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dio walkthrough]
서용선: 네 어서 와요. 오래간만입니다.
서용선: 여기는 처음에 지은 스튜디오이고,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은 자화상, 전시회를 위해서 준비하다가 다른 전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 그 상태로다가 저기에 아마 내년이면 가을에 몇 점을 갤러리에 발표를 하고... 저쪽 작업실을 한번 가서 볼까요?
서용선: 이쪽 작업실은 원래 설계를 제대로 안하고 그냥 지었더니 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고, 그런데, 그런데 이게 유리를 많이 해 놓으니까 확실히 빛의 효과가 좋아서 아주 이렇게 밝은 빛을 볼 때는 그림의 빛을 세세하게 볼 때는 여기가 잘 나오고 더 좀 큰 작품을 하기에는 좀 좋은 것 같은데 계절에 따라서 이제 여름이나 겨울에는 좀 저까지 못쓰고 봄, 가을에 쓰기에 좋은 거 같아요. 그 저쪽 세 번째 작업실에 가서 한 번 볼까요?
서용선: 이게 가장 최근에 지은 작업실인데 처음에는 스토리지로다가 작품 보관 하는 데로 지었다가 중간에 약간 바꿨어요. 작업을 이 큰 벽이 있어서 작업을 여기서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 가지고 약간 절충이 된 거죠. 이게 설계 단계에서 조금 생각이 바뀌면은 그게 마지막까지 꽤 영향을 주더라고요.
이인범: 저는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이인범입니다. 오늘은 2014년 5월 9일 금요일입니다. 지금 인터뷰를 위해서 서용선 작가의 스튜디오가 있는 경기도 양평 문오리에 와 있습니다. 서용선 작가는 한국전쟁 중에 태어나서 초토화된 서울 변두리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서울 미대 회화과에서 미술 공부를 한 이후에 지금까지 약 40년 가까이 작가 활동을 왕성하게 해 오고 계십니다. 어... 그러면 지금부터 서영선 작가를 모시고 살아왔던 생애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작품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이인범: 반갑습니다. 먼저, 어디에서 태어나셨고 언제 태어나셨으며, 성장 환경은 어떠셨는지 말씀 하시는 것으로 오늘 대화를 시작하겠습니다.
서용선: 제가 어렸을 때 기억 나는 것은 아주 그 아마 한 다섯, 여섯 살 그 이전에 자세하게 기억이 잘 안 나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 이후에 청소년기를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서울에 그 변두리 지역에서... 거기는 뭐 농촌도 아니고 서울 중심도 아닌 아주 애매한 장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것 같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셔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서울에 올라오셔서 또 해방되기 전에 만주에서 결혼하셔서 어머니하고 같이 사시고 다시 서울로 와서... 지금 생각을 해보면 저희 부모님도 다 고향에서 이렇게 뿌리가 뽑혀서, 이렇게 이주하면서 사셨고, 그러한 것들이 제 어린 시절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제 기억으로는 저의...제가 자란 그 주변에 서울 변두리라는 것은 지금 생각을 해 보면은 어떤, 어떠한 전통이나 어떤 문화적 그 내용을 볼 수 없는, 어떤 안정된 시골의 농촌 지역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그런 그냥 이렇게 야산이 있는 들판 같은 데에서 자라서 지금 제가 작가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어린 시절에 어떤 시각적인 체험이라던가 문화적인 내용들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는 것도 특이한 생각이 듭니다. 아마 그게 제 어린 시절에 제 환경이 아니었나,
또 한가지 어... 나이가 들어 가면서 점점 그 어린 시절에 대해서 좀 정리를 하게 되는데 바로 그 때가 제가 전쟁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후에 한국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했던가 하는 거를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어...미군 부대가 의정부 쪽으로 이주해 가는 것을 멀리서 하염없이 보는 게 거의 뭐 현대 문화를 보는 그 대표적인 내용들이고 또 주변에 마을 동네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보면은 전후에 지방으로 또는 시골로 피난 갔던 많은 사람들이 다시 시골에서 생활할 수가 없어서 서울 주변으로다가 도시로다가 몰려 오는 과정이 50년대 제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후 그럴 때에 분위기가 아니었나.
그리고 거기에서 이루어진 많은 사람들의 그 새로운 터전을 갖기 위해서 무허가 집을 짓고 무허가 전기를 끌어 오고 생존을 위해서 동대문 시장에서 고무줄을 내다 팔고... 이러한 그 아주 그 생존에 몸부림치는 모습들, 그리고 수없이 추운 계절에 어... 변변치 못한 주옥 주택가 가옥들, 또는 옷차림들 속에서 약한 소녀들이나 또는 나이든 사람들이 겨울에 얼어서, 그 추위를 이기지 못해서 죽어 나가는 과정을 많이 본 내용이나 또는 당시에는 거기가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아주 굉장히 큰 공동묘지였습니다. 그 공동묘지가 철거해 나가는 과정 중에서 인간이 그 일년, 이년 썩다가 만 시체를 이렇게 옮겨 나가고 그걸 치우는 그런 노동을 하는 사람들 옆에서 보면서 죽음과 삶, 이런 거에 대해서 좀 제 판단은 좀 색다른 경험을 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인범: 한마디로 한국전쟁의 상흔, 그 상처 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로군요.
서용선: 네, 그것도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이제 나중에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특히 나이가 들어 가면서 그게 더 확실하게 그게 전후의 한국의 상황이었구나 하는 것을 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인범: 어, 6.25 전쟁 뒤에 참화 속에서 자라나셨군요. 어...교육 환경은 특별히 어떤 환경이었습니까? 특히 미술을 전공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서용선: 제가 어렸을 때에 그 당시에는 뭐 책도 없고 수업도 뭐 이렇게 3부제로 하기 때문에 문학책 같은 거를 특히 저희 부모님들이 다, 그분들의 부모님과 떨어진 상태에서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시대였기 때문에 주변에 책 같은 것들이 제가 별로 구해 볼 수가 없었는데, 친구 집에 가서, 제 기억으로 친구 집에 가서 가끔 책을 볼 기회가 있었고, 또 나중에는 이제 서울 주변에 조금 동네가 형성되어 가면서 지금은 이제 도봉구 미아동 쪽인데, 형성되면서 거기에서 주변 사람들의 헌 책을 빌려 보거나, 이런 기억들이 납니다.
