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xhibition walkthrough (~ 1 minute)]

이건용: 아유 어서오십시오

이인범: 축하드립니다.

이건용: 아이구 이런 전시회에 오시다니, 정말...좀 한번 좀 소개 좀 해드릴게요. 이거는 신체 드로잉 76-1. 이거는 신체항인데, 아시죠? 나무를 갖다가...

이인범: 1971년에 만든 작품...

이건용: 예, 1971년에 이제... 세계 최초로 이제... 자연에 기생한 예술, 말하자면은... 자... 야, 나무야. 예술에 대해서 네가 뭐라고 질문하고 있지? 자, 나는 나무에 매달릴게. 자, 자연에 기생한 작가! 자연에 기생한 작품! 신체항! 2005년 작품...

이인범: 2005년.

이건용: 여기...뭐가 나와 있었던 데더라? 2007년이네.

이인범: 2007년.

이건용: 이 쪼가리들은 역시 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쪼가리들... 남은 거 갖다 버릴 것들을 활용해서...

이인범: 오늘은 2014년 9월 15일 금요일입니다. 저는 지금 이건용 작가님을 모시고 작품세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국립현대 미술관 과천관에 나와 있습니다. 마침 이건용 작가께서는 국립현대 미술관이 기획 개최하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 시리즈에 전시의 일환으로 달팽이 걸음 이건용전이라는 타이틀 아래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개최중에 있습니다. 저는 상명대학교 교수로서 재직하고 있으며, 큐레이터와 평론가로도 활동 중에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건용 작가님을 모시고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건용: 아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인범: 선생님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우선 먼저 선생님 작품세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곳, 시기, 그리고 성장 환경 등등에 대해서 여쭙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건용: 아... 저는 뭐 태어난 거는 이북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세살 때, 1945년도에 이... 남쪽으로 내려왔죠. 외가가 서울이었기 때문에 아버님은 이미 목사님이셨지만은 그때 당시에 신학대학을 다니시기 위해서 오래 전에 또 여기 서울에서 공부하고 계셨었습니다.

이인범: 선생님 성장기에 특별히 미술을 전공하게 된 그 경험이나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이건용: 책이라던가 사물을 갖다가 이렇게 자세히 보는 습관이 있었어요. 어, 그거는 뭐 눈이 나쁜데, 눈이 나쁘고 좋은 거는 상관이 없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어... 배제 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중학교 때 이미 여러가지 그 표현에 대한 방법이 있다는 걸 갖다가 교과서 책을 보고, 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 생각 여하에 따라서 이렇게 유파라던가 뭐 그리는 방법이 다르구나. 그거를 그 때 확인을 했습니다. 내 말이 맞다.

다음에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고등하고 2학년 때, 논리학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 논리학 시간을 통해서 서양의 철학을 또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 제 세대는 어... 그렇잖아요. 그 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을 빨리 청산을 해야 근대화 된다. 새마을 운동이라든가 뭘 여러가지가 그런 분위기였는데, 그런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한쪽으로 서양의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은 저로써는 양쪽을 다 제가 파악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좋게 생각했습니다.

이인범: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하시게 되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절에 경험이나 환경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용: 우리 저 뭐야 실기를 담당했던 교수님들은 조금 이제 어느 정도 벗어나는 일들을 또 하고 있기 때문에 괴짜다 그렇게 또 저를 생각했는데, 에... 역시 뭐 기초적으로 1학년 때는 석고데상을 했고, 그 다음에 2학년 때부터는 또 유화를 했다가 전공을 또 기초를 또 하고 3,4학년에 올라가서 자유롭게 하는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죠.

이인범: 먼저 선생님의 데뷔작이신 1971년 작품, 신체항에 대해서 말씀을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신체항 작품은 선생님의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이후에 거듭, 이번 전시까지 발표되고 있고, 선생님의 작품세계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그 성립과 관련한 전후 사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용: 저는 이제 그...현상학이라던가 언어분석철학 같은데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괴짜였어요. 특히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같은 거는 분석철학 같은 거는 상당히 이제 경이적으로 이제 받아들인 측면이 또 있습니다. 에... 그래서 이제 신체항이라는 제목이 이제 붙었는데, 그 제목은, 우리가 ST 멤버라고 그룹을 조직해서 스터디도 하고 여러가기 그런 활동을 했던 미술학회라는 것을 조직을 했는데, ST 미술학회라고요. 거기에서 이유한씨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이라는 그 논문을 갖다가 우리가 [?이일] 선생님의 번역에 의해서, 그때는 그러니까 복사기가 없었어요. 제록스기랑 후렉스 뭐 나온게 있었는데, 그건 나중 일이었고, 그때는 이제 에...그 가리방이라고 등사판을 굵어가지고 복사해서 쓰는 그런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텍스트를 만들어 가지고 이유한씨의 논문을 갖다가 우리가 토론을 하고 그랬는데, 거기에 관계항이라던가 신체항이라던가 맬로뽕띠 이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오는 언어였는데, 저도 역시 거기 이제 동감하는 부분이 있어서 어... 나무를 갖다 지층째 거대한 이 나무를 갖다가 전시장에다 떠다 놓는 거였는데, 그 제목을 신체항이라고 붙였습니다. 아... 아이디어는 이미 60년대 말에 내가 아이디어는 가지고 있었는데, 나무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그때 당시 경부 고속도로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뿌리채 뽑혀져 있는 나무 하나를 발견하고 그거를 내가 얻어다가 쓰면서 그것을 제작하게 된거죠.

뭐냐하면 에... 모름지기 작품이라는 것이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개념 보다는 에... 자연물 중에서 그 부분 중에서 어떤 구조로 취해서 전시장에다 옮겨 놓느냐 하는 이동의 문제, 그리고 문화 공간이라는 것 안에 만들어 놓은 것이 놓여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아이디어에 의해서 자연의 일부가 놓여짐으로써 의외의 것이 놓여짐으로써 보는자로 하여금 충격적으로 더 긴밀하게 만나는 그런 구조를 제가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던 거죠.

이인범: 1970년도에 한국 미술협회전에 출품을 하신 작품이시죠?

이건용: 그렇죠.

이인범: 이 작품이 다시 1973년에 파리 청년작가전이었습니까?

이건용: 1973년

이인범: 1973년에 다시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죠?

