자 썩지 못하게 하는 기능, 이 사회가 썩지 못하게 하는 방부적인 기능을 예술이 해야하는데 예술 중에서도 뭐 전위적인 작업이, 실험적인 작업이 그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제 기조거든요. 그러니까 제 활동은 그거하고 관련 지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밀레니엄쇼를 기획하고, 또 기획자로서는 이제 그런거고. 아...또 2000년대 들어와서 아까 말씀하셨듯이 2002년 월드컵 행사가 있죠. 그 월드컵 행사에 깃발 미술제를 제가 예술 감독을 맡아서 합니다. 21세기 청년작가 협회라는데가 있는데 김해곤씨 그 당시 회장을 맡고,진짜 의욕적으로 일들을 했어요. 그래서 이게...
김노암: 청년작가 300인의 모임...
윤진섭: 그렇죠. 월드컵 공식 문화 행사가, 한일 월드컵 공식 문화 행사 깃발 예술제. 그래서 상암동 아...월드컵 공원에서 그야말로 전세계 34, 2개국인가요? 그 결승에 오른 국가들, 작가들을 전부 초청을 해가지고 500여명이 참여를 했던 대규모 깃발 미술 축제였는데, 그때 우리가 그 일을 하느라고 엄청난 그 기간 동안에 진짜 헌신에, 헌신적인 그 어떤 봉사를, 회원들이 일을 맡아 가지고 말이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김노암: 그... 어...2000년대 중반에 사실은 뭐...지나가고, 그 얘기는 사실은 뭐 그렇게 뭐 지금 뭐 주제는 아니니까, 제가 그 어...90년대 중반부터 이제.... 뭐 처음 뵙기는 80년대 후반에 처음 뵀지만, 에... 또 지금 그래서 뵙기 시작한거는 90년대 중후반이고, 그 다음에 최근 들어서 이제 윤선생님이 작가활동에 대한 윤선생님의 기존의 작가활동에 대한 관심을 좀 갖고 그 다음에 이러한 프로젝트가 진행이 됐는데...
물론 저에게 이런 작품들에 대해서 설명들을 해주셨는데 어...지금 그 이 전시 제목도 그렇고 그 다음에 전시를 구성하고 있는 작품의 창작 방식도 저는 굉장히 독특하다, 그 다음에 또 전시관람 상황에도 작가로써 이렇게, 대화하는 방식이랄까요? 이런 것도 좀 저는 어...굉장히 윤진섭 선생님 만의 방식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좀....
윤진섭: 그래서 이제 제가 평론활동하고 전시기획을 하면서... 2007년도에 이제 김백기씨가 한국 실험 예술제에서 초대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때에 마침 또 오광수 선생님이 고회 기념 논총 증정 파티가 조선 호텔에서 있었는데 인사동에서 이제 그 행사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 갔는데, 인사동으로 갔는데 실험 예술제 하고 시간이 겹친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핸드폰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김백기 선생과 하면 관객들 앞에서 대신 받아서 그 말을 해주고, 추임새를 성능경 선생님이 넣어 가지고 아주 축제 분위기로 가는 그런 퍼포먼스를 했거든요.
그게 이제 다시 퍼포먼스가 공식적으로는 다시 시작이 됐죠. 되고서, 그 다음에 이제 2009년에 경기 도자 비엔날레에서 에...세라믹 패선이라는 국제 퍼포먼스 페스티발을 제가 이제 큐레이팅 하면서, 예술감독으로써 큐레이팅 하면서 다시 이제 왕치라고 하는 그런 예명으로 퍼포먼스를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 가면을 쓰고, 그 다음에 장대를 끌고 '우주의 소리'라는 그런 퍼포먼스를 하는데, 그 뒤부터 이제 왕치라고 이제 시작을 했죠. 근데 중요한게 이제 2009년부터 제가 페이스북을 시작하거든요. 페이스북에서 제가 여러가지 예명을 쓰기 시작해요.
뭐 빈들빈들윤이라든지 뭐 소소라든지, 파자마 준이라든지, 그림 그릴 때 또 어떤 때는 파자마 준이라는 예명을 쓰고, 그래서 이거를 잘 봐야 그것이 이제 나중에 제꺼인줄 아는데, 왜 그러냐하면은 저는 이 서양에서는 없는 우리 이 동양 또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적 스타일이라고 할까, 추사 김정희가, 어...선생이 334개의 명호를 사용했답니다, 평생에. 근데 어...서양 레오나르도 다빈치, 아무리 천재라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하나 밖에 없어요. 하나라도 예명이 더 있는 사람이 마르셸 뒤샹이거든요. 로즈셀라비라고 하는 예명을 썼죠. 그래서 저는 이 동양의 이 옛날 선비들이 썼던 이...호를 쓴다고 하는거, 동양에는 원래 열아홉살까지만 이름을 쓰고 이후에는 얼마든지 자나 호를 쓸 수가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 붙여 줄 수도 있고, 본인이 지을 수도 있고, 그것이 굉장히 저는 에...뭐라고 할까 그 형식에 있어서 전위적이라고 본거예요. 그것이 전통적이지만 굉장히 전위적인 요소가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나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이게 잘 안 나온다는 거죠. 까도 또 다시 뭐가 있고, 그것을 추적하는 거... 추구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예명을 쓴다는 거는. 그래서 이제 그 예명을 가지고 페이스북 활동을 하고 또 그거를 에...어떤 체험론을 통해서 논문을 두 편을 제가 또 썼죠. 이제 페이스북 자체를 하나의 퍼포먼스, 퍼포먼스를 하는 장으로다가 그거는 뭐냐면...