특히 당시에는 그 일본어를 번역한 문학 전집 같은 것들이 있어서 그런 거를 한 권씩 빌려다 본 내용이 생각이 나고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예를 들어서 삼국지라던가 죄와 벌이라던가 그 밖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던 그런 번역된 그 개선문이라던가 뭐 토마스만의 소설 같은 것들이 번역된 내용들을 아주 흥미롭게 읽고... 국민학생인데 지금은 이제 초등학생이라고는 하지만 국민학생인데 신문소설을 굉장히 매일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신문 소설에 나와 있는 삽화들 뭐 수호지 같은 연재된 내용들, 지금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게 박종화씨의 소설 같은 내용들이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저한테 조금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인범: 교육 환경은 어떠셨습니까? 그...특히 미술을 전공하게 되는 그 인생 필력과 관련해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거나 체험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서용선: 저도 이제 그 문제를 여러 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데, 뭐 아주 구체적인 사실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미술 대학을 미술을, 내가 작가로서 하려고 생각을 했는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미술을 했는지 이런 게 조금 애매한 상황이기는 합니다만, 아주 구체적으로는 제가 대학을 여러 번 실패를 해서... 군대를 갔다 와서 당시 제 나이가 25살이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 군대를 제대하고 났을 때 갖게 된 생각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구체적으로 다가온 것이 25살이었는데 그때 다시 한번 대학을 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직접 사회로다가 어떤 생활, 집안을 이끌어 나갈 그런 그 당시에 저희 집안에서 남자가 하나였기 때문에, 저한테는 좀 더 그런 무게가 다가왔고, 가족을 나중에 부양해야 한다는 그런 짐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대를 해 가지고 어떤 친구 집에서 신문을 보던 중에 당시에 그 신문에 그 한국에 초기 화가들 이중섭이라던가 박수근이라던가 이런 분들을 조그맣게 박스 기사로다가 연재를 했는데, 그런 글을 조금 읽으면서 아, 미술이라는 것도 조금 해 볼만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가진 건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냐 하면은 우선 대학을 가기가 공부의 그 끈을 놓쳤기 때문에 군대 갔다가 와서 대학을 가기가 좀 힘들었고, 힘들다고 생각을 했고, 또 마지막으로다가 그래도 대학을 가야 사회에서 활동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데 아마 그 내용이 당시에 한국 사회에서 대학을 가야 된다고 하는 그 중압감이 강하지 않았나,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그냥 당연히 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기 보다도 사회의 흐름과 가족의 바램, 이런 것 속에 너무 쉽게 함몰된 건 아닌가 하는 이런 반성도 지금은 하게 되는데, 어쨌든 그 때 그러한 내용 때문에 어린 시절에 제가 미술 성적은 그냥 일반 사람들 보다 항상 그냥 자연스럽게 좋았기 때문에 그것이 좀 대학을 가는데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된 이런 몇 가지가 복합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이인범: 탈렌트가 있다고 하는 어떤 그 자각이 있었군요. 어렸을 때. 미술에 대해서...
서용선: 그런 탈렌트라는 게 지금 생각하면 참 좀 우스운 생각은 들어요. 어떤거냐 하면, 그 탈렌트라는 건 사실은 약간의 형태 감각 정도가 아닌가, 미술 본질에 대한 탈렌트라기 보다도... 그건 좀 제가 판단을 잘 못 하겠습니다만 어린 시절에 보통 다 어린애들 그렇듯이 만화 같은 거를 많이 그린다거나 그냥 미술 시간에는 형태 같은 게 잘 비슷하게 닮게 그리니까, 미술 선생님들이 성적을 항상 잘 줘서 그것은 따로 연습을 안 해도 되는 그런 게 아마 탈렌트라고 하면 탈렌트 일 것 같아요.
이인범: 생존이라고 하는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청소년기의 과제였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방법으로써 그림이라고 하는 것을 택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서용선: 굉장히 모순된 관계인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하여간 저는 그 당시에 한국에서 경제적인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뭐 신문에서 그 당시에 보니까 중동 같은 데를 가면은 그 경제적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 때문에 그런 중장비 같은 걸 배우려고 신문을 뒤적이다가 아까 그런 미술 기사를 봤기 때문에, 아주 극에서 극으로다가 이렇게...그리고 그 당시에는 제가 그런 주변에 그런 걸 제 앞날에 대해서 충고를 하거나 뭐 이렇게 설명을 해 줄 사람이 별로 없었고, 저희 부모님은 제 앞날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조언도 안하고 자유방임 같이, 네가 알아서 뭐든지 하라 이런 너무나 폭 넓은 자유를 준 것이 제 자신이 극과 극을 다른 하나는 아주 진짜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직업과, 하나는 그 전후에 죽어 간 비극적인 화가들을 보고 그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이 왔다 갔다 한 그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인범: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하게 된 과정은 어땠습니까? 특히 서울 대학교 미술 대학에 입학해서 미술 수업을 할 때에 이러저러한 경험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서용선: 그게 이제 처음에 미술 대학을... 대학을 갈 수... 미술 대학을 통해서 간다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막막했죠. 거기에 대한 정보가 당시에 사회에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고, 미술 대학을 간다는 것이 뭐를 해야 되는지 몰라서 친구를 통해서 어떤 동네 학원엘 가서 한두 달 배우고 그 때도 또 그 지방 경제가 어려우니까 좀 쉬었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여름 되면서 이제 충무로에 있는 학원에 갔습니다.
이인범: 주로 이제 석고 데상에...
서용선: 그때는 지금 제가 아주 가장 후회되고 또 하나는 내가 정말 그림을 그리면서도 내 자신에 대해서 예술가로서 회의하는 것 중에 하나가 어떻게 그림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이 자기가 표현하려고 하는 게 아무것도 없이 대학의 시험 과목에만 1년을 그렇게 치중을 했는지, 그게 좀 후회도 되고 또 반성도 하는 그런 건데, 뭐 거기에 학원에 나가니까 대학입시는 아주 틀에...석고 소묘를 잘 하는 게 1차고, 그 다음에 수채화를 하고, 이런 완전히 시험 스타일이 정해서 있어서 거기 1년 한 6개월 가량을 거기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고 연습을 했던 거 같아요.
이인범: 그래도 높은 경쟁률을 뚫고 대학 입학에 성공해서 대학에 들어가게 됐는데, 서울 미대에서 배운 것은 또 어떤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까?
서용선: 당시 경쟁은 굉장히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선 제가 또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렇게 이제 뭐 대학을 가려고 애써서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제 생활 자체가 주변이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대학교 한 2년간을 거의 그냥 허비하다시피 하고, 2학년 말 쯤 가서는 대학 생활을 거의 할 수 없을 정도가 됐어요. 성적도 그렇고 우선 학교를 안 나가고, 학교에 흥미가..그렇게 흥미를 주지 못했어요. 처음에 한 2년간을 학교 수업도 그렇게 뭐 그렇게 커리큘럼 같은 게 이렇게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꼭 따라가야겠다 하는 그런 의욕을 불러 일으킬 정도가 아니었고, 또 미술 대학 당시에 수업은 굉장히 자유스러워서 학교를 거의 안 나가도 그냥 밑바닥 성적은 나오는 정도에... 그러다가 아 그러니까 언제나 이런 제도가 있어도 개인의 생활은 또 그 안에서 굉장한 복잡한 그 제도의 내용 속에 이렇게 접합되는 것 같습니다.