이건용:

이인범: 그 70년도 작품하고 73년도에 파리에서 전시한 작품하고 내용적으로 개념적으로는 같을 거 같은데, 양상은 이런 저런 다른 파장을 낳았을 거 같은데 파리 비엔날레 그...

이건용: 사실.. 그 당시에 한국의 한 작가가 가가지고 그것도 어... 파리 시립미술관에다가 그 거대한 나무를 갖다가 지층째 떠다가 놓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근데 제 생각에는 그게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결과 적으로는 파리 비엔날레를 총책으로 하시는 예술 지금 얘기한다면면 총 예술 감독이신 조르주부다이유라는 이분이 국가에 건의를 해가지고, 파리에 국립공원에서 하나를 기증 받아서 어... 그 작품을 제작하게 됐던거죠.

근데 한국의 나무는 사철이 분명하고 하기 때문에, 그 자라는 모양도 약간 굴곡지게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 있는 나무는 그냥 곧장 올라가는 아주 스마트한 그런 나무더라고요. 그 오히려 나는 좀 이렇게 좀 휘어서 올라가야지 멋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그렇게 서양의 나무를 가지고 그렇게 또 해 놓은 것도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인범: 1971년에는 신체항과 더불어서 어... 지각의 오차라고 하는 작품도 발표해 주셨죠? 이어서 관계항 시리즈가 이어서 나오는데 신체항과 관계항이라고 하는 작품의 차이는 어떤 것이고 거기에 일관되게 흐르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용: 지각의 오차라는 것은 현상학을 갖다가 공부하면서 지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에... 물론 이제 그 전에 뽕띠 그 선배들이 생각했던 것도 마찬가지고 멜로뽕띠도 지각에 대한 문제가 한 대안이었습니다. 뭐냐하면 철학이라는 것이 사유를 통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 또는 세상 안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써의 어떤 사유, 그것이 뭐냐라는 것을 갖다가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지각에 대한 문제, 관념으로 제시가 아니라 직접 만남을 통한 어... 그 지각을 통해서 그러한 타입의 사고 방법,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과제였어요.

근데 저는 그 공부를 하면서, 장이라는 그 공간 안에 대상을 갖다가 지각한다는 것이, 그것이 전부다는 아니다. 거기에도 방향과 위치와 경우에 따라서 다른 지각을 갖다가, 지각의 오차가 생길 수 있다라는 그런 측면에서 어... 공부를 하면서 옆에다가 이렇게 스케치를 해 가지고 제작했던 작품이지요.

이인범: 신체항이나 관계항 같은 1970년대 초기 작품들을 살펴 보면은, 어...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근본적인 관심사가 예술이나 혹은 회화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갖고 계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와 관련해서 선생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건용: 저는 이제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이제 그런 경향이 있었고, 그 다음에 이제 중고등학교도 역시 마찬가지고. 에... 미술이라는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뭐냐, 거기에 대한 질문을 끊임 없이 한거죠. 그리고 또 그 질문을 갖다가 결정적으로 많이 하게 된 이유는, 우리 어머니 때문에 그래요, 우리 모친 때문에. 왜그러냐 하면, 너는 이 세상에 살면서 쓸모 있는 인간이 돼라. 그리고 이 쓸모 있는 인간의 쓸모 있는 일을 통해서, 의사가 돼라.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가 간호사였으니까 의사가 최고야. 그래가지고는 너는 의사라 돼라. 근데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러면 쓸모 있는 일이라는 게 뭐냐. 자꾸 생각했어.

근데 예술하고 비교해 보고, 그때는 이제 그림하고 비교해 봤는데. 이거는 사진사가 대상을 갖다가 기록해서 놓는 것처럼, 그리는 기능 왜에는 전부 다 쓸모 없는 거야 이게. 자기 취미고, 어떻게 보면은. 그리고 또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유희적인 측면이 너무 많고. 그래서 어머님이 생각하는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측면하고 비교해 볼때는 상당히 차이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한 개념을, 하나의 명제를 내가 만들었는데, 예술은 쓸모 없는 일을 하는 일이고 그 일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일이다. 그런 명제를 내가 세웠어요.

이인범: 그 이른 나이에 그런 깨달음을 얻으셨네요.

이건용: 그렇죠. 그렇죠. 왜 그러냐하면은 집요하게 의사가 되라고 그러면서 쓸모있는 인간이 되라고 그러는데.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가 심각했죠. 굉장히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제 논리학도 배우게 되고, 여러가지 책을 이제 많이 보게 되고, 또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어요. 우리 아버님은 그때 당시에 만권의 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청량리 바깥에 홍릉에 살고 있었는데, 그래서 이사를 못 할 정도 였어요. 딱, 내 생애에서 이사를 갖다가 우리가 가족과 같이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한 거는 딱 두번 입니다. 책 때문에.

그래서 마지막 이사를 한 것이 서강대 옆에 마포로 이사를 한 것입니다. 그때 책은 세 트럭이 갔고, 가득 책만 싣어가지고, 그리고 한 트럭은 세간살이를 실은 트럭이었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전부다 아마 판검사가 오는가 보다. 권력 가진 사람이 책이 많다, 이렇게 생각한 모양이예요. 그래가지고는 앞에 양옥집 1,2 층에는 책이 가득 차 있었고, 뒤쪽 단층 양옥집은 우리가 살림을 어머님이 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책이 많았기 때문에, 저는 중고등학교때부터 지속적으로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고, 책만 보게 되다 보니까, 이 사유에 대한 것이, 예술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제 뭐냐 인생이라는 것이 뭐냐 이거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서...

이인범: 그러니까 제가 질문 드렸듯이 그렇게 전격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저렇게 예비되어 있었군요.

이건용: 그렇죠. 그게 누적되어 온 거죠.

