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
윤진섭: 안녕하세요. 미술 평론하는 윤진섭입니다. 1914 (2014)년* 1월 10일 저는 한국의 원로 작가이면서 가장 대표적인 전위 예술가 중의 한 분인 이승택 선생님을 인터뷰 하기 위해서 오늘 작업실에 왔습니다.
이승택 선생님은 1958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그 이후에 쭉 작가로서 활동을 해오고 계십니다. 1958년에 졸업 할 때에 그 아치형의 어떤 조각작품을 거꾸로 이렇게 벽에 매달은 그런 작품을 출품하셨는데 그 구조물에는 철사가 감겨져 있었습니다. 그 작품이 상징하는 바가 아주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 분의 그 첫 설치 작업으로써 그 이후에 펼쳐지는 작가로서의 그 삶을 상징한다고 이제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 이 후에 한편으로는 기념 조형물 작품을 하시면서 생계를 유지하시고 전업 작가로써 아방가르드 작가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오늘날에 이르셨는데 그 시기별로 그 상당히 변천된 그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령 60년대에 불과 바람을 이용한 그런 작업 이라던지 기타 뭐 체모를 이용한 털을 이용한 작업 이라던지 그 다음에 돌을 깎아서 거기에다가 로프를 묶는 작업이라든지 이런 다양한 작업을 해오시면서 특히 최근에는 몇 년 간에 걸쳐서 풍선작업과 같은 퍼포먼스 작업도 많이 해오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이승택 선생님을 모시고 그 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승택: 안녕하세요
윤진섭: 그 동안 이제 작업을 쭉 해 오셨는데 어… 지금 한 50년 넘으셨나요.
이승택: 55년
윤진섭: 55년이나 되셨습니까? 지금 연세가 한국 나이로 여든 다섯이신가 그런데 그 동안 그 긴 작가로써의 그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그렇게 해부화 해 볼 때에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하는 점이랄까요 그 어떤 좀 어떤 그 삶에 대해서 함축적으로 몇 마디 해주시죠.
이승택: 어 삶에 대한 애기보다도 먼저 내가 그 실험미술 그걸 왜 하게 됐느냐 그거부터 좀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윤진섭: 예.
이승택: 우선 그때 당시만해도 현대 미술이라는 것이 이러이러한 것이다라는 거를 굉장히 그 의심을 했다고 할까 거기서부터 그 현대미술이 이러이러하다는 거를 역설적으로 뒤집기 시작한 거에요. 뒤집기 시작한 거는 어… 그래도 예술가는 뭔가 공부를 좀 많이 해야 하지 않나 해가지고 그… 어쨌든 어려운 철학이랄까 그런 거에 조금 그 좀 하는척했어요.
그래서 철학 같은 거를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 철학 그 자체가 원래 학문이 왜 이렇게 되느냐는 물음부터 생겨나는 거에요. 그 왜 이렇게 되는가 라는 그 뒷면에는 그 역설적인 것이 꽉 차 있더군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어떤 정반합 식으로 뒤집어서 생각하는 거… 그런 그 힌트를 거기서 얻었어요. 그러니까 세상을 어 뒤집는다 거꾸로 생각한다.
윤진섭: 거꾸로…거꾸로 생각할 수 있는…
이승택: 그런 것이 그 시발점이 된 거에요. 그리고 또 사실상 그 미술사를… 미술의 역사를 이렇게 보면은 전부 이 뒤엎는 역사입니다 그게. 그러니까 어 현대미술이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는 거를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뒤엎는 그런 작업을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그 뒤엎으면서 시작된 그런 작업들이 의외로 엄청난 그 어떤 변화랄까 창의력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 예로 어… 그 고드렛돌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 고드렛돌에 그 자세히 이렇게 보면은 그 돌멩이를 노끈으로 묶은 게 있어요. 그 고드렛돌 그거는 우리 농기구 돗자리 짜는데 필요한 거에요. 그때 내가 그 때 그걸 볼 때는 엄청 신기하더라고요. 아 이게 정말 그 어떤 농기구보다도 하나의 그 예술적인 어떤 그 그거를 이렇게 봤을 때는 엄청난 그 어떤 그 설치라 할까 그때 설치란 단어가 없었지만 희한한 어떤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돌멩이를 이렇게 묶어가지고 그거에 3분의1정도 조그마한 거를 축소해서 제가 만들었어요. 만들어서 집에다 걸어 놓고 이렇게 보니까 그게 어… 자꾸 좋아서 보고 또 보고 이렇게 하는데 그 중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냐 하면은 그 돌멩이가 딱딱한 돌멩이가 묶음으로 해서 물렁물렁해 보인다.
윤진섭: 아… 예, 예
이승택: 그런 걸 추출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우리가 개념적으로는 돌멩이가 딱딱하고 무겁다 그런 거를 나는 물렁물렁한 돌멩이를 만들어 낸 거에요.
윤진섭: 그러니까 이제 선생님이 그러니까 그런 물렁물렁한 속성을 이제 거기서 발견을 하셨다. 그래가지고 그러면 인체 특히 여체조각 같은 거를 노끈으로 감는다든지 또 책이나 돌과 같은 것을 움푹 파이게 만들어서 노끈으로 감는 그런 행위가 혹시 그런데서…
이승택: 자꾸 발전하게 된 거죠.
윤진섭: 거기에서 나오게 된 겁니까?