근데 당시에 3학년때 쯤 돼서 이제 아, 다시 졸업이 가까워져 오니까 내가 선택한 이 대학에서 뭘 얻어 갖고 나가야 되겠다 하는 생각 또는 미술하는 사람으로서 졸업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살 수 있는가 이런 압박감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3학년 2학기 때 쯤에야 비로소 이제 미술대 학생이라는 게 현실감이 왔고 내 스스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미술 평론에 대한 몇 가지 글들이 저한테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 공간지 같은 데를 통해서 읽은 초현실주의 같은 내용과 동양의 선 철학과 이렇게 연관된 글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 글이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방근택씨라고 하는 평론가가 쓴 글이 현대 한국 미술이 이렇게 뭐가 겉돌고 있다는 이런 비판적인 글이었는데, 거기에 내가 배우는 선생님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고, 그걸 보고서는, 아...나를 가르치는 이 대학 체제라는 것이 현실 미술계하고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게 3학년 2학기 때 쯤에 굉장히 늦게 그걸 알게 됐죠.
또 하나는 바로 그때 즈음 해서 이경성 선생님이었다고 기억을 하는데, 이경성 선생님이 장옥진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쓴 내용을 보고, 그 분의 약간 기이한 행동이라던가 또는 그 아주 형태적으로는 또 굉장히 독창적인 면이 좀 있어 보이는 그 글에 빠져서 영향을 좀 받고, 스스로 좀 따랐던 일이 있었고, 학교는 3,4학년은 4학년으로 다 올라가면서는 당시에 77년,8년 경우에는 거의 대학 미술이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추상 미술로 미술 교육이 고정이 되다시피 해서 1,2학년에서 3,4학년으로 올라가는 그 커리큘럼이라고 하는 것은 정물이나 인물이나 이런 구체적인 걸 그리다가 3,4 학년에는 추상 미술을 하는 게 학교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추상 미술을 하는 연배가 많은 분들이 3학년, 4학년 수업을 맡고 있고, 1학년, 2학년은 강사 선생님이라던가 기초 소묘라던가 교양 수업이라던가 이런 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3학년 2학기에 가면서 당연히 추상 미술을 하는 걸로다가 학교의 흐름이 지금 생각해 보니까 굉장히 좀 낯설지만, 그 당시는 전체 분위기가 그렇게 되어 있어서 저도 거기에 그냥 일부 가게 됐던 게 아닌가...
이인범: 지금까지 역사나 도시 사람들, 자화상, 그리고 신화 등등을 주제로 해서 많이 그림을 그리셨는데, 특별하게 청년기에 이런 그림들로 몰입하게 된 계기가 있으십니까?
서용선: 음...다중적인 태도가 아니었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한 예를 들면은 대학을 졸업을 하고 나서 작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충분한 모델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가 그런걸 직접적으로 일러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뭐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은 전시를 하고 당시에는 전시의 기회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공모전을 통해서 약간 좀 이름을 내고 싶은 이런 욕심과, 그러나 또 제가 또 이렇게 뭘 이렇게 하고 싶은 거는 좀 합치가 안되고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을 다닐 때 조차도 한쪽으로는 그...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여러 가지 책에서 받았겠지만, 도시 사회에 어떤 전형, 도시 사회에서 겪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던가 이런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는데 그것이 잘 정리는 안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한쪽으로 조금씩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추상 미술 학교에 큰 흐름 속에서 추상화도 그리고, 또 졸업을 하면서 제가 갖고 있었던 또 하나의 그 자기 존재라 그럴까 우리, 내가 태어난 이 한국이라는데 동양이라는 곳 그리고 내가 또 서양화라는 명칭을 통해서 전공 분야를 서양화가 라는 쪽으로 선택한 것, 이런 것들이 다 모순 속에 얽혀 있어서 특히 동양화와 서양화에 대한 그 전공이 분리 된다는 것을 제가 굉장히 당황스럽게 맞이한 것 같아요.
그리고 거기에 대한 분명한 답도 하지 못한 상태로 그래도 그냥 감각적으로 서양화라는 게 더 새로운 것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서양화 전공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동양에 대한 것이 어...나는 한국 사람이고, 동양 사람인데 서양화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약간 모순적인 생각을 끝내 풀지를 못한 상태에서 이제 졸업을 하고 화단에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는데 그 문제가 저를 계속해서 해결이 안 났던 것 같습니다.
대학원을 다닐 때에는 바로 이제 그런 해결이 안 난 것을 어떻게 내 그림의 양식 속에서 그걸 종합을 시킬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소나무를 그리게 된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소나무를 그리게 된 건 구체적으로는 물론 내 환경 속에서 그 소재를 선택하긴 했지만 미술의 양식 속에서는 제가 봤던 좋은 중국 화가들, 특히 그 학교에 아주 좋은 화집이 하나 도서관에 있었는데, 그게 석도라고 하는 명말 청초의 화가인데, 그 화가의 화집을 보면서 약간의 그 자연을 그린 그런 자연에 대한 숭고함 같은 거, 그 어떤 격 같은 것을 그 화집을 통해서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게 판교 정섭의 그림들에서 아주 뛰어난 관찰력과 아주 명료한 표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조금 아, 이런 굉장히 좋은 양식이 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유화 도구라던가 이런 서양화 도구로써는 할 수 없는, 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까 하는 것이 공모전에 냈던 소나무 그림들이고...
또 한쪽으로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시에 대학에 70년대 중반에서는 이 철학의 흐름 같은 것들이 미술하고 연관을 좀 갖고 아마 그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 같은 데에서 이런 개념 예술이라던가 미니멀리즘 같은 데에서 오는 논리적인 추구들, 또 언어에 대한 분석들, 이러한 것들이 미술에 영향을 준 것들이 한국에 다시 영향을 준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대학 다닐 때 그런 책을 읽으면서 철학에서 좀 영향을 받았다고 그럴까요, 그 철학의 논리들이 어떻게 미술 평론을 통해서 미술로 흘러 들어오는가에 대해서 굉장히 대학원 내내 관심을 가졌던 거 같아요.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합쳐 지면서 내 자신은 그 당시에 이 이미지라는 것을 평면에 그림을 그리지만, 이 그림이 자연에서 내가 맞닥뜨리고 있는 어떤 그 현실의 순간, 이 단면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거나 그런 믿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가졌던 거 같아요.