이인범: 특히 무제 시리즈나 관계항 시리즈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취하고 있는 인위적 태도 혹은 인공성 등등에 관한 반성 같이 저에게는 읽혀지고요. 포 시리즈 연작은 그 어... 회화에 대한 즉, 일루전에 관한 어... 비판적 성찰로 읽혀지는데, 이와 관련해서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건용: 그러니까 저는 전반적으로 아... 서양, 당대 서양 철학이나 또 동양의 노장 사상이나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뭐냐하면 자연의 만물을 갖다가 내가 이용을 해가지고, 작가가 개입할 부분만 개입을 해서, 최소 단위의 접근을 통해서, 작업을 통해서 예술로 제시하는 거나, 또... 서양 철학이 아... 점진적으로 어... 사실 자체, 세계 자체에 접근하려고 하는 것이나, 인간이 주관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는 것을 떠나서 대상과 사유하는 사람의 주체가 같이 만남을 통해서, 지각을 통해서 그 철학을 갖다가 전개 시키는 것이나 결국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현상학적 측면에서 제 무제 시리즈의 작품에 접근했다고 본다면은, 이 삼라만상 특히 이 나무들이나 식물들이 자라는 자연스러운 형태를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 다음에 무언가에 또 접근하려는 인간의 어떤 욕망을 또 있는 대로 인정해 주는 거예요. 그 두 개가 만나서 무제 시리즈가 이루어 진거죠. 마찬가지로, 포 시리즈 작품도, 천 시리즈 작품도 결국은 일루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본다는 것은 한쪽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속는 것이 거든요. 왜냐하면 일루전 잔상을 갖다가 우리가 끊임 없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볼 때는 회화라는 것은 그 안에 걸어 들어갈 수 없고, 손을 집어 넣어서 휘저을 수 없는, 그런 착각의 일루전 공간인데, 그것은 결국 뭔가.

그래서 천을 늘어뜨려가지고, 끈으로 묶어 놓고, 에... 분무기를 통해서 물감을 뿌려서 마치 먼지가 앉은 것 처럼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것을 완전히 펴 가지고 제시한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는 가운데다가 붉은 선을 갖다가 직선을 그은거죠. 보세요. 만약에 그 천이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일루전 적으로, 그 천이 우겨져 있는 부분이라면은, 거기 그은 선은 역시 휘어졌을텐데 직선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천의 가장자리도 직선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서 회화라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끊임 없이 우리한테 회화적인 요소들를 통해서 착각을 일으키려는 일루전적인 일이다라는 것을 제가 보여준거죠.

이인범: 당시에 이제 1960년대 후반이나 70년 대 초, 서구의 미니멀리즘이나 혹은 일본의 모노화의 어떤 영향과 교섭 같은 것을 부정할 수 없겠죠?

이건용: 그럼요. 문화라는 것은 끊임 없이 영향 받고, 영향을 통해서 한 세계를, 인간의 어떤 세계를, 문화라는 세계를 이뤄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있는 대로 다 얘기해야 합니다. 저는 한쪽으로 당대 70년대에 일어났던 일본의 그런 어떤 그 모노화, 물파 작가들의 이론과 그 현상에 대해서 강한 영향을 받았고, 또 이태리에 그때 당시에 그 비슷한 [?아르콜레포게라]라는 운동이 있었는데, 그거는 이제 제가 정보를 얻지 못하고, 접할 길이 없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도 당대에 나오고 있었더라고요.

이인범: [?세끼에로보라던가 쓰라기쇼 같은] 작가들을 직접 만나기도 하셨습니까?

이건용: 아... 그 후에 일본 현대 미술전이 한국에서 열릴 때 오고 그러면 만났고, 특히, 그 수가라는 작가는 1973년도 파리 비엔날레에 같이 출품 했어요. 거기서 만났어요.

이인범: 그런데 이제 선생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그 현상학의 문제, 혹은 뭐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의 문제 등등 철학적 백그라운드의 사유의 힘을 갖고 미술작품을 그렇게 추진한 아주 보기 드문,한국에서 보기드문 어떤 예를 보여주신 작가로 보이는데, 그...지금까지 하시는 작업들의 이런 저런 양상 중에서 그것만으로 초기의 양상만 보면은 분석철학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쉽게 확인되는 것 같지는 않거든요? 신체항이라던가 관계항 같은데서는?

이건용: 사실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의 사유의 태도라는 것은 이심전심이라는 게 많았어요, 그리고 또 특히 예술가가 또 얘기 많이 하면요. 야 작품으로 얘기해라 왜 말로 예술을 하려고 그러냐, 이런 말하자면 반발이 많았고, 근데 끊임없이 이건용 혼자 떠들어 댔는데, 그때 당시도. 뭐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언어를 쓰고 있는데, 그 언어의 치료에 대한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 사람은. 왜냐하면 말에 대한 위력이 상당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사물과 언어를 떼어 가지고, 언어 자체를 갖다가 논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걸 또 회화 공간 내지는 사진으로 찍은 공간 정도로 언어를 갖다가 대입해서, 토톨러지라는 언어를 써가면서 수학용어인데, 했던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회화를 갖다가 회화로써 평면으로써 증명해 준 것도 비트겐슈타인이 했던 기법을 쓴거죠. 뭐냐하면 평면을 평면을 통해서 단적으로 보여준거죠. 그 논리를, 기본적인 논리를, 그 포 작품이라는 걸 하나를 통해서 거기에 풍경은 없고, 거기엔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고, 골목도 없는 표현이지만은 착각이라는 그 자체만을 갖다가 뽑아내서 증명해 준거죠.

이인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에 대한 형이상학적 오염을 걷어내고자 했듯이, 선생님은 회화의 일루전을 걷어내고, 그 자체로 마주할 수 있는 힘은 비트겐슈타인을 통해서 빌어 온 것이다 이렇게 되겠군요.

이건용: 저는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말 댈 수 없는 사안에서 침묵하라는, 초기의 논리논고 거의 끝 부분 정도 가면은 이제 그 말이 나오는데요. 그 언어를 갖다가 받아들이면서 충격을 받았어요. 뭐냐하면, 우리는 이심전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말하자면 말하지 않고 느낌으로 서로 주고 받는, 또는 논리적으로 전부 나열하지 않고 단어 몇개로 통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논리적인 그 문장이 성립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게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죠.

그래서 한때는 그런 것들이 그 당대의 정치적인 우리의 현실 말하자면, 끊임 없이 국민들을 갖다가 말로 현혹시키고 그러면서 딴 일을 하는거, 우리는 중학교에 이미 공민 시간이 있었어요. 지금은 뭐 국민윤리 뭐 이런는데, 공민시간이 딱 되면은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그러잖아요. 그것이 실제 공간에서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그거, 그것은 논리적으로 끊임없이 얘기함으로써 증명해야 할 사안이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프린트 만들어 가지고 중학생이 명동 거리에 나가 가지고 지나다니는 사람 나눠 준 일도 있고. 저는 괴짜스러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인범: 그 1972년 뭐 유신으로 이야기되는 어떤 독재정권 밑에서 어떤 언어의 오염을 그 시각적으로 다시 인터프리테이션 했다고 할까 그런 작품들을 시도하신 거네요. 특히 ST 그룹을 주도하시면서 AG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 보다는 ST 그룹을 중심으로 해서 언어적 문제에 대해서 천착을 하셨다고 보여지는데.