윤진섭: 그러니까 지금 소셜 네트워킹으로서는 가장 최전선이잖아요. 그걸 나는 이용한거예요. 실제로 거기에는 뭐 릴레이 퍼포먼스라던지, 기타 뭐 말, 어...어떤 글을 가지고 그...친구들이 이어서 완성 시켜 나가는 그런 글짓기 퍼포먼스라던지 뭐 이런 것들을 제가 많이 시도를 합니다. 그 다음에 뭐 커뮤니케이션, 네이쳐 이런 메세지를 보내는 그런 걸 아마 보셨을 거예요. 그래서 그것도 이제 하나의 매체로 이제 삼는 거고...그 다음에 이 전시는 전부 이게 재활용 된 거예요.
저 집에 그냥 들어온 거, 길에서 주운 것들. 여기는 물감 하나 조차도 미협지부장 회의 가면은 거기서 알파화학에서 해마다 하나씩 줬던 거 몇 개 모았던 걸 가지고 그걸로 그림을 그린다던지, 그래서 철저하게 이제 재활용으로 하는 그런 것들인데, 저는 이게 편해요. 왜냐하면, 저는 제가 프로 작가라고 생각도 안하고 그저 이렇게 봐서 있는 거 하나의 여기로서 이거 옛날에 선비들이 말이죠, 사군자를 치고 시를 짓듯이 저는 그냥 있는 걸 가지고 활용해서 나의 어떤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나도 여기 스토리들이 다 있어요. 옛날에 뭐 사촌 누나와 얽힌 어떤 추억이라던지, 그 분의 어떤 인생이라던지, 또...뭐 우연히 저렇게 주운 저런...에... 뭐라고 할까요. 천...천의 두루마리 속에...
김노암: 예, 오브제죠.
윤진섭: 아, 오브제죠. 그럼요, 저런걸 주워다가 , 우연히 주워다가 운칠기삼이다, 뭐 인생의 다이나마이튼데 이 고스톱 잘 치는 분이 그런 얘기를 해요. 고스톱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운이 70%고, 기술이 30%다 이거야, 야...그 말이 딱 오는 거야. 맞아 인생은 어떻게 보면 운이 70%야. 실력은... 있는 것은 좋지만, 잘 발휘되지 못해서 사장된 사람들이 많아요. 인생이라는 거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다이나 마이트를 우리는 삶 속에 항상 내장하고 가는 것이다. 그런 것이죠.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또 제목을 보면은 요번에는 주제는 자유 아, 저,저,저,저,예술과 자본이죠, 주제는 예술과 자본. 그래서 저기 제주도 바닷가에서 주운 부표 두 개를 가지고 저거를...
김노암: 오프닝 퍼포먼스를 하셨죠?
윤진섭: 예 했죠. 그래서 하나는 거기다가 예술 폭탄, 하나는 자본 폭탄 그렇게 쓰고 도르레로 당기는 그런 퍼포먼스를 이렇게 했는데, 이거는 뭐냐면 시선의 개입이고, 그 다음에 내가 관련 지어졌던 전시의 그... 그 어떤 소품들, 작가들의 소품들을 가지고 있다가 또 이렇게 퍼포먼스 행사 때 또 이렇게 요번에 그 이름으로 나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뭐 썼듯이, 작가 노트에 썼듯이, 그냥 고정되어 있는 그러니까 성전에 모시다 시피 말이죠, 작품을 거기다 걸어놓고 예배 드리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아주 손도 못 대 게하고 아우라를 씌워가지고 말이지 숭배하는 그런 전시가 되어서는 안되고...
김노암: 제의가 됐죠.
윤진섭: 그렇죠 제의, 장례식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난 기존의 그런 전시들을 장례식장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살아 있어야 된다 이거는.
김노암: 이번 전시의 그... 선생님이 연출하신 그, 어...여러가지 다양한 이 작품 형식들 그 다음에 에... 그... 그 오픈 퍼포먼스 때 이야기 됐던 예술과 자본에 대한 문제들, 언어게임, 이러한 것들이 향후 작가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식으로 변화돼 나갈지 궁금합니다.