어떻게 보냐하면은 이미지라는 것과 현실이라는 것을 합쳐 질 수 있다고 이렇게 관념적으로 생각을 한 거 같아요. 그런걸 현실에서 옮기려고 굉장히 노력을 해서 화면에서 맑은 그 느낌을 지금 생각하면은 현실이 맑은 건 아닌데도 그것은 언어에 의해서 제가 영향을 받은 거 같아요. 그런 그야말로 그 현상학 같은 데서 이야기하는 모든 군더더기를 제외하고 현실을 정확히 볼 수 있다고 하는 그 언어를 마치 화면에서의 맑고 깨끗하고 투명한 이미지로다가 이렇게 환원시켜서 생각한 것이 아닌가.
이인범: 선생님께서 그리신 소나무 시리즈에서 일어나는 말씀이시죠?
서용선: 그렇죠. 네, 그리고 나서 이제 아까 이제 이야기한 제가 대학교 때에도 갖고 있었던 도시라던가, 사람에서라던가, 이런 문제가 한 때 그런 거에 또 몰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바로 같은 해에 도시의 사람을 그린다던가, 또 신문에 뉴스를 보고 정치적인 문제에 좀 관심을 갖는다던가 하는 거를 이중적으로다가 해 왔기 때문에 아마 어떻게 보면은 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논리적으로 딱 이렇게 전개해 나가지 못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하죠.
이인범: 1986년도가 특별히 선생님께 중요한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기인 것 같은데, 강원도 영월에 아주 그 청령포 그림을 그리신다던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체험이나 혹은 그렇게 역사화에 전력투구를 하게 되는 과정은 어땠습니까?
서용선: 여러 가지 면이 복합되어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을 댄다면 우선 서구 고전에 대한 분석이라고 해야 할까 뭐 회의, 어떤 열등감이라 그럴까, 하여간 그런 게 하나 크게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왜냐하면은 대학을 열심히, 대학에서 수업을 열심히 듣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그런 슬라이드 속 같은 데서 보면 아주 화려한 르네상스에 그리스에 어떤 예술들이 동양과 굉장한 차이가 좀 느껴지는데 그런 것들이 저한테 한 쪽으로다 그런 걸 제대로 공부를 안 하면서도 짐은 갖고 있었던 점이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지금 이야기하신 것처럼 70년대에 그 70년대 후반에 가면서 서울의 주요 대학들은 미술 교육이 굉장히 미니멀리즘이 가장 정점에서 이렇게 움직이는, 특히 백색모노크롬 같은 경우, 이우한의 열풍 같은 경우, 이런 것들이 연결되었는데 제가 그 일종에 이제 굉장히 많이 퍼져 있었는데 한 편으로는 그 당시에도 여러 평론가들이 그런 것들에 대한 그 단순 단일한 내용들로 화단이 미술계가 너무 집중 되는 거를 경계하는 글들이 있었습니다 아예. 또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하나가 예들 들면 '한국 미술에서 색채가 죽어 가고 있다. 미술에서 색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런 내용에서부터 또 하나는 그 뭐 한국 미술이 그러한 그 너무 관념적으로 가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 속에서 보면 다양한 이야기의 전개라던가 뭐 여러 가지 전통에서 겪었던 무속적인 거, 민화라던가 이런 다양한 지적들을 산발적으로 하는 평론가들이 있어서 저도 좀 그 현실에서 보여지는 한국의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단 백색모노코롬이라고 하는 것이 제가 공부한 내용에 비교해서 보면 그것은 굉장히 조선의 유교적인 영향이 현대까지 연결된 거라고 판단했었고,
제가 그러한 논리를 이렇게 부추겨 주는 이론가들의 글을 갖고, 철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어 봤을 때, 철학이라는 것이 갖고 있는 것과 미술이 갖고 있는 것이 그렇게 반드시 완전히 어떠한 이론이, 미술에 반드시 그 배경이 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그 언어에 대한 관념에 대한 해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같은 내용이라도. 그런 거를 알게 되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다가 대학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그 스토리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 저는 역사라기 보다도 사람들이 겪고 있는 사건들 우리가 부딪힌 현실의 문제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언제든지 미술에 중요한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들을 한쪽으로 계속 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어떻게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을 조금 아까도 이야기한 것처럼 뭐 공모전에는 그런 걸 하면서 한편으로는 또 그런 작업을 한쪽으로 이렇게 해서 꿈을 갖고 있었던가 이런 생각을 했었고 역사 문제는 아마 내 생각에 두 세가지 하나는 그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러한 그 서구의 그런 전통적인 문제에서부터 제가 읽었던 많은 이야기들, 저한테 가슴 뛰게 만들었던 많은 문학 작품들이라던가 특히 소설들이라던가 또는 영화 같은 데서 그것을 직접적으로 제가 어떤 문화적인 감동을 받은 거란 말이죠. 그런 감동들이 미술로써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것을 단지 그것을 옮길 능력이 어떤 때는 됐다고 생각했다가도 그것이 참 힘들더라고요. 그것을 자기가 혼자 그걸 연습해서 만들어 낸 것은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한 예를 들면은 현실을 보고 그린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이라는 것은 눈 앞에 있는 현상이 현상의 흐름이란 말이죠.
그런 현상 중에 내가 사람을 그리겠다고 해서 금방 그려 지는 게 아니고, 그것이 많은 연습을 통해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하게 되는 자기가 바라는 모습까지 가려면은 눈 앞에 있는 많은 현상들을 반복해서 표현을 해봐야 그게 합쳐져서, 하나의 자기가 바라는 느낌이 나오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따로 공부를 했어야 했던 거 같아요. 대학에서 못 했던 것들을 예를 들면은 인체를 그리는 것 인물을 그리는 게 한번에 되지가 않더라고, 석고 그리는 것만 갖고 서는 인체를 금방 그리는 거에 도움은 그렇게 크게 안 되더라고요. 우선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거고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과 사건이라는 건 내가 바라는 관점을 보면서 그리기 때문에 그런 관점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따로 연습을 해야 되는 시기를 제가 대학교 강사를 하면서, 오히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런 걸 더 객관적으로 학생들이 그리는 걸 보면서 더 확실하게 인식을 하고 나 스스로 다른 작가들과 젊은 작가들과 함께 모여서 모델을 놓고 한 2,3년간을 반복해서 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현실을 그리는데 나중에 조금 도움이 됐다고 생각을 하죠.