이건용: 그거는 조셉코수스의 철학이후의 미술이라는 텍스트를 우리가 이제 소화하기 위해서 어... 그 조셔스가 코셔스가 그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은, 워낙 그 철학가들의 텍스트를 갖다가 문장들을 뜯어다 붙여놓은 거에 불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최종적인 이야기를 그 문장을 통해서 하는 건데 우리 ST 멤버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그래 가지고는 대학에 언어철학 전문 철학자한테 가서 질문을 하면은 깜짝 놀래요. 미술하는 사람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그건 그런 겁니다. 저는 이미 배제고등학교 다닐 때 언어 철학회에 참석을 하고 그랬기 때문에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명제적인 문제, 개념적인 문제 이것이 정확해야 된다는 거 이건 최소한 제가 가졌던 거죠.

이인범: 어... 1970년대 전반의 작업들이 대체로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나 반성에 입각하고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신체항이나 관계항 등이 그런데, 1975년 백록화랑에서 이벤트가 개최된 이후에 선생님의 작품은 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백록화랑의 오늘의 방법전에서 행해진 로지컬 이벤트에서 이벤트 현신이라는 타이틀로 벌인 신의 측정, 동일면적 이벤트가 그 효시가 될텐데 그 작품에 대해서 우선 간단하게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용: 아... 글쎄요. 저는 그 기존에 있는 미술의 그 운동들, 뭐 이런 것들을 그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게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측면,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거 그런 것들에 관심은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을 다 파악하고 난 후에는 버렸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하는 얘기인데, 사다리를 써서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갖다가 버려라. 다시 말에서 나는 당대의 미술 주류들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빨리 파악하려고 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사실은 내 과제 내가 관심갖고 내가 해결한다고 했던 문제, 거기에 주력했던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백록 화랑이 개관이 된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생각했던 거, 또 그 다음에 대중들이 여태까지 미술을 생각했던 것을 어떻게 반성 시킬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을까, 그것을 생각한 거죠.

그래서 어... 이런 논리죠... 제가 이 퍼포먼스를 하면서 이거는 백록화랑 그 다음에 했던 행위인데요. 이게 뭐냐 그랬어요. 그랬더니, 어떤 철학하는 양반이 굉장히 심오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받아들인 심오성을 한번 얘기해 보시오 그랬더니, 불교 철학을 갖다가 집어넣고 여러가지를 집어넣어 가지고 나름대로 자기가 해석하는 형이상학적인 그 세계를 쭉 얘기 하더라고요. 나도 감동 받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가져가라. 나는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봐라. 엄지 손가락을 하나 구부리면 가까워 지지 않느냐,. 자, 봐라 네 개 나머지 손가락을 구부리면 엄지 손가락이 가까워지지 않냐, 그거를 보여준 것이다. 손이 최대한으로 만나면서도 멀어질 수 있고, 벌어질 수 있는 거를 보여주고. 손을 역시 펴 가지고 최대한으로 엄지 손가락이 멀어질 수 있는 것을 보여줬는데, 서로 구부림으로써 가까워 지는 현상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랬더니, 그 양반이 너무 싱거운데요 그러면서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반발을 하면서, 야... 그렇게 명쾌하고 예술을 그동안 관념적으로는 너무 골치가 아프고 우리를 괴롭히는 양식으로 받아 들였는데, 이렇게 명쾌하고 이렇게 말이야 참여할 수 있고, 이렇게 말이야 자기도 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너무 즐겁다.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에... 백록화랑에서 제가 보여줬던 것도. 동일 면적이라는 거. 현신 동일 면적, 또 그 다음에 현신 에... 측정, 뭐 이런 거였는데, 결국 오각형으로 변형되어 있는 그 화랑을 갖다가 변을, 서로 다른 변을 잰 것이고 그 다음에 내가 집에서부터 다림질을 해 가지고, 세탁소에 부탁해서 더 잘 다려가시고, 전지짜리 화선지를 아... 그 화랑을 가득 채우고 나중에는 다시 쓸어서 그 면적을 갖다가 설정했던 공간에다가 집어 넣는 그런 작업이었습니다.

이인범: 그...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마라고 했듯이, 나는 보여줄 수 있는 것에 한해서만 보여주겠다라고 하는 것으로 읽히네요.

이건용: 네, 그렇게도 불 수 있죠. 결국 형이상학을 갖다가 추구하고 이상의 세계를 추구하고, 그랬던 어떤 데리케이트 하면서도 어려운 예술들이라는 거는, 사실 손장난에 불과한 것이고, 그거는 하나의 가상의 세계에 불과한 것인데, 우리가 만든 세계에 불과한 것인데, 아...그것이 세계가 더 복잡해지고, 세상과 직접 만나고, 전쟁을 통해서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더 본질적으로 만날 수 있고 더 쉽게 만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 세계가 무엇인가하는 욕구를 자기고 있는 시대에 있어서는 제 방법이 더 좋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인범: 당시 선생님께서는 그... 행위미술에 대해서 선생님 나름의 독특한 입장을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어... 특히 이름을 이벤트 혹은 로지컬 이벤트, 사건 등등 으로 명명하시면서 선생님의 작업을 전개하셨는데, 기존의 해프닝이나 행위 미술과 선생님의 로지컬 이벤트와 구별 짓는 어떤 변별점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까?