이승택: 그렇죠. 그러니까 그 돌멩이를 그 물렁물렁한 돌멩이를 추출하고 또 물렁물렁한 톱, 칼 이게 전부 거기서 그때 나온 거 거든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그 그전에 있었던 어떤 그런 미술하고는 전혀 다른 그런 느낌이 저기 생기더라고… 그리고 그 거기에서 그 어떤 새로운 그 느낌 새로운 미술이라는 거를 새로운 소재, 소재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까 그 소재는… 그때에는 그 소재 주의가 아니고 그 어쨌든 간에 그런 그 어떤 자료 그런 거를 전혀 그 50년대 말이니까 전혀 그 단어가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소재를 자꾸 바꿈으로 해서 전혀 그 과거와 다른 그런 미술이 생겨났다.
윤진섭: 그래서 선생님 이제 그 일상 속에서 그런 소재를 얻고 또 아이디어를 얻는 것으로 이제 그 유명하신데 그러면 바람이라든가 기체 또 불 연기 그런 작업 많이 하셨잖아요. 바람에 천을 날린다든지 또는 뭐 합판에 불을 붙여서 한강에 떠내려 보낸다든지 이런 그 상당히 대지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의 전시를 많이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해서 떠오르게 되셨습니까?
이승택: 어 그러니까 새로운 재료를 씀으로 해서 새로운 미술이 생긴다 그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우선 그 제가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그… 연기작업… 연기 그 연기는 그 연기 피우면 막 저기 연기가 그 저기 아이고 저기…많이 그 번…
윤진섭: 봉화 같은 데서 혹시 그런 거 하지 않습니까? 뭐 한국의 조선시대 봉화 같은 거…
이승택: 어쨌든 연기가 타오르는 것이…
윤진섭: 타오르는 거죠
이승택: 굉장히 그 흥미롭더라고요.
윤진섭: 아하
이승택: 그래서 그게 그거는 실내에서는 안되고…
윤진섭: 그렇죠.
이승택 그래서 야외에 나가서 그거를 저기… 한 거에요.
윤진섭: 그러면 굴뚝을 만드셨나요?
이승택: 아 만들었죠.
윤진섭: 아 굴뚝을 직접 만들어서…
이승택: 그러니까 야외에서 이렇게 볼 때는 얼핏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스 아트 하고 관계가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하는데 나는 사실상 50년대 말 60년대에는 그 대지예술이라는 그런 게 없었어요.
윤진섭: 아… 어스아트, 대지예술…
이승택: 그래서 그…그 없을 적에 나는 그 연기라던가 연기를 막 하다 보니까 그 불 그리고 이제 물도 이렇게 되고…
윤진섭: 물도 있고 바람…
이승택: 바람… 그러니까 그 그때는 참 대단했어요. 내 자신이 거기에 취해가지고 와 이렇게 좋을 수가 있는가 그러면서 어 그때는 벌써 뭐 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 이게 다른 그때 그 외국의 서적들을 가끔씩 보기도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고.
윤진섭: 외국에 다른 작품들이 눈에 안 들어오고…
이승택: 그래서 이 바람 작품들은 아 세계는 나에게부터 시작 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자부심이 생기더라고. 그러면서 내 작업에 취해서 참 정신 없이 정말 네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그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어… 초기에 될 수 있는대로 나는 미술사에 남는 거 그걸 주로 좀 찾았어요. 그러니까 미술사에 남는 거가 뭐냐.. 그거를 자꾸 이렇게 자꾸 이렇게 하다 보니까 그런 바람이라던가 돌멩이 묶는다던가 또 나무를 묶는다던가 인체를 묶는다던가 전부가 그 아주 그냥 정말 그 신선하고 새롭더군요. 그런 작업이 하여간 그러니까 참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참 많이 했습니다.
윤진섭: 선생님 고향이 어디시죠 그러니까 지금 이제 북한인데…
이승택: 함경남도 원산하고 함흥, 함흥하고 사이에 있습니다.
윤진섭: 원산하고 함흥 사이에..
이승택: 그 중간에…
윤진섭: 그러면 내려 오신 거는 언제 몇 살 때…
이승택: 50년
윤진섭: 예?
이승택: 50년
윤진섭: 전쟁 나면서 내려 오셨군요
이승택: 일사 후퇴 때….
윤진섭: 그러면 선생님 때는 전쟁에 참전 할 수도 있는 세대 아닌가요.
이승택: 그렇지.. 참전…
윤진섭: 참전할 수도 있는…
이승택: 다 저기 잡혀가고 그렇게 했는데 나는 그때에 어 우리 고흥군에서 조각을 김일성 조각하고 스탈린 조각을 만들어서
윤진섭: 아, 그 잘했네요.
이승택: 예술가 대우를 받았어요. 그래서 군대도 면제되고 그랬어요.
윤진섭: 그래서 군대 면제 받으셨어요. 스탈린 조각하고 김일성 조각… 광장에 세웠습니까. 광장에 세운 거에요 그래서?
이승택: 그거 저기 인민군, 인민 위원회 앞에다가…
윤진섭: 앞에다가 세우셔가지고.. 아 그래서 면제를 받으셨군요.
이승택: 네.