이인범: 그러니까 서구...에서 나중에 유입된 제 1세계 미술의 주류인 어떤 형식주의적인 경향, 그리고 이제 한국에 유입된 어떠한 미니멀리즘의 또 다른 하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는 그 백색모노크롬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술계에 대한 어떤 반작용이 선생님의 청년기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굉장히 중요한,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노산군 일기라고 하는 한국의 비극적 그 정치적인, 비극적인 사건에 몰입을 하게 되고 그 이후에 이제 한참 뒤에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1999년부터는 한국전쟁의, 그 한국 역사에서 가장 참담했던 전쟁이라고 이야기되는 6.25 한국전쟁을 주제로 하는 작업들을 많이 하고 계신데 특별히 선생님께서 그런 주제를 택하게 되는 어떤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서용선: 첫 번째, 오랫동안 단종과 연관된 조선 초기의 아주 가장 조선 초기의 비극적인 사건 중의 하나인 그런 권력 다툼에 대한 내용은 뭐 예술에서 그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 저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예술의 비극성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고 그것이 인간이 오늘날은 굉장히 잊고 살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운명을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이미 싹터 있다고, 그 몸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거 자체가 저는 우리가 현실에서는 잘 흔히 잊지만, 예술에서는 잊을 수가 없는 예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걸 표현하는데 좋은 형식이라고는 일단 저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죽음에 닥친, 죽음을 알고 살면서도 그것을 잊고 사는 문제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단종과 연관된 사건은 아주 그런 면을 그런 삶의 투쟁과 권력에 대한 욕망과, 또 인간이 갖고 있는 그런 숙명진 죽음, 이 모든 것들을 다 뭉뚱그려서 보여 주기에 굉장히 좋은 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는 86년에 제가 그 현장에, 단종이라는 임금이 유폐되었던 현장에서 싹튼 구체적으로 이렇게 계획을 하게 되었지만 그 전부터 서구와 동양을 비교하면서 서구 미술이 갖고 있는 배울 점 중에 하나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서구미술을 극복하려고 하는 그런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면서 그 소나무라는 소재, 동양적인 소재를 선택을 해서 동양화에 대한 생각도 고민도 하면서 작품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서양미술을 극복하려면은 어떤 것들을 먼저, 어떤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하는가에 한편으로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런 그 양쪽에 그런 그 모순된 그런 관계들을 찾기 좋은 것이 역사라는, 지금은 역사화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제가 역사화라는 그런 관념이 없었어요. 그냥 단종과 얽힌 하나의 사건, 그런데 그것이 아주 친족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아주 치사한 면이죠. 욕망에 대한 그런 면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하나 이렇게 생각을 한 거고,
두 번째는 한국전쟁의 전시와 연관된 그 작품은 오히려 제가 어렸을 때 그 겪은 그 환경들이 그게 깊었는데 그것을 잘 정리를 못하고 있다가 아마도 외국 여행을 하면서 한국의 현실을 좀 어떻게 보면 좀 거시적으로 본다고 해야 할까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이런 생각입니다. 특히 2000년대 초에 베를린에 가게 된 일이 있는데 베를린에 분단되었던 흔적들이 베를린 시내에 여러 군데 남아 있어서 바로 우리가 몇 십 킬로 20-30 Km 떨어진 그 휴전선 밑에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그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대단한 아주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생활에서는 오히려 우리는 그걸 자주 잊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을 굉장히 확연하게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동독과 서독에 그 분단을 통해서 겪었던 그 작가들 또는 예술가들 이러한 체험들, 또 독일 사람들이 그 2차대전을 통해서 겪었던 그 전쟁에 대한 것들이 전쟁에 대한 모든 상황들이 그대로 제가 어렸을 때 직접 전쟁을 치른 세대는 아니지만 전후에 그 상황이 굉장히 명확하게 나한테 인식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작품을 이제 시작을 하게 되어서 한 15년이 되어서, 15년쯤 가니까 그게 점점 더 제 체험과 또 제가 갖고 있었던 어린 시절 부모님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간접 체험들을 확실하게 알게 되고 부모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서 많은 것들을, 많은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 좀 더 너그러워 졌다고 그럴까요, 그런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 사람들끼리 서로 어떤 소통이 안 되는 문제는 의미가 없다, 이런 느낌에 까지 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좀 질문에 내가 조금 다른 이야기가 섞여 들어간 것 같은데, 그런 역사에 대한 문제는 그런 직접적인 체험 또는 간접적인 체험 같은 것들이 이제 합쳐져서 나왔고 초기에 그것이, 그림은 86년에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82년, 83년에 그 역사적인 주제를 갖고 제가 그림을 한두 개 뭐 예를 들어서 임진왜란이라던가 주로 이제 이렇게 아마 이렇게 대외적인 이렇게 항쟁 한국에 반도 국가로서 살아남은 그러한 역사적인 사건들 몇 개를 큰 화면으로 해서 시도를 했었죠.
그런데 그것이 집중화 되지가 못하고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것은 그냥 국가에서 이렇게 주어진 주제 같은 거를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가 왜 어렸을 때 보면은 항상 이순신장군 노래하고 뭐 그 어떤 영웅으로서 그 군사 독재시대 때에 많은 군사적 사건이라던가 군대 영웅들을 갖다가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강조를 해서 역사에 많은 부분을 그쪽으로 다 이렇게 쏠리게 하는 이런 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걸 처음에 조금 했었던 거 같아요 한 2,3년간. 그러다가 그런 것들에서 깨어나서 단종과 한국전쟁과 같은 건 제가 개인적으로다가 그런 주제의식을 분명히 이렇게 의식하고, 뭐...지금에 와서 이렇게 어떤 점에서 본다면은, 그... 서구 미술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었던, 어떤 점에서는 무모하게 그것을 극복하려고 항상 생각했던 것, 했던 내용들, 그 내용은 주로 뭐냐 하면 무슨 내용이냐 하면 한국 미술이 너무 쉽게 서양미술을 수용을 하는데 그 너무 형식적인 면을 수용을 하고, 형식이라는 것은 저절로 어떤 내용을 채워 가다 보면 형식이 세워 진다고 나는 생각을 하는데 형식부터 들여오고, 그 다음에 형식에 의미를 붙이는 것에 대해서 좀 거부감을 가졌던 거 같아요.
이인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그 서구 미술 수용에서 형식주의적인 측면이 만연됐었던 것이 남북 분단이라고 하는 문제, 혹은 동서냉전체제에 첨예한 그 접경 지역에 있었던 한국의 정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거 같은데, 선생님께서 추구해 온 그 예술세계, 현실을 마주하는, 진지하게 마주하는 그런 태도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은 당시까지 전개되던 한국 현대 미술의 흐름이나 지배적인 경향과 상당히 대립각을 불가피하게 세우고 있는 것 같은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용선: 아마 지금 이야기 하신 것처럼, 항상 이렇게 회의를 많이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습화 된, 아마 좀 이렇게 폭넓은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 저도 그냥 화가라고 하고, 작가라고 하지만, 사실은 제가 그 화가라든가 작가라는 게 뭐를 뜻하는 것인지 확실히 잘 모르겠어요. 잘 뭐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단지 몇 가지의 일들은 이렇게 감각적으로 느낌이 전해 지기도 하죠.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을 그렸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라던가, 그런걸 종합해서 저 나름대로 아, 이렇게 가는 것이 작가의 길인가? 이런 생각도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표적인 게 미술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하는 거를 이렇게 항상 생각할 때가 있어요. 잘 모르는구나 내가.