이건용: 어떤 사람은 로직이라는 말을 갖다가 집어 넣으니까, 로직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난 로직을 갖다가 하나의 에... 수단으로 사용을 한거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로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어... 있는 걸 있는 대로 드러내 주는 길을 개척한 것 뿐이죠. 아... 뭐냐하면 우리는 에... 사실 예술이라는 것이 더 몰라야 위대한 것처럼 보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술이라는 것도 우리 인간 활동 중에 아프리오리 선언적으로 존재하는 분명한 세계입니다. 그거는 일반적으로 사회 안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필요라던가 사용이라든가 또는 유익이라든가 개념을 떠나서 더 본질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 중에 요구되는 부분을 실현시키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프리오리 예술이라는 영역은 끊임 없이 경험된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개척함으로써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저는 보는 겁니다. 그래서 아... 그런 기법을 갖다가 많이 썼었는데, 저는 또 그런 어려운 독재시대에 살면서 그렇지 않은 세상이 뛰어 들면은 똑같이 우리의 의식과 신체를 지배해 왔던 그런 의식을 가지고 접근을 하니까. 저는 오르리 공항에 11시 반에 도착을 했는데 전 몸이 다 사지가 굳어지는 현상을 체험했어요. 왜 이 젊은 내가 이 신체가 이렇게 굳어지나, 깜짝 놀랐어요.

무슨 생각 때문에 그랬나면 통행금지위반이라는 것 때문에 그랬습니다. 한국에서는 벌써 12시 반이 되게 되면은, 12 안에 집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근데 오르리 공항에 내린 것이 11시반이었어요. 바깥이 보니까 깜깜하네. 나는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내 몸을 막 두들겼어요. 주물럭 거리고. 그러면서 이제 내 몸을 갖다가 막 풀었죠. 그러면서 내가 깨달았단 것은 뭐냐면 여기가 통행금지위반이 없다는 겁니다. 에...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에... 이 신체 드로잉이라는 기법을 통해서 76년도에 시작을 했는데, 그린다라는 문제가 끊임없이 그런 어떤 에.. 단축 개발을 위해서 단축 발전을 위해서 그런 독재적인 전제적인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저는 그 반대 방향으로 한쪽으로 또 나간 부분이 있는거죠.

그래가지고는 거리에다가 과거 우리 선인들의 조각을 대학생들한테 해가지고 석고상을 갖다가 나열해놓은 공간이 있고, 또 남대문 쪽으로 가는 그쪽 길에대가 놓은 적도 있고, 또 끊임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되고, 또 그 다음에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뛰어야 되고 여러가지 하여튼 그런거. 내 의식이라는 것 때문에 있지도 않은 통행금지도 없는 장소에 가서 온몸이 긴장이 되고 마비 현성이 오는 그 일을 겪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때 느낀게 뭐냐하면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할 뿐 아니라 몸 까지도 지배하는 구나. 체제도 마찬가지로 지배를 하는구나.

이인범: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철학적 태도 혹은 논리적 그 태도는 사실은 그 ST 그룹 멤버들 내부에서도 예술이 가지고 있는 어떤 미학적 혹은 습관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부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비판을 좀 받으셨죠? 당시에.

이건용: 그렇죠. 특히 에... 그 분석철학이라던가 뭐 이런 거 공부하기 전에는 도대체 저 친구가 하는 얘기가 저게 도대체 뭔가 그래지고 저걸 갖다가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에...사실 저는 제 일에 열중하고 있던 시절이었고, 그리고 그거를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이 있다는 거를.

그래서 아까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체 드로잉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갖다가 그린다든가 그 다음에 말하자면 그때 당시에 아주 유행했던 전쟁 기록화라던가 또 기록화, 과거의 어떤 역사적인 기록화, 그런 것을 그려서 끊임 없이 공간들을 채워서 그 체제가 장악해가는 공간이 아니라 인류학적으로 우리 신체가 선을 긋고 칠한다는 그 행위가 평면과 어떤 관계속에서 만나가지고 그것들이 이루어 지는가 하는 것을 갖다가 말하자면 보여주는 일이었죠. 그래서 제 신체 드로잉은 무엇을 그린다는 대상이 사라지고 우리 신체가 표현자가 되고 우리 내 인간의 어떤 그 신체가 평면이라는 대상과 만나는 조건 안에서 어떻게 칠하고 걷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가를 리얼하게 보여준 것이죠.

이인범: 선생님의 작업들이 대부분 개념적이고 방법적인 성격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특히 신체 드로잉 시리즈는 선생님의 그런 일반적인 작품이 갖는 성격을 넘어서서 보다 더 [?현실 쳐내기적]이면서 동시에 여러가지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76년 제 5회 ST 그룹전에서 신체 드로잉을 발표하셨는데, 그 신체 드로잉전의 구체적인 작품 사례를 좀 설명을 해주시고, 특히 신체 드로잉에서 그런 선생님 특유의 장기가 발휘된 것은 어떤 점에서라고 생각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용: 그래서 그, 그때 그 제목이 뭐냐면 The method of drawing이라는 제목을 갖다가 붙였어요. 그리고 또 신체 드로잉이라고도 붙이고. 그러니까는 그리는 방법이 무언가. 그러니까 에... 그리는 방법을 보여준다고 한다고 하면, 과거 회화적 개념에서 볼때는 무엇을 그렸는가. 무엇을 감쪽같이 그렇게 그렸나 하는 거에 집중이 되는데, 그리는 방법을 갖다가 봐야 된다는 관객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진지하게 봤다고 한다면 결국 선을 긋는다거나 그린다는 것은, 행위가 이런 것이구나. 이런데서부터 표현이라는 것이 출발하는구나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보게 되어 있죠.

그러면서도 그것은 이미 그린다라는 전모를 갖다가 논리적을 파악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을 갖다가 들여다 보고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제가 크게 본다고 하면은 서양의 현상학이나 또 멜로뽕띠의 그 신체론이나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적이며 아주 기초적인 어떤 그런 논리 전개나 동양에서 생각할 때는 세상을 있는대로 바라 본다는거. 있는 것을 있는대로 바라본다는 그 어떤 그런 행위의 어떤 그런 의구성을 갖다가 배제하려고 하는 그런 측면이나 결국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저는 내 신체드로잉을 갖다가 있는 그대로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 본다면, 그거는 노자나 장자의 입장에서도 아, 그거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구나라는 자연 회기적인 그런 측면이 보입니다.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은 그 현상은 걷는다라던가 표현한다는 것이 우리의 그 신체를 통해서 이렇게 나타나 진거구나 이거는 구성한게 아니라, 이것은 서술된 거구나. 현상학자들이 얘기하는 대로 세계를 있는 대로 서술할 뿐이지, 구성하지 말고 그것을 왜곡시켜서 만들어 나가지 말라고 경고한 것 처럼, 그것은 누구나 내 방법대로 하게 되면은 그렇게 결과가 나오게 되거든요. 선의 어떤 그런 구조. 팔의 구조, 우리가 표현 하기 위해서 [?] 쓰고 있는 구조, 화면을 갖다가 뒤에 놔야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겁니다. 앞에서 보고 현전에 있는 평면에다가 그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그다음에 화면 뒤에 가서 오히려 손을 넘겨서, 그 기준도 내 키만 갖다가 1m 70을 설정해야 되는 그 이유도 자연 스러운 겁니다.