윤진섭: 어... 작가로써는 이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걸 어떤 형식으로 구현해 나가느냐, 그러니까 저는 에... 그 시장이나 백화점 같은데 이렇게 보면은 끊임없이 물건이 팔려 나가고 끊임없이 물건이 새로 들어 오고, 이 계속 순환이 되잖아요. 사람들도 왔다갔다 하고, 이건 살아 있는 거예요. 생동감 있단 말이예요. 노량진 수산시장 가보시란 말이예요. 얼마나 활기가 있습니까.
근데 전략적으로 미술관이라고 하는 그런 성소야 일종의. 그래가지고 거기에 아우라를 씌워 가지고 말이지 그것이 자본 시스템하고 이렇게 돼가지고, 편승해서 말이지 작품값을 올리고 또, 계속해서 작품값을 올리는 게임을 하고 말이죠. 그래서 치부를 하고 예술의 어떤 본연적인 것을 잃어 버리고, 회복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을 굉장히 안타깝게 보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위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고 모든 제도에 대한 부정, 시스템에 대한 부정, 그래서 전시는 죽은 전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요번에 썼듯이, 따귀를 때리고 그죠? 인공호흡을 하거나 따귀를 때려야 된다. 그래서 정신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는 거죠.
김노암: 사실 이제 그 고정된 스타일이, 작품의 스타일이 없으면 거래하기가 어렵거든요.
윤진섭: 그렇지, 그러니까 이름을, 이름을 자꾸 바꾸는 이유가. 왕치에서 지금 이름이 날 만 하니까 다시 한큐로 바꾸잖아요. 왜 그러냐. 이름값이라는 게 있잖아요. 시장 시스템에서 브랜딩이 되는거죠. 이름값이 형성이 되면은 작품값이 올라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를 방지하는 방법은 끊임 없이 신인이 되는거야, 새로운 이름으로, 그래서 저는 이름을 바꿉니다.
김노암: 그... 20대부터 관심을 가졌던 언어 게임, 아마 평론가 활동이나 기획가 활동을 통해서도 상당히 이제 그...어...또 고도로 정교하게 고민하셨던 거 같고 그것이 저는 뭐 작가로써 작가 이름을 어...이렇게 마치 게임하듯이 계속 변화시켜 나가는 것과 저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 끝으로 그 앞으로 그 선생님이 바라보는 우리나라 그 행위 미술, 퍼포먼스 예술, 물론 거기 개념 미술도 들어가겠죠. 이 상황에 대한 예측,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윤진섭: 그러니까 이제 제가 최근에 뭐 행위미술 이야기 또 퍼포먼스 이론과 현장 이런 퍼포먼스 관련 책들을 펴냈거든요. 그래서 그 속에서 이제 주장한 것이 그 퍼포먼스 작가들이... 이 뭔가를 잘못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이제 말하자면 퍼포먼스는 기괴한 짓이나 뭐 이런 행위가 아니고 그야말로 실험적...인 입장에서 예술의 영역을 넓혀가거나 또 개념을 변화 시키거나, 뭐 하여튼 전위적인 입장에 서가지고 선도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있는데 지금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굉장히 안타깝고, 이것은 이제 그래서 요번에 성능경 선생님하고, 이건용 선생님하고 같이 한큐가 3인전이 돼서 개막 퍼포먼스를 했잖아요.
이건 굉장히 버라이어티하고,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그때 그때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그런 아이디어를 구현해 나가면서 이게 상황국면을 바꿔 나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퍼포먼스라고 하는 것은, 페이스 북이 만든 국제 상상 대학이나 브로큰 샵 이런 얘기들은 다 스토리가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끌고 가느냐, 또 스토리를 어떻게 또 만들어 가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 같고, 그래서 저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또 전시 기획자 입장에서, 아티스트로서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서 예술의 어떤 개념이라던가 이런 것의 변혁에 도전하느냐, 변혁해 나가서 도전하느냐 그런 문제가 화두가 될 거 같다...
김노암: 조금더 도전 해라?
윤진섭: 그렇죠.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되는 거죠.
김노암: 예술은 항상 위기를 먹고 살지만, 어떻습니까? 행위 미술이...우리 미술계에서 위기죠 항상?
윤진섭: 그렇죠. 이제 많은 작가들이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만은, 좀 오해하거나 혼동된 부분이 있어서 그런 부분은 좀 아쉽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노암: 에... 오랫동안 그 얘기 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앞으로 그 윤선생님의 활동이 동료뿐만 아니라 후배 예술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앞으로도 건승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윤진섭: 감사합니다.
진행 : 김노암
카메라, 조명 및 음향 : 프랑수아 사이칼리
비디오 편집 : 프랑수아 사이칼리
자막 및 번역 : 김소영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