윤진섭: 아 어쨌든 지금 우리 분단 상황에서 참 그런 뼈아픈 체험을 직접 하셨는데 그럴 때에 북한에 계실 때 어릴 때 유년시절에 말이죠. 그런 민속놀이라든지 그때 체험했던 어떤 것들이 원형으로 이렇게 남아있다가 무의식 중에 남아 있다가 무의식 속에 바람작업이라든지 고드렛돌 이라던지 이런 것이 많이 이렇게 나중에 이렇게 응용이 돼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떠세요.
이승택: 그때는요 그 어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것이 50년대 중반에 문학에서 처음에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서 민족적인 그런 어떤 거를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 그런 거에는 전혀 그 의식하지 못했어요. 의식하지 못하고 단지 그저 학생일 때니까 고등학교 때니까 어린… 그 의식이 어리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모르고 단지 사실적인 거를 그린다거나 또 조각 한다던가… 저는 사실 고등학교 때 이미 시골이지만은 조각가 대우를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어떤 민족적인 어떤 그런 거 보다도 뛰어난 그 어떤 그 소질, 소질이 있어서 남에 나와서도 동강이던가 그런 기념비를 많이 세운 거예요.
그리고 그 전통이라는 것도 50년대 말, 50년대 말 그 ‘가장 민족적인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것을 그때는 굉장히 그 흠모했어요. 근데 그 오래하다 보니까 그것도 역시 그 저해요소가 굉장히 많더군요. 그래서 아주 그거 집어 던졌어요. 집어 던지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거 그거만 쭉 하고 주로 이제 여기 바닥에 있는 저게, 저게 63년도꺼지만요. 그 로프를 그렇게 참 무모한 아무것도 아닌 나도 그 내가 왜 한지도 모를 정도로…
그러면서 내가 작업이 그 때 당시에는 무슨 상징한다던가 설명한다던가 이런걸 많이 그렇게 저기 그리고 조각하고 그렇게 했는데 그 오브제 이런 거를 취급하면서 그 설명이라던가 무슨 그 상징한다던가 이런 거와 상관없이 참 그 무모하다고 할까 쓸데없는 그런 작업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윤진섭: 예, 예
이승택: 그러니까 그 소 불알 같은 거 라든가 뭐 혓바닥이니 뭐니 그게 그 왜 그렇게 거기에 관심을 가지냐 하면 내가 늘 얘기하듯이 나는 작품다운 것 보다도 작품이 될 수 없는 거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그게 바로 그런 그 쓸모 없는 그런 거에 그 관심을 정말 많이 갖고 작업하다 보니까 오히려 그 속에 예술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윤진섭: 그렇죠… 남들이 안 하는 거…
이승택: 그리고 그.. 역설적인 거 뒤집고.. 뭐 어떤 이런 거를 자꾸 하다 보니까 작품이 엄청 많아요. 그래서 아마 그 내 작업이 다양하고 굉장히 그 많은 양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윤진섭: 예, 예. 그러면은 이제 그 원래 그 말씀하시기를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좋으셨다. 그래서 이제 조각도 잘 만들었고 그림도 잘 그리셨다. 그림 잘 그리셔서 이제 고향에 마야.. 그 옷 벗은 마야 상을 그 이제 베끼신 거죠 카피를 하고.. 그리고 이제 보니까 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전에 제가 봤을 때는 쥐를 만들어서 붙이시고 화살이.. 화살표도 있고.. 그 어떻게 된 건가요 나중에 붙이신 건가요.
이승택: 아하 그건 그렇진 않아요. 어… 하하 그 쥐 얘기가 나왔으니까 얘긴데.. 아 이게 왜 이렇게 잘 안 나와.
윤진섭: 아 쥐… 몇 년도죠.
이승택: 아… 이게… 이 작품이…
윤진섭: 1997년 작이네요.
이승택: 어… 이거 쥐 작품도 내 작업을 자꾸 하면서 보니까 엉뚱한 보통 우리가 상식에서 벗어난 그런 엉뚱한 소재를 씀으로 해서 또 엉뚱한 그런 미술이 생기더라고요 그게. 근데 그 사실 내가 그 쥐를 그렇게 한 거는 그 마야...그림... 고향에 마야 그 그 그림에 쥐를 이렇게 넣은 거는 여기에다 그렇게 쓰듯이 결국 예술은 쓰레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그 쓰레기 하면은 그 쓰레기통에 쥐가 많이 끓잖아요.
윤진섭: 예
이승택: 그래서 그 예술을 격하한다고 할까 아주 어떤 그 부정한다고 할까 그런 저항하는 의미에서 쥐를 그렇게 썼던 거예요. 그래서 그 마야의 그림 속에서 쥐가 두어 마리 있는 것도 암만 유명하고 그래도 결국 예술은 쓰레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를 거기다 부가 한 거예요.
윤진섭: 예.. 예.. 예 그리고 선생님 이제 나중에 후반부에 들어 오면서 퍼포먼스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신데… 젊은 작가들하고 같이 실험 예술제 참가도 하시고.. 그런 걸 보면은 아.. 이선생님은 정말 연세를 생각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도 들거든요. 그만큼 이제 정열적이고 마음이 젊다 그렇게 이제 볼 수가 있겠는데 그런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시는 거예요?
이승택: 아.. 우선 그 예술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거 생각하는 거 또 글을 쓴다든가 전부 그 자기의 그 어떤 그런 그 의식 내적인 정신 이런걸 모두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자기를 드러내는 데는 그림을 그리든 조각을 하든 또 퍼포먼스 그런 것도 사실상 내가 그 퍼포먼스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고 불 작업을 한강에다 그 불을 질러서 떠내려 보낼 때 그게 그대로 퍼포먼스더라고요.