그리고 사람들이 물론 아는 것도 그게 꼭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 바탕 하에서 과연 그 내가 이렇게 산다는 것과 미술을 한다면서 사는 게 그것이 단지 직업으로써 하는 것이지 직업으로써 결정되어 있어서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인지 정말 숨가쁜 내 그 어떤 내부적 욕구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건지 이게 좀 헷갈릴 때가 있어요.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저는 그 한국이라는 사회가... 이 서구와 만나는 과정을 계속해서 더 깊이 봐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어...그것을 서구냐 한국이냐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좀 뭐 굉장히 조심스레 봐야 되지만, 그래도 일단 지리로다가 지형적으로다 이렇게 뒤늦게 유럽이라는 또는 미국이라는 그 외 다른 나라들과 이렇게 접촉하게 되는 그런 과정을 섬세하게 보면은 거기에서 이미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틀을 찾고 그런 이유 때문에. 지형적인 요구에 의해서 각기 문화가 다르게 이렇게 발달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나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거에 따라서 그것이 형태가 이제 미술이라는 형태가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대단히 일본을 통해서 서양과 만나는 과정 속에서 왜곡된 것도 또 있고, 그리고 그 이후에도 미국을 통해서 대학 교육이 설립이 됐다거나 미 군정 하에서 우리가 다시 그런 어떻게 보면은 정치 사회에 경제적인 측면과 미술이라는 제도 형식 같은 것이 같이 맞물려 있는데 우리가 자꾸 그 중에서 미술을 떼어서 생각하는 습관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런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회의하지 않으면 미술이 잘 보이지 않는 거 같아요 더더군다나 작가들은 감수성이 예민하고 저를 포함해서, 눈에 보이는 형식에 빠지기가 아주 쉬운 게 이 미술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이 일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 편으로는...결국 그것은 자기를 통해서 표현하는 거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행동하고 살고 있고, 서양 언어를 배우고 사람과 만나는 것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걸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않고, 그 사람들이 해 놓은 것을 보고 받아들일 때에는 굉장한 오해가 나중에 생기는 걸 두고두고 우리가 지금 겪고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인범: 서구의 예술 개념이나 미술제도 자체를 그 자체로 수용하는, 하기 보다는 그것과의 충돌을 어쩔 수 없이 몸소 실천한 것으로 받아들여 지네요
서용선: 네, 그러니까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들에 처했던 많은 한국의 예술가들을, 아시아의 많은 예술가들을, 또는 이론가들 다 포함해서, 그 과정들에... 그게 충분한 자료를 갖고 우리가 만난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의 어떤 그 의도도 아니고, 우리가 그걸 만날 때에 좀 더 지금의 항상 만나는 순간에 어떻게 그것이 형식화 됐는가 이런 문제를 자꾸 녹여서 보지 않으면은, 그 형식은 굳어서 나중에 자꾸 걸리적 거리고 우리한테 이렇게 방해가 되는, 우리가 생각하는데 방해가 되는,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금 미술계에서 쓰고 있는 많은 용어들, 미술 용어들이 사실 그게 어떤 근거가 별로 없는 것들이 많은 거 같아요. 그게 그 근데 그것이 우리한테 영향을 많이 준단 말이죠. 그래서 뭐 예를 들어서 대부분 이렇게 보면 항상 미술계 쪽에서 무슨 주의적 예술이라던가 이 사람은 어떤가에 영향을...아까 얘기한 우리가 어떤 면에서 볼 때 보면, 미니멀리즘 같은 것도 그런 거겠죠. 그게 그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문제는 끊임없이 우리한테 회의하는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형식에 자꾸 갇혀 버리게 되어서 굳어져 버린다는 거죠.
이인범: 그런 점에서 생각이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어... 최근에 일어나는 어떤 국제적인, 세계적인 어떤 미술, 미술 담론들, 어떤 측면에서는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상당히 유리되어 있는 것 같고,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거리를 띄고 있는 것 같은, 주류 제 1세계 미술과는 그리고, 신화를 주제로 삼는다던가 혹은 풍경을 주제로 삼는 그 어떤 주제 의식 같은 것에서도 조금은 많은 사람들한테 아나크로닉한 어떤 인상을 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해 주시겠어요? 왜 신화를 하게 되셨는지, 소재를 택했는지, 풍경의 형식이라고 하는 것을 낡은 형식으로 보여 지는데 지금 시대에 다시 그것을 끄집어내서 작업에 주된 시간을 보내고 계신지...
서용선: 그러니까 이제 한 10년 전부터 그런 생각에 좀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은 외국 여행도 틈이 나면은 많이 가려고 하고, 또 새로운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예를 들어서, 뭐 한 10년 전에도 이런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흐름이라던가 또 새로운 미디어 환경들에 따르는 예술의 형식에 또 새로운 개척 같은 이런 거에 굉장히 관심도 많이 갖고, 그 아주 자유스러운, 새로운 방식들, 표현의 도구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저도 굉장히 호기심도 많고, 긍정적으로도 생각을 많이 하면서도 우선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좀 집중을 하기 시작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주류라고 하는 것, 전에는 그 굉장히 그것에 대해서 주류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려고 노력을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너무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특히 언제나 그런 거 같습니다. 이 국가에서도 그렇고 서구와 동양 사이에서도 그렇고, 미술계도 그런데, 주류라는 건 자기가 어떤 일을 열심히 하고 있으면은 그게 주류가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주류인 거 같아요. 자기가 주류가 아닐 때 주류를 자꾸 보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도 그렇고. 그래서 어... 아주 너무나 다양하고 제가 좋아하는 많은 예술 작품들, 제 스타일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서 계속 끊임없이 현혹되어서 전시회도 많이 가 보려고 그러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특히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역사, 한국 주로 이제 한국의 역사에 대한 것들을 할 때는 한편으로는 나는 그게 역사화 장르는 누구나 알다시피 지금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이게 주류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은 한국은 역사를 제대로 성립하기가 참 힘든, 주변국들의 힘에 의해서 그 소수에 어떤 이런, 뭐 국토도 작고, 역사도 굉장히 굴곡이 많은 이런 거에서 특히 문화와 관련 되어서는 우리의 그 축적된 지식이 너무 흐트러져서 그 주류를 잡아 내기도 힘들 정도로 다 산만하게 주변국들에게 빼앗기고, 흐트러지고, 우리 의식 조차도 함몰되고 이래서 잘 기억을 찾지를 못하고 하는데, 그러한 것들을 통째로 찾고 드러내는 것은 그게 주류여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이건 단지 서구와 비교해서만이 그런 게 아니라 서구 미술은 많이 보니까 서구가 그렇더라 그렇더라고요. 자기네, 우리가 보기에 특히 이제 50년대, 40,50년대 이후에 우리는 미국 미술의 흐름을 나도 열심히 봤고 많은 작가들이 아시아의 많은 작가들이 봤단 말이죠.