나보다 큰 거를 놓고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서 팔을 넘겨서 그린다던가 또 그렇지 않으면 도구를 사용해서 그린다는 것은 그거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죠. 모자라고 안되는 일을 갖다가 우리 인간의 의지와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원한 수단이 거기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제 신체드로잉은 화면 여기 뒤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하트 모양도 역시 왼팔과 오른 팔을 갖다가 그런 방법으로 휘저으면 그런 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죠.

이인범: 그림을 마주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고 관념의 표상이 아니고 단지 선의 논리고, 몸의 논리로...

이건용: 기자들이 뭐라고 얘기했냐 하면은, '화가가 반드시 자기 눈 앞에다 놓고 걷는 것에 대한 의문을 갖다가 이 사람은 가지고 있다. 이 사람은 현존해 있는, 자기 앞에 있는 화면에 다가 놓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그리던가 화면 뒤에 가서 그리던가 화면을 뒤에다 놓고 그리던가 옆에다 놓고 그리던가 잘라 가면서 그리던가 그런 것이다' 하고 저널 적인 어떤 얘기를 합니다만, 그 얘기도 맞는 얘기예요.

이인범: 선생님의 1970년대 후반의 일련의 작품들이 어... 백색, 단색파라고 하는 한국의 당시의 집단적 획일주의로까지 얘기되는 작품들과 갖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어... 어떤 측면에서는 공통점도 있고 어떤 점에서는 크게 변별이 되는 부분도 있는 거 같은데 거기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생각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이건용: 공통점들이 많이 보입니다. 가령 뭐냐하면 정상화 선생님의 작품 같은거, 칠하고 뜯어내 지는 부분만 남겼다가 다시 거기다가 다른 색깔로 채우고, 또 어떤 분은 또 아무런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끊임 없이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행위의 흔적, 그거를 보여 줄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색을 갖다가 쓰지 않고 제한해서 모노크롬적인 그런 거를 또 추구하는 부분들이 있고 여러가지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에 어... 뭐냐하면 일부러 르네상스 이후로 대상을 끊임 없이 묘사하려고 했던 그런 부분을 벗어나서 보다 더 자연스럽게 그린다는 행위를 갖다가 본질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은 저하고 맞는 부분이 많이 있어요.

그렇지만 더 본원적으로, 더 본원적으로, 그린다는 행위를 갖다가 보여주는 것은 에... 제 이 신체드로잉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집니다. 그건 뭐냐하면 저는 무의식적으로 긋기 위해서 휘젓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의 어떤 구조, 그렇게 그 [?매디드]를 이용해서 그렇게 그릴 수 밖에 없는 그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저는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제 행위는 표현하기 위한 제스쳐라던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을 수 밖에 없는 행위가, 필연적인 행위가 거기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컬러에 대한 문제도 있는데, 이 세계는 꽃에서부터 또 의상, 복장의 색깔에서 부터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색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데, 모로크롬으만 제한한다는 것이 저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드리는 거죠. 저도 개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단색으로 그렸던 시절이 있습니다만은 또 칼라가 필요하다면 저는 칼라를 또 씁니다. 그런데 한국의 모노크롬이 단색으로 제한해서 표현으로써 드러내고자 하는 궁극적이 목적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한국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서에 깊숙이 베어져 있는 색 만으로 제한 하려고 하는, 그것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서가 또 그런 어떤 문화적인 품격이 어떻게 나타났을까하는 그런 패션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고, 처음부터 애초에 그런 목적이 그 안에는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박서보 선생이 무위자연을 많이 얘기하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무위자연적인 속성을 말씀하는 것이지 그 무위자연에 대한 어떤 행위를 통해서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품격이라든가 문화적 어떤 그런 요소를 회화가 드러내 주고 그 표면이 그런 것을 갖다가 비추어 준다는 것을 갖다가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거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거는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부분이고...

이인범: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 백색,단색파가 그 한국적 모더니즘, 한국적 민주주의 등등으로 일컬어지던 1970년대 후반에 민족 정체성 담론에 다소 휘둘린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계신 거죠?

이건용: 그렇죠. 에... 이북에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많이 논의 됐었는데, 우리 그 당대에 주체성이라는 논의는 무지무지 하게 많이 논의 된 부분이 있고, 또 그것을 통해서 외세의 어떤 그런 어... 그 새로운 어떤 그[?못물이랄까] 조류라던가 이런 것들을 갖다가 대체하려고 그랬다는 그런 부분들도 많고 또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한국인이 습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부분들을 드러낸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추어 본다면은 저는 더 내면적으로 저항적이면서도 더 자유스럽게 예술을 갖다가 큰 광장에다가 큰 공간 안에다가 더 큰 것 안에서 확장시킬려고 했던 부분이 있죠.

이인범: 특히 1975년 5월에 개최되었던 에이지언에 발표됐던 '이리 오너라 내가 보이느냐' 같은 작품들이나 1976년 신체 드로잉 5번 '곧은 선을 그을거야' 라고 하는 작품 같은 것이 두드러지는 현실에 대한 그 지시적 성격을 갖는데 그 문제와 관련해서 선생님의 개인적인 체험, 당시 시대 상황과 관련해서 말씀해주실 에피소드가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용: 글쎄요, 최근으로 오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불편한 체제 현실 그게 불편했고 또 거기로부터 가해지는 제한된 여러 가지 어떤 요소들이 싫었고, 또 때로는 또 공문을 통해서 저에게 지시하는 것들이라던가, 또 그렇지 않으면,끊임없이 두 사람이 교대로 제 일상을 감시하고 조사하고 있는 그런 부분들을 그것도 또 싫었고, 또 내가 예술의 그룹활동이나 이런것들을 통해서 소통이라는 그런 최대 목적을 가지고 많으 관객들과 만나는 지점까지 와서 감시하는 부분도 또 싫었고, 그래서 그 신체드로잉 중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허리를 구부려서 어깨축을 중심으로해서 선을 긋는 신체드로잉을 통해서 직선이라는 기하학적인 언어하고, 곧은 선이라는 인위적인 선, 그 두 언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내가 생활을 통해서, 실제를 통해서 저항을 해왔던 것을, 있는 대로 내 힘을 다해서 떠들면서 그 행위를 했어요.