윤진섭: 그렇죠. 바람작업도 마찬가집니다.
이승택: 어.. 그 개념예술에서도 뭐 그 프로세스.. 말하자면 그 과정을 중요시 한다 그렇게 하지만은 그런 후에야 그걸 알았어요. 그 과정을 중요시한다 그 작품 보다도... 그래서 내가 그 과정이라는 게 내가 한강에 불질러서 떠내려 보내고 또 들킬까 봐 도망쳐 나오는 게 그대로 그냥 그 저기 과정이더라고요.. 과정이며 퍼포먼스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한강에서 연기작업 막 이렇게 하고 불지르고 그게 전부 다 퍼포먼스더라고.
윤진섭: 그게 그 퍼포먼스의 특징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이승택: 그러니까 아마 내 작업에서도 그 작업에 모토는 내가 그 속에 끼어 들어가있는데 무슨 그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지만은 그게 없는 거 보다도 내가 실제 들어가봄으로 해서 그 작품의 스케일이 나오더라고.. 그리고 그 작품의 내용과 내가 거기 서있음으로 해서 무언가 그 무언의 그 어떤 내용이 거기서 그 얽히게, 얽히면서 설명이 되더라고 그래서 작품마다 내가 이렇게 꼭 서있고 또 그거 그렇게 돌멩이 쌓고 그렇게 하는 게 전부 퍼포먼스더라고..
그래서 아 내가 퍼포먼스에 소질이 좀 있는가 보다 그러면서 남들이 그 퍼포먼스 이렇게 하는 거는 전부 다 누구 있는 거 같고 모방적인 이런 거지만 내가 실제 작업하고 그 속에 뛰어 들어가서 막 하는 것이 이거 이상 진실된 퍼포먼스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퍼포먼스를 아주 이제…
윤진섭: 그리고 그 이제 몇 년 도인가 털 작업을 많이 하셨잖아요. 머리털이라든지 머리카락
이승택: 머리카락
윤진섭: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작품을 많이 하셨는데 그 머리카락이 나오게 된 동기 좀…
이승택: 아… 그 참 머리카락은 사실상 어 그 젊었을 때는 내가 늘 그 소재를 모으는데 굉장히 그 관심이 많았죠. 그런데 그 머리카락은 60년대는 참 가난했잖아요 모두… 그래서 그 이발하는 것도 노상 영감들이 “이발하세요” 그 다니면은 노상에서 걸상에 앉아서 이발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노상에서 이발을 하고 그러면은 그 머리 난 머리가 좀 거세고 곱슬머리가 돼서 아주 많아요. 그러면 될 수 있는 대로 이발하는데 돈 자꾸 들어가고 하니까 바짝 깎아버려라. 그래서 이제 그 긴 머리를 바짝 깎아버리니까 땅에 떨어진 게 참 많아요.
그래서 이렇게 떨어진걸 보면서 이게 뭐 좀 작품이 될 수 없을까 그거는 이제 그 우리가 군대에서 손톱 머리카락 그 뭐 이렇게 자기의 그 뭘 남기잖아요.. 그래서 이 머리카락을 그러면서 다 주워서 보관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 이 머리카락으로는 이게 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내가 그 저 성곡미술관에 그 머리카락 작품이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게 63년 이거 거든요.
윤진섭: 63년도…
이승택: 63년도..이.. 머리카락 그런데 이제 머리카락 중에서도 요게 요렇게 보면은 이게 뭐냐 하면은 내 저기 음모입니다. 하하 그 음모를 그렇게 붙이니까 그게 마치 사람같이 조그맣게 그려 넣으니까 그게 이제 바람작품이 돼버려요..
윤진섭: 바람작품이… 바람하고 그 어떻게 연결이 되는 겁니까
이승택: 그거 하고는 이게 먼저겠지요.
윤진섭: 바람이…
이승택: 바람이 먼전가 그렇게 돼요
윤진섭: 네… 네…연결된다는 말씀이세요
이승택: 네
윤진섭: 그리고 그 보니까 또 한동안 또 유리를 이용한 작업을 많이 하셨죠?
이승택: 유리
윤진섭: 유리 모양을 이렇게 그 타원형 모양으로 무슨 마치 에.. 그…구근 마냥 이렇게 싹 나온 것 마냥 그런 형태의 유리..
이승택: 그거는..
윤진섭: 그거는 어떻게 나오게 된 거예요
이승택: 그 유리 작품도 내가 그 평소에 음… 그 새로운 소재를 많이 그렇게 그 개발했다고 그럴까 자꾸 관심을 많이 갖게 되는데 그때 그 유리 공장에 가보니까 유리를 막 뽑아내는데 아 너무 신선하고 좋더라고요 아주… 그래서 거기에서 내가 그 유리를 그 가마, 한 가마 사가지고 유리를 그 불면은 내가 그 자리에서 뺏어요.. 빼가지고 만든 게 그게 66년도인가… 어쨌든 60년대에 빼가지고 했는데… 그 속에다가 빨간 색도 넣고 뭐 이렇게 하고 했는데 그때 그 아마 유리작품은 다른 데서 볼 수 없었어요.