그런데 70년대 이후에 그렇게 주류 같은 것들이 어떻게 됐는가를 보면, 결과를 너무, 그 사람들을 동력을 지금 좀 잃은듯 한 느낌을 줘요. 더군다나 그 화려한 미국의 현대 미술들이 나중에 80년대 90년대로 가면은 영국과 독일 같은 데에 미술들이 그 중심을 차고 들어 오는 거를 알 수 있고, 그 내용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전통 속에서도 나오고, 예를 들면은 아...영국의 유명한 화가들, 예를 들면 뭐 가장 대표적으로 루치안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 또는 독일의 많은 신표현주의 작가들이라던가, 새로운 개념 예술가들, 이 사람들이 60년대 이후에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을 하면서,
예를 들어서 동독과 서독이 합쳐지면서, 그 힘이 뭉쳐지고, 동독에서 넘어온 많은, 아주 시대에 주류에서 뒤떨어진 사실주의 공산주의 계열의 작가들이 어...현대적인 거에다 융합을 시켜서 자신들의 문제를 이렇게 끌어 올리는 문제에서는 아주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 그 현대에 주류로다가 떠오르는 걸 보고, 지금은 또 그런 것들이 너무 이게 퍼져 나가서 이미 예전과 같은 그런 제국주의 미술 같은 이런 중심은 지금은 더군다나 흐트러졌을 때 한국에 대한 역사를 그려 줄 사람은 한국뿐이 없습니다. 다른 데에서 그것을 관심이 별로 없는 거죠. 그러면은 그것이 한국 내로 국한되는 거 아니냐, 그렇지는 않은 거 같아요. 이것을 얼마나 열심히 잘 해내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다른 데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아, 저긴 저렇게 열심히 해서 저런 게 형식이 만들어 지니니까 우리도 하자. 그러면 이쪽이 주류가 되는 거라고 생각해서 한 10년 전에도 제가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제가 그 주류에 대해서 이렇게 수동적으로 생각했던 생각이 조금 바뀐 거 같아요.
이인범: 그러면 형식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작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서용선: 그렇죠. 작가, 작가라는 게 개인사이건 집단의, 국가의 역사건 간에 그것은 만들어요. 역사는 이렇게 보면은 누가 얼마나 열심히 기록하고 의미를 파악하느냐가 역사가 만들어 지는 거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미술도 뭐 같죠.
이인범: 그 현실에, 현실을...반영하고 재연하겠다고 하는 의도를 가진 수 많은 사람들이 역사화라고 하는 그 이름으로 호명을 하고 그럴 때, 이제 역사적 사실과 역사학이나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그 예술과의 그 어떤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자칫하면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문제에 문학적 서사의 한 종속 단위로 그 이야기 그림을 그리는 수준에서 이해될 가능성도 종종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를 예술가로서 개입하고 역사적 해석에 개입하는 문제에 집중해 오신 작가로서 예술이 역사에 개입하는 큰 어떤 매력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서용선: 우선 기본적으로 나는 역사하고 현실이 분리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제 역사라고 하는 것에 표피가 현실이겠죠. 근데 그 현실이 역사를 쥐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의미가 있고, 그럴 때 현실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냥 현상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하는, 우리가 말을 붙일 때에는. 근데 나도 그런 걸 느낍니다. 내 그림을 소개를 하는 많은 지면들에서 보면은 그 역사화라는 장르가 새롭게 이렇게, 새롭다기 보다도 낯선 데에서 오는 흥미, 이런 걸로다가 읽히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또, 뭔가 그 화가의 내용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할 때에는 결국 어떤 언어가 선택되느냐가 빨리 전달 하기가 좋은 경우가 있는데 역사화라는 것은 사람들한테 그래서 빨리 뭔가 얘기하기가 좋은 거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그 내용이 중요한 거죠. 내용이 어떤 역사를 어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현실과 연관되고 역사라는 것도 의미를 갖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가장 주된 거는 현재 내 삶이죠. 내 삶과 내 주위의 삶이 가장 중심이죠. 그런데 거기에 이어서 그 현실을 보기 위해서 역사라는 게 참고가 되는 거겠죠. 그런데 나를 전달하는 중간 매체 또는 어느 뭐 저널도 좋고 관객도 좋고, 그런 사람들이 역사적인 역사에 대해서 더 얘기가 편해서 그런 얘기를 끌어 내는 거를 전 굉장히 흥미롭게 관찰을 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을 갖고 이해를 하려고 하다 보면 현실의 문제로 반드시 온다고 생각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 주된 그림들은 도시의 사람들, 자화상들, 여러 가지 이런 현실에서 내가 관계를 하는 것들이고, 역사는 부차적인 거 거든요. 그렇지만 사회에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조차도 난 이 사회에 어떤 현실 부분에서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이 되어서 그것이 나를 충분히 나를 설명해 주지 않아도 시간이 가면서 정리가 되리라고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이 나는 뭐 역사가로서 더 알려지는 거에 대해서 그렇게 큰 뭐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기 보다도 그런 현상 자체를 내가 오히려 반대로 이제 그걸 보면서 언제 이것이 합쳐 질 것인가. 그건 결국은 내가 작품을 얼마만큼 현실감 있게 사람들을 설득하느냐에 따라서 역사는 구체적인 하나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그 비극이라는 게 우리가 오늘날, 우리는 비극이라는 거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을 안하고 그냥 가볍게 생각을 하는데, 인간이 갖고 있는 이 운명적 슬픔이라던가 비극이라던가 이런 것들은 아주 뿌리 깊게 있는 건데, 단적으로 얘기하면 오늘날 현재 도시 사회는 소비자, 소비, 이 물질 사회에서 그런걸 자꾸 현혹되어 잊고 살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전 이제 그런 것을 도시 인물이라던가 사람들을 통해서 언젠가는 더 확실하게 이렇게 인간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인간이 어떤 인간이다.나를 포함해서...그런걸 좀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죠.
이인범: 인간의 삶이 처할 수 밖에 없는 폭력성이나, 그 현실을... 그 간과할 수 없다는 말씀으로 여겨지네요.
서용선: 그럼 그럼 그렇죠.