'곧은 선을 그을거야'라는 그 단어가 파생되면서부터 그건 뭐냐하면 가운데 직선을 그을 땐 직선을 긋지만, 외곽으로 양옆으로 나갈 때는 그을래야 그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구조적으로 어깨가 축이 되어서 선을 그어 나가기 때문에 이 선이 원작용을 일으킵니다. 원작용을 일으킬 때부터 인위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곧은 선을 그을 거야. 나는 곧은 선을 그을 거야! 악을 써가면서 그것이 반복되면서 젊은 친구들이거기에 와서 보고 있었는데 자기네들도 곧은 서을 그을 거야!라고 소리 소리를 질렀어요.

나중에는 하도 좇아 다녀서 그 사람을 내가 알아요. 그 사람이 가까이 오더니 뭐라고 하냐면, 어깨를 툭툭치는 거야. 오늘 퍼포먼스는 찜찜해. 그래서 뭐가 찜찜합니까? 직선을 긋자는데 곧은 선을 긋자는데 무슨 찜찜한 일이 있습니까? 근데 왜 소리를 지르는거요? 아, 잘 알아들으라고 지르는거죠. 누가? 아, 그건 뭐 들어야 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고 그 다음에 왜 젊은 친구들이 같이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 그 친구들한테도 뭐가 있나보죠. 그러면서 얘기를 중단했었는데, 저는 그 당대에는 홍대입구 근방에 공원에 가서 거기 있는 사람들을, 애들을 통해서 퍼포먼스를 하고 도망가고 뭐 그런 일들을 끊임없이 했어요.

이인범: 고문도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이건용: 예, 저는 76년도 봄에 검은 차가 와서 딱 3조로 다니더라구요. 한 사람은 운전하고 한 사람은 뒷자리로 먼저 들어가고, 그 다음에 나를 가운데 앉히고, 그 다음에 나머지 사람이 들어오고, 그러고 들어왔던 그 부분에는 거기에는 사람이 앉게 안되어 있더라고요. 그렇게 해가지고는 리라 국민학교 밑에 어디 안가가...지금도 아마 있을 거예요. 양옥집인데, 그리로 끌려갔죠. 지하층에 갔는데 거기서 무릎을 꿇게 만들고 구둣발로 밟아서 한 10년 동안을 내가 고생했어요.

이인범: 그때 신체의 논리, 선의 논리에 대한 그 고문을 받으시면서도...

이건용: 그때 당대에는 동네 깡패들이 나에게 접근을 못했어요. 왜냐하면 팔자걸음을 걸었는데 시비를 걸더라고요. 왜 그렇게 하고 다니냐. 아 내가 단수를 많이 해서 그게 걸음이 습관이 그렇게 됐다. 그랬더니 아 그러냐, 몇단이냐 뭐 그런 것 까지는 알려줄 필요가 없다. 그랬더니 말을 몇 마디하고 그냥 보내더라고요. 앞으로는 동네 다닐 때는 좀 얌전하게 다니기 바랍니다. 아니 나는 운동을 하다가 이렇게 됐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내가. 그 정도로 팔자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그러냐 하면 이게 휘어져 가지고, 그 후에 누가 150년 묵은 산삼하고 내 그림을 바꾸자고 그래서 바꿔서 그것을 10년 후에 내가 그때도 추울 때였는데 아주 그냥 통째로 다 먹고 그러고 물도 다 마시고, 하룻밤 사이에 다 나았어요. 아침에 일어나니까, 내가 4층 서민 아파트에 살았는데 4층까지 내려 간다는게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이 눌리고 아프기 때문에...근데 금방 내려가 있더라고 내가. 그럼 올라가는 건 어떤가 했는데 금방 올라 가더라고 그래서 내가 문을 열고 우리 집사람, 설거지하고 있는 우리 집사람한테 내가 금방 내려갔다 올라왔다고 그랬더니 하도 우스운 얘기를 잘하는 사람이니까 알았다고, 알았다고, 다 정말인데 정말인데, 내가 그랬다고요.

이인범: 선생님의 1970년대 작업의 관심사가 이어진 삶이나 달팽이 걸음이라고 하는 작업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달팽이 걸음은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고, 특히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에 작품 전시의 타이틀로 사용이 될 정도로 선생님께는 대표성을 갖는 작품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달팽이 걸음에 대해서 설명 좀 부탁 드립니다.

이건용: 아... 참 사람이 달팽이라는 말만 해도 울렁울렁할 정도로 저는 좀 그 타이틀만 누가 얘기해도 저는 참 감동을 받습니다. 아...그 달팽이의 그 느린 속도와 그 느린 걸음은 생명의 속도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움직임입니다. 우리가 딱딱하게 제도와 교육과 권력에 의해서 딱딱해지기 보다 달팽이 같이 유연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실망하지 않고, 뛰는 놈을 보고 실망하지 않고, 그렇게 움직여 갈 수 있는 달팽이를 보면 전 감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실망할 때가 많고, 제가 그 당대에 먹은 게 너무 없어 가지고 남자가 49킬로였어요.