하여간 유리는 그 아마 최초가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그래서 그 어느 평론가는 어… 외국의 유리작품들이 그 많이 전시되고 그랬는데 그때는 그 년도가 80년댄가, 그렇게 그 많이 후에요. 근데 나는 벌써 66년돈가 64년돈가 벌써 유리작품을 대담하게 그걸 만든 거예요. 그게…
윤진섭: 그 유리작품.. 아아… 그 연대가, 연대가 66년 이렇게 나오는데…
이승택: 66년도죠
윤진섭: 이거하고 그 오지작업.. 오지작업하고 같이…
이승택: 오지가 먼저…
윤진섭: 오지가 먼저입니까. 그러면 그 오지작업하고 같이 한번 얘기를 좀 해주시죠.
이승택: 이게 유리…
윤진섭: 유리하고 오지작업..
이승택: 예
윤진섭: 유리를 그 밧줄을 감아서 넣으셨네요. 이 형태는 그 선생님이 직접 이렇게…
이승택: 그렇죠.
윤진섭: 드로잉을 해서 주면은 공장 사람들이 만든 거지요
이승택: 아니예요. 이거 꼬다리 전부 내가 만든 거예요
윤진섭: 아니 아니 공장 사람들이 유리를 불어 만들 거 아니에요 기술자들이. 선생님이 직접 불어서 만들진 않잖아요. 형태를 직접 만드셨어요.
이승택: 불면은 내가 그 꼬다리를 잡아당긴다니까
윤진섭: 아.. 그 꼬다리를 잡아당겨서 하신다는 거군요. 오… 그런 시스템이 있구나
이승택: 그.. 저기 유리를 불면은 동그래요. 동그란건데 불면은 내가 그 꼭지를 잡아당겨서…
윤진섭: 아…예,예 그래서 이거하고 그 오지작업… 오지작업도 이제 형태가…
이승택: 이것도 나는 그때 당시 이게 60년대 그때 당시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그거를 흠모할 때 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것이 전통적인 것이 무언가 그러면서 따져보니까 그 우리나라는 돌… 돌하고 오지가 특별하더라고.. 그래서 그 오지를 현대화 하면은 이게 그 세계적인 것이 될 거다 해가지고 그때 이 오지작품… 저기 저 있잖아요. 오지작품을 했어요 쭉. 지금 이렇게 계속..
윤진섭: 예… 오지작품..
이승택: 그게 그 62년.. 63년 그렇게 될 거예요. 이거를 그때 작년인가 런던 거기에서 심포지엄 할 때에 어… 이 작업을, 이 작업은 참 놀라운 작업이라고… 그때 당시 오지작품은 최초…
윤진섭:예… 그 다음에 이제.. 선생님 그 아주 세밀하게 그리는 그 재주가 그 묘사력이 있으시잖아요
이승택: 예
윤진섭: 그래서 때로는 대지작업과 같이 대지에 나가서 큰 작업을 하면서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진을 찍어서 그 위에 그림을 남기기도 하는 그런 방법도 쓰시잖아요. 개념을 이렇게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승택: 아…
윤진섭: 사진을 그 확대해가지고, 확대해가지고…
이승택: 그…런 작업은 그때 그… 윤진섭 교수님이 그때 그 문화진흥원에서 작업할 때에 그 사진 위에다가 이끼 낀 그거 이렇게 그거 나오고 사진을 그거 거기다가 그렸다고 그때 인정 안 했었어요.
윤진섭: 아니 그게 인정 안 했던 게 아니고 그거를 아 그거는, 그거는 선생님 인정 안 한다는 게 아니고 그거를 이런 도록이나 책에 할 때에 프로젝트라고 밝히시면 그거는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그렇게 될 경우에…
이승택: 글쎄… 밝혀야 되든 어쨌든 간에
윤진섭: 아니 그런 방법은 많이 쓰는데… 상관 없어요
이승택: 그때는 그 작업도 저기 그 연필공장에 나무 이렇게 쌓은 거 있잖아요. 그것도 기존에 있는 어떤 구조물에 내가 가서 쓰면은 그것도 내 걸로 바꿔 버리는… 반드시 작가가 작가의 손을 거쳐야만 작품으로 인정해줬어요 그게. 지금은 훨씬 그런 거 무의미 해졌다고…
윤진섭: 예… 예
이승택: 이제는 그 작품 그 자체를 가지고 이제 따지게 되는데.. 그러니까 어 내가 그 어 하늘에 나는 지구에다가 메달아 넣은 거 이런 거는 하나의 콜라주 형식의 그런 작품을… 지금 저 뒤에 있는 저 작업도 전부 그 지구를 갖다 붙인 겁니다.
윤진섭: 그렇죠… 예,예 요즘은 컴퓨터에서, 포토샵에서요 그런 거를 너무 많이 해가지고요. 굉장히 보편적인 방법인데… 선생님 그때만해도 그 아날로그 시대 때 그 어떤 상황 연출이었거든요. 저는 그걸 말씀 드리는 거예요. 뭐냐 하면 그거를 얼마든지 그 어떤 매체로써, 방법론으로써 그거는 아주 활용이 될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사진술이 발명됐고 확대술이 발명됐고 그 다음에 거기다가 페인터가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거를 그려 넣어서 어떤 새로운 상황의 문맥으로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훌륭한 예가 된다는 거지요.