이인범: 도시, 도시 사람들을 그리든, 그 몇 백 년 전의 역사를 그리든, 가까운 근대에 한국전쟁을 주제로 삼든, 어... 그것을 가로지르고 있는 어떤 고통성은 인간의 삶의 조건을 황폐하게 하거나 어떤 그 폭력적, 폭력성, 견딜 수 없는 폭력성을 그린다는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은, 이렇게 이해도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공동체, 집단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기억의 문제, 집단적 트라우마의 문제를 치유하거나 해소한다는 차원에서 예술이, 선생님의 예술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문제에 천착해 들어가면서 선생님께서 보여 주는 어떤 인문학적 그 탐구심과 선생님이 그리고자 하는 어떤 세계, 예술로서의 어떤 예술적 상상력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미묘한 그 관계 같은 것들을 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서용선: 그... 사람들, 이제 한국을 포함해서, 오늘날은 국가라는 형식에 너무 당연한 거 같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 들이는데, 그런 점에 저는 조금 거기에 대해서 아니다, 그렇다라는 거 보다도, 이게 좀 더 생각을 해봐야 된다, 이런 입장인 거 같아요. 그 폭력이라던지 이런 그 우리가 쓰는 얘기들 속에서 현대 사회는 그러한 내용들이 아주 교묘해 지는 거 같아요. 우리 스스로에게 갇혀서 예전에는 그게 항상 그렇지만 우리가 지나고 나서 보면은 항상 지나간 과거는 좀 무지하고 뭐 그냥 전쟁이라는 게 거의 육체적으로 부딪치고 이런 전쟁이었던 것이 오늘날은 국가가 그걸 보호해 줘서 또 국가와 국가가 연합해서 이제 전쟁이 좀 뭐 사라져 가고 있고 이런 거, 이런 형식적으로는 그런 틀이 조금 변하는 거 같죠. 서로 억제하고 평화를 국가간에 서로 조절을 해 나가면서 이제는 그렇게 까지는 안 갈 것이다 하는데, 방금 눈 앞에 우리 앞에 부딪친 여러 가지 현실들을 종합해 보면 꼭 그렇게 그게 낙관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장 이야기하면 우리가 북한이 원자 폭탄을, 핵을 가진 이전과 갖게 된 이후는 엄청나게 다른 세계로 우리가 가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현실을 단지 굉장히 어떤 정책적으로 풀 수 있을 것 같은 희망 속에서 우리가 오늘 하루하루를 이렇게 가는 거죠. 그거 이상의 또 많은 현실들에서 우리한테 처해진 것은 우리가 권력을 이양해 놓고 국가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권력의 층이 여러 층이 있고 우리는 그 속에서 구조화되어서 살고 있는데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일반 개인들이 너무 이제 한번 그렇게 결정된 것이니까 그런 시스템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 거에 너무 안주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내 그림에...그림에서 그런 것들이 어떻게 들어 갈거냐 하는 거는 뭐 나는 뭐 그림으로 밖에는 증명할 길이 없겠죠. 근데 두 가지 측면에서 하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어떠한 그 주제나 소재를 통해서 그 주제를 표현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오랜 시간 축적되어서 하나의 형식이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왜 지금 내가 뭐 이렇게 저렇게 작품을 해봤어도 나중에 와서 보면은 내가 사람을 보는 어떻게 보면은 대충 보는 눈, 그냥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에 내가 본 거를 자세히 봐서 그것을 옮기려고 하기 보다도, 뭔가 나는 더 이렇게 객관적인, 객관적이라는 말은 잘 안 맞는데 하여간, 인간이 두 가지 아주 유머러스한 그런 존재인 면이 하나가 있고, 하나는 그런 비극적인 어떤 거를 갖다가 숨기고 살아가는 이런 면이 있는 거 같아요.
어떻게 그게, 그런 것들이 형성됐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면들이 내 붓 터치 속에 내 그림의 형태 속에 담겨진다면은 그것들이 점점 나중에 합쳐져서 어떤 주변에 환경에 어떤 사람이 그려지고 그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인간의 어떤 긴장감 같은 거 이런 거 속에 그런 폭력이라던가 또는 우리가 처한 아주 구조적인 모순 같은 것들 권력과의 관계, 그런 그 시대에 어떤 우리가, 우리가 결국은 이런 과학이라던가 이런 것, 또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문제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시각적인 이런 미술의 형식, 그림의 형식 속으로다가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런 거에 대해서 이렇게 아주 조금씩 그냥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이인범: 어...선생님께서 추상이나 어떤 개념적인 작업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어떤 작가로서 재현적 성격의 그림을 그리고 계신데, 어 그런 그 사실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사실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하는 문제, 혹은 사실의 기록이라고 하는 문제와 그 사실성이라고 하는 문제와 예술성이라고 하는 문제 사이에 충돌이나 갈등 같은 것을 느끼신 적은 없습니까?
서용선: 뭐 그 문제와 항상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이 있죠. 우리가 그 역사화를, 역사화라는 장르를 이야기할 때도 내가 이렇게 역사화를 그렇게 많이 알고 그걸 하려고 그런 장르를 잘 아는 건 아니고 나는 단지 그 조선 초기의 한 비극적인 사건에 몰두해서 그거를 여러 각도로 본 게 나름 이제 역사화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오늘날은 역사화라는 장르 자체가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그러한 식의 장르, 국가에 의해서 주도된 그런 장르는 지금 뭐 많이 나오지 않고, 다른 형식으로 많이, 예를 들면, 영화 같은 데서 오히려 더 역사 옛날에 얘기하던 그런 역사를 더 잘 보여 줄 수 있고,
또 뿐만 아니라 현대 회화 중에서도 옛날 같이 그런 기록적인 역사는 아니지만 역사적 징후를, 울림을 줌으로써 역사적인 내용을 전해 주는 그런 현대적인 역사화들도 있고 그렇지만 나는 이제 그런 거 사이에서 좀 뭐 회화라는 것을 좀 이렇게 절충적인 관점에서 보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들지요. 근데 그것이 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역사화라는 장르가 따로 이렇게 완전히 있다고 생각하기 보다도 그냥 하나의 이야기, 인간이 겪는 이야기의 연장선 상에서 역사화와 현실에 그림들, 현실을 다룬 그림들을 연결시키고 싶은 게 이제 내 생각인데 그건 이제 사람들에 따라 다르겠죠.
이인범: 종래의 장르 구분법이라던가 뭐 이런 저런 그 미술 양식을 이런 것과 좀 구분 시켜서 별도로 서용선 선생님의 그 작품 세계를 그 자체로 읽어 내는 언어 체계가 다시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서용선: 네 뭐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죠
이인범: 여기서 끝낼까요?
서용선: 네, 그러죠. 수고하셨습니다.
진행 : 이인범 교수
카메라, 조명 및 음향 : 프랑수아 사이칼리
비디오 편집 : 프랑수아 사이칼리
자막 및 번역 : 김소영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