그리고 그런 체격을 가지고 항상 그렇게 현실에 대해서 민감하게 느끼고 살 당시에 나를 갖다가 버티게 해준 것은 달팽이의 끝없는 그 걸음, 유연한 걸음과 그리고 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그 십자가의 고통을 이겼는데 이것쯤이야 하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행위 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 행위를 또 부정적으로 지우는 부분이 있는 그런 행위입니다. 그런 양의적인 양면성이 있는 행위예요. 그러면서도 그것은 모터를 이용한다던가 어떤 기구를 이용한다던가 그런 어떤 인간의 어떤 기능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그 신체 자체를 이용해서 드러내 주는 생명의 속도와 생명의 움직임과 그리고 휴면 스케일 그러니까 인간의 제한된 스케일 그 자체를 세계 안에서 유연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내 발을 신발을 벗고 맨발로 이렇게 서서 아니 앉아서, 내 앞에다 끊임없이 1과 0이 반복되는 선을 갖다가 계속 긋고 그 표면 지상에다 긋고, 백묵으로 긋는거죠, 긋고, 내 발바닥을 움직여서 달팽이처럼 나가는 거죠, 그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냐 하면, 저는 20미터를 너끈하게 70이 넘은 제 나이에도 불구하고 73세입니다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체격이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가지고는 저는 처음부터 욕심이 없기 때문에 유연하게 발을 움직여 이게 움직이면 나간다는 거예요. 근데 그 체격 좋은 사람들이 한 5미터나 3미터 나가고 쓰러지는 거는 이거 빨리 움직여 가지고 걷는 것을 저으면서 나가야 한다는 것이 꽉 차있기 때문에 미리 정신적으로 지쳐요, 그래서 픽 쓰러져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거야.이 쉬운 일이 왜 이렇게 안되냐고 그래서 마치 1과 0을 끊임없이 걷는 디지털적인 행위와 이 우리 신체 안에서 반복적인 행위와 그 다음에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신체 조건에 의해서 단지 움직여져 나가는 아날로그적인 그런 행위가 한 장 안에서 백목이라는 것을 통해 가지고 만나지는 퍼포먼스인데 그 안에는 진짜 현상학적이고, 분석적이고, 또 무위자연적인 그 동향의 어떤 행위가 정말 불과 20분 만에 이루어지는 행위인데 장고한 시간의 축적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그 무게를 전부 느끼게 하면서 생명이 살아있음을 재확인 시켜주는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이 신체드로잉의 한 분야로써 드러내지는 그런 행위입니다.

이인범: 그래서 19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처음...

이건용: 예, 했습니다.

이인범: 그... 시연된거죠?

이건용: 네, 그거는 제가 대전에서 개인전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 했고.

이인범: 아,대전에서 처음 하셨군요.

이건용: 네, 했었고,

이인범: 그거는 몇 년도였습니까?

이건용: 그것도 79년도에 했었고, 그 다음에 또 서울에서 그룹전 ST전 할 때도 했고, 그 다음에 상파울로 비엔날레 여름에 했는데 그 때도 가서 오프닝 때 그걸했고, 그리고 수도 없이 했어요. 덴마크 [?실크버그바든] 미술관에서도 했고, 그 다음에 동경에가서 또 했었고, 그 다음에 2012년도에 타임스퀘어 그 광장에서 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같이 갔던 와이프가 너무 아파서 포기하고 돌아 왔는데, 저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그 진짜 대도시에서 대도시의 그 광장에서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다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속도에 마취되어 있는 현대인들한테 정말 느린 속도의 그 지층을 그 앙금을 선사해주고 싶어요.

이인범: 선생님 그 말씀이나 표정만으로 봐도선생님이 달팽이 걸음이라고 하는 작품을 가장 탑으로 이렇게 스스로 설정하시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이건용: 예, 그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이인범: 상파울로 비엔날레 에피소드 좀 짧게 한 말씀 해주세요.

이건용: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우리 한국관이라고 할수있는 2층에, 거기서도 했고, 그 때는 박형기씨도 같이 했었고 친구 김용민도 같이 했었고 [?코미션을 했던 녹원 선생님]도 같이 갔었어요. 그래서 한국관 안에서는 내가 보여 주기도 했어요. 오프닝 때, 그렇지만 프레스 오프닝 때에 1층, 한200평 되는 오프닝장인데 거기서 말하자면 오픈상이, 세레모니 테이블이 사선으로 놓여져 있는데 그 사선, 그 반대 사선에서부터 출발해서 그 상 밑으로 통과해가지고 반대 벽면까지 가는 달팽이 걸음을 했습니다.

이인범: 그 굉장히 긴 거리였네요.

이건용: 예, 그렇죠. 그런데 처음에는 시선을 끌지 못했어요. 바짝 마른 사람이 맨날 벗고 옴짝옴짝하고 앉아 있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는 결국은 중앙을 통과해서 나가는, 테이블 밑으로 통과하는 것을 보고 그때부터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하고, 인터뷰가 들어오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런게 지금은 내가 자료를 못 가져오고, 금방 그때 서민 아파트를 팔아서 여비를 해서 갔었는데, 와이프가 가라고 해서 갔었는데, 그때 그 매스컴이나 이런 데 많이 방영이 됐었을 겁니다.

이인범: 선생님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선생님 육성을 통해서 듣는 게 참 매력적인데 오늘 시간이 짧아서 그것까지는 엄두를 못 냈습니다. 다만 작품 이미지로 제공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요.

이건용: 예, 그리고 제가 어차피 이런 좋은 밥(Bob)의 프로젝트에 내가 끼었는데 마지막으로 제 예술에 한 총체적인 예술에 대한 론을 얘기한다면, 기생한 예술이다. 그걸 영어로 파라시티적이라던가 파라 시티즘이라고 하던가, 기생, 기생한, 기생주의라고 하는 건데, 예술은 기생하면 할 수록, 학문도 서로가 기생하면 할 수록 커진다. 그 주의입니다. 저는 자연에 대해서,자연 현상에 대해서 기생했고, 신체 드로잉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기념비적인 내 신체항이라는 작품은 자연에 기생한 예술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뿌리가 나와 있는 작품들, 그 뿌리 끝에 한번 내가 매달리는 걸로, 내가 자연에 대해서 기생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얼마나 내가 친한가를 한번 증명해 보여주는 것으로 이 프로가 끝났으면 좋겠어요.

이인범: 이번에 출품 된 작품 중에 물에 기생한 예술, 예술도 죽는다?

이건용: 예술도 짧다. 그리고 내가 끊임없이 씹었던,내가 4년 동안 씹었던 껌을 붙인 작품도 여기 출품되었고요.

이인범: 1970년대를 벗어나 80년대 이후의 작품들이 굉장히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고, 80년대 중반 이후, 특히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어떤 양상, 그런 조건 속에서 또 새로운 경계를 넘어 가시는 아주 실험적 작품들을 무수하게 하셨는데, 오늘 말씀은 1970년대에 농축되어 있는 선생님의 예술 세계를 그것도 살짝 들어야 보는 정도에서 마감하는 게 아쉽습니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건용: 네, 감사합니다.

제작

진행 : 이인범 교수

카메라, 조명 및 음향 감독 : 프랑수아 사이칼리

영상 편집 : 프랑수아 사이칼리

자막 및 번역 : 김소영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