이승택: 바로 그건데…
윤진섭: 바로 그건데 선생님은 이제 뭐냐 하면 오해하시는 부분이 그거를 명백히 프로젝튼데 그거를 어디다가 도록이나 어디다가 발표하실 때는 그거를 프로젝트라고 명백히 명기 하시면 그거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서 틀리다 라는 얘기죠.
이승택: 어쨌든 그런 그 처음에는 굉장히 그런 말하자면 그… 두려워했지요. 그 조작한다던가 사진을 조작한다던가…
윤진섭: 그거는 조작이 아니죠
이승택: 이런 거를 굉장히 두려워하고 또 그런 거를 인정이 되지 않고 그랬을 때에 나는 아 작가가 사진을 그려 넣든 그 위에 그려 넣든 무슨 상관이 있나.. 그래서 막 한 거예요
윤진섭: 그런 게 문제가 아니고요 그건 방법론으로썬 아주 훌륭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밝히지 않았을 때는 그런 착시가 실제로 받아들여질 때에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는 거지요. 이제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선생님께 여쭤 본 거구요. 그 다음에 기구를 실제로 바람을 넣어 가지고 거대한 풍선을 대중들과 같이… 대중들하고 이렇게 어린애들이 참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서울 국제 행위 예술제 때도 인사동에서 하시고 여러 차례 이제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을 하게 되셨습니까.
이승택: 어… 사실은 그 미술이라는 건 현대미술은 점점 더 난해해지고 곤욕스러워지고 그러는데 나는 그 미술이 될 수 있는 대로 그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을까 그래서 그 어… 그때 그 저기 어 저기 윤교수님도 그때 거기 있었지만…
윤진섭: 제가 감독을 했었죠.
이승택: 그 어디지 천안이 아니고 수원, 수원성에서 그 때 할 때가 그 최초인데 그때 그 나는 그 애들이 그 어떤 축제에 그렇게 많이 올 거다 그렇게 애들한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게 뭔가 그러면서 그 지구를 생각해 낸 거예요 그러니까 미술이 그런 사람들한테 어린이들이나 뭔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그런 거를 개발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윤진섭: 그… 선생님 지금 아까 말씀 좀 하셨습니다마는 선생님 세대가 공통적으로 겪은 분단상황 또 특히 선생님 이제 지금 북녘 땅이죠. 지금 이제 정권이 서로 다르게 들어섰는데 고향에서 이제 말하자면 남한으로 넘어오시고 여기서 지금 고향을 분단상황 때문에 못 가시는 상황이시잖아요.
그렇다 보면은 이 우리 한국 근 현대사에 있어서 그런 어떤 이념 문제 이런 거에 있어서 몸소 체험하신 세대라고 할 수가 있는데 뒤에 보면 저 작품 있지 않습니까. 하나는 보면 검은 인공기가 있고 하나는 태극기가 있고 그래서 저런 작품을 이렇게 창작하시게 된 배경이 뭔지 또 이 시대에 대해서 이제 체험 세대로써 이제 전쟁 체험 세대로써 어떻게 바라 보시는지 예술과 관련해서 말씀 좀 해주시지요.
이승택: 어… 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어 저는 이 공산주의자를 그거를 그 생겨나고 그렇게 한 거를 전부가… 내가 이런 말 까지 했어요. 어… 무식하면은 가난하다 가난해져요. 가난하면은 공산주의자가가, 좌파가 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은 실제 물론 그거 공산주의의 이론에 대해서 저기 뭐 내가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은 어쨌든 가난한 사람들이 공산주의라고 이렇게 하면은 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눠먹고 계급이 없는 사회다 그렇게 모두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공산주의처럼 계급이 심한 나라가 없습니다 아직은… 그 얼마 전에 죽은 그… 최,최,최명신..
윤진섭: 최명신 장군
이승택: 그 장군이 어… 그 평양사람인데 평양에서 김일성하고 잘 알아요. 그래서 김일성이가 나하고 같이 있자 이렇게 손을 잡는 거를 뿌리치고 나온 이유가 어… 그 소련군 대위 이제 장교인데 장교가 공산주의는 말로는 평등하다 계급 없는 사회다 해놓고는 그 식당 변소 호텔 계급이 그렇게 철저할 수 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거지. 그래서 그 이야기 듣고 아… 공산주의는 이게 아니구나 그러면서 그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월남했답니다.
그러니까 그 공산주의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북에서 그 체제에서 체험했잖아요. 철저하게 평등하다고 그러면서도 엄청난 계급을 가진 게 공산주의입니다 원래가. 그래서 공산주의는 어… 이 지상에서 어… 어떤 그 평화 보다도 어떤 이런 곤욕스러운 거를 이렇게 아주 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못살게 구는 그런 아주 나쁜 주의라고 생각해서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합니다.
윤진섭: 그러니까 그 작품에 대해서 설명 좀…
이승택: 그러니까 어…. 그런 그 방공적인 어떤 그런 게 그 철저한 젊었을 때 내가 그 졸업 작품도 이렇게 그 가시 철망으로 이렇게 감은 것도 공산주의 그 소련하고 미국하고 그때 그 싸움이 굉장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 약소국 그리고 또 이북에서 쫓겨 나와서 생활하면서 공산주의를 어떡하면 더 이렇게 그 저기 뭐랄까 어떤.. 뭐 이런 거 해야 되나…저주할 수 있는가 그리고 보니까 내 스스로가 어떤 DMZ…DMZ라던가 굉장히 작품이 많아요.
윤진섭: DMZ…DMZ에 관한…
이승택: 하여간 이 작품이 내가…
윤진섭: 58년도 그 철사 작품도 청색과 빨간색을 칠하셨죠.
이승택: 그렇죠.
윤진섭: 그게 어떻게 보면 남한하고 북한의 상징 같은데…
이승택: 이것도 보세요 이게 거기 저기 그 어… 성곡 미술관에서 이게 한 건데 이게 그 6.25때 비참했던 그거를 한 겁니다.
윤진섭: 그러네요 이 다리…
이승택: 평양 그 피난민들 이렇게 하고 어쨌든 그 북쪽에서 쳐들어 와서 어쨌든 우리 민족이 이렇게 저기 뭔가 고통 받고 있는 거… 그리고 사실 이런 얘기가 나와서 얘기지만 지금 현재 여기 표 같은 이런 게 쫙 있는데 6.25 전쟁으로 해서 남북간의 어떤 군이든 민간인이든 삼백만 명이 죽었답니다 그게. 그리고 삼백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기고 그런데 이 원인은 김일성이가 저기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건 다 알지 않아요. 그런데 요새 교과서 거기에 보니까 좌파 계통의 그 사람의 주장은 어… 김일성은 그 역사에 김일성은 항일 투사 항일 혁명가다 이렇게 되어 있고 박정희는 친일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내가 보기에는 친일파든 뭐 저기 혁명가든 6.25때 삼백만 명 내지 거의 육백만 명의 어떤 한 민족을 구렁텅이에 넣은 거는 김일성이다 이거예요. 거기에 대한 거는 이런 방법도 없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 좌파들의 그 어떤 주장이랄까 그런 거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그런 어떤 그런 6.25라든가 어떤 남북관계 이런 거를 작품으로 굉장히 많이 남겼어요.
윤진섭: 네… 반공주의자의 시각에서 그렇게 작업을 하셨던..
이승택: 예술은… 지성인도 그렇지만은 한 사회의 불의라던가 그런 거에 저항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 예술가로써 그런 불의를 보여 주는 거죠.
윤진섭: 네…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선생님 또 이제 뭐… 그… 남근을 크게 확대해서 만들고 그걸 갖다가 뭐… 남성 심볼을 또 밧줄로 감고 그런 작업도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그 우리의 전통 민속 뭐 이런 거… 어떻게 보면 또 에로틱한 부분을 사진으로 확대한다든지 인체의 한 부분을 말이죠. 그렇게 해서 미고 다니고, 메고 다니고 하는 이런 작업이 있는데 이런 약간 좀 에로틱한 취향도 좀 있으신 거 같아요 보면은…예…
이승택: 아… 사실상 그 성 문제는 어떤 그런 그 에로틱한 그런 것도 있기도 하지만은 이 성문제는 어… 인간 동물이라던가 자연의 그 어떤 것의 근본이라고 봐요. 그러니까 그 근본적인 그 어떤 그런 거를 대부분의 그 사람들은 그 이렇게 덮어두고 뭐 성관계 뭐 이렇게 되면 다 이렇게 전부 가리고…
윤진섭: 가리고… 특히 그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죠 눈길적으로…
이승택: 나는 그 성에서 생겨나는 그 어떤 에로틱한 어떤 그런 거 어떤 거 보다도 근본적인 어떤 그런 그 어떤 생리학이라 할까 그 어떤 그런 근본적인 거를 나는 자꾸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게… 그래서 성이 가지는 어… 그 어떤 미술에서 우리가 그 옛날부터 그 누드화나 뭐 이런 거 많이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그런 거와는 조금 뭐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고 예술에서는 성문제를 너무 도외시 할게 아니라 철저하게 그 어떤 거를 표현할 수 있는…
윤진섭: 그런 금기된… 또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전통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유교가 지배해왔던 그 이런 사회에서는 상당히 그 허위의식 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의식을..
이승택: 맞아요. 역시 평론가….
윤진섭: 그런 거에 이제 선생님은 도전을 하신 거 군요
이승택: 예 맞아요 아주 그 아주 정말 적절하게
윤진섭: 사회적 금기에 이제 하나의 전위적 시각에서 그거에 도전해왔다. 예,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조각가로써 오랜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가령 올림픽 조각 공원에 큰 기와집을 연상시키는 그런 그 큰 구조물도 만드셨는데 그런 퍼블릭 아트(public art)를 실천해 오시면서 품었던 어떤 이상 나는 이렇게 하고 싶은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던지 정책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던지 이런 문제로 해서 좌절하거나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죠.
이승택: 아… 그 기와작품은 사실 내 대표작입니다 그게 어… 기와 작품을 저는 먼저 그 얘기했지만 어…한 예술가가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걸 제작하고 뭐 이런 그런 거에 이제 몰두하게 되면은 어…그 이상한 어떤 그 새로운 재료를 많이 쓴다고 그랬죠.
그리고 그 어떤 철학에서 그 역설적인 거 그런 거에 꽉 차 있다고, 꽉 차 있다보니까 어… 기와가 지붕 위에만 꼭 있을 필요는 뭐 있겠느냐. 그래서 기와가 지붕 위에서 내려와서 대지를 감쌀 수도 있다. 그 대지를 감싼다 하는 거는 인간을 존중한다는, 인간을 존중하는 어떤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어요. 그래서 그 기와는 땅에서 그렇게 그 땅을 그렇게 덮어서 이렇게 제작했다는 거는 어쨌든 간에 그 기와에 어떤 그런 위에 어떤, 그 지붕 위에만 있던 것이 땅에도 내려올 수도 있다.
사실 그 기와작품은 그것도 세계에서 유일한 겁니다. 그래서 그 어… 아트 아시아 퍼시픽(art Asia pacific)에 그 애슐리가 자기는 내 작품 속에서 기와 작품이 젤 마음에 든대요. 그 세계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기와작품을 그렇게 몇 갠가, 여섯 갠가 다섯 갠가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제 그 김유연, 김유연…
윤진섭: 김유연씨
이승택: 김유연씨가 우리 집에 와서 센트럴 파크에 그 기와 작품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가 그걸 이렇게 뭐 해서… 그래서 아 그러냐고 그러면서 내가 그 아트 아시아 퍼시픽에 있는 애슐리한테, 애슐리가 젤 좋아한다 그러니까 자기도 그 해설 위원을 잘 안대요. 그러니까 그 센트럴 파크 거기에다가 그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재수 좋으면은 세우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비용은 한 50억 든다고 했더니 어쨌든 그렇게 가서 추진을…
윤진섭: 이제 한국에서는 그 이렇게 선생님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힘든 작품들이 좀 있었죠 그 동안. 스케일 이라던지 뭐 제작 비용 이라던지 이런 문제로…
이승택: 거의 나는 실현 불가능한 거 보다도 그것도 하나의 한 55년간을 쭉 하다 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생각하다 보니까 무슨 내 밖의 그런 그 정말 뜻을 이룰 수 없는 그런 거는 하지를 않았어요.
윤진섭: 아… 구성을 할 수 없는 그런 거는 실현불가능 하면은 그건 아예 하지를 않으셨다.
이승택: 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것도 내가 좋아서, 좋아서 남이 생각하던 말던 내가 좋아서 주로 하는 작업이라고 보면 돼요.
윤진섭: 그러면 뭐… 앞으로 요즘은 이제 백세 시대도 얘기를 하는데…
이승택: 네?
윤진섭: 백세시대를 얘기를 하잖아요. 앞으로 하시고 싶은 분야는 어떤 것입니까 미술에서…
이승택: 아하… 그게 그렇게 뭐 뜻대로 되나요.
윤진섭: 그래도 뭐 이거는 못했는데 앞으로는 좀 해보고 싶다.
이승택: 나는 그렇게 정말 누구 보다도 굉장히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3년 전인가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그냥 마비가 되고 막 그러다라구요. 그러니까 어… 역시 그건 천운에 맡길 수 밖에 없어요.
윤진섭: 그래서 이제 뭐 앞으로 퍼포먼스라든지 이런 거를 젊은이들하고 같이 이제 물론 하시겠지만 하하…
이승택: 아 이제는 뭐…
윤진섭: 이제는 힘드세요.
이승택: 아… 뭐 저절로 이제 은퇴는 아니지만 어떤 뒤로 물러 설 수 밖에 없어요.
윤진섭: 아… 이제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근데 정리도 이제 좀 하셔야 될 거 같고…
이승택: 네
윤진섭: 이제 정리도 이제 슬슬 좀 하셔야 될 거 같고요.
이승택: 네 그렇죠
윤진섭: 그렇죠. 네 그리고 그 동안 벌이신 일들…
이승택: 네 너무 많아가지고…
윤진섭: 정리를 어떻게 하느냐 이게 참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자료정리부터 시작해서 작품정리 또 그리고 물론 이거는 뭐 정리문제는 물론 미술사가나 또 어떤 비평가들의 몫이기는 합니다마는 어떤 아카이빙 이런 것도 좀 신경을 쓰시고요. 끝으로 뭐 좀 후학들이나 뭐 앞으로 뭐 또 정리하면서 이제 이제 노경이신데 지난 58년의 활동을 어떻게 한 말씀 마무리 말씀해주시죠.
이승택: 옛날은 그래도 그 예술을 위해서 뭔가 애 쓸려고 그렇게 했는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돈이 되지 않는 거는 아예 그냥 관심도 없어요. 그리고 어… 공부를 좀 해야 하는데 공부 안하고 어떻게 하면 돈이 이제 생기는가 그런 거에만 몰두 하는 거 같아요. 우리 시대는 돈하고는 상관 없잖아요.
윤진섭: 그렇죠 네.
이승택: 그냥 얼마나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좀 그 젊은 사람들이 좀 자기 일에 너무 그 어떤 경제적인 것을 내세우지 말고 어... 보다 넓게 좀 공부를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뭐 미술에 관한 게 아니라 인문학하고 그 어떤 다른 이런 거를 철저하게 공부를 많이 하면은 자기가 무엇을 할건가 라는게 스스로 나는 그게 답이 나온다고 봐요.
윤진섭: 지금까지 자본이 흉흉하는 이러한 시대에 또 상업주의가 번성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바람직한 예술가의 상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일생을 역설의 미학 또는 [?반항의 정신]으로 작업에 매진해오신 이승택 선생님과 작업실에서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앞으로 이승택 선생님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이 말씀이 후학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행 : 윤진섭 박사
카메라, 조명 및 음향 감독 : 엘비스 김
영상 편집 : 엘비스 김
자막 및 번역 : 김소영
감독: 밥 젠슨 박사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