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여기가 이제 제 2의 화실 공간입니다. 여기가...

윤진섭: 아이고, 뭐 작품 대단하네요. 오브제도 있고...

김구림: 그냥 뭐 여기 뭐, 조그마한 소품들 진열장에 진열해놨습니다. 책 작품도 있고...

윤진섭: 뭐 이거는 또 뭐 2000년대 만든 작품도 있네요.

김구림: 네, 그 전에 만든 것도 있고요.

윤진섭: 오브제는 오래 전부터 하셨잖아요?

김구림: 그렇죠. 네

윤진섭: 아유, 오브제들이 많네요 아주.

김구림: 이것들은 이제 필요해서 새 걸 사다 놓은 것이고, 이런 것들은 여기저기 막, 언제 들어갈 지 모르니까. 그런 고물 같은 걸 주워 모아 놓은 것들입니다. 작품을 하다 보면, 언제 어떤 게 필요할 지 모르니까...

윤진섭: 오늘은 2014년 12월 1일, 저는 미술 평론하는 윤진섭이고요. 오늘 김구림 선생님의 자택에서 이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김구림: 안녕하십니까?

윤진섭: 선생님은 보통, 대한민국의 화단에서 최고의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로 명성을 얻고 계신데, 최근에 특히 테이트모던 전시와 아울러서 많은 좋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예술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기뻤던 어떤 시대라고 할까, 전성기라고 할까,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김구림: 근데 나는 작품 생활 하면서 내가 전성기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리고 무슨 기뻤다는 이런 생각도 없이, 평생 어떤 작품에만 골몰하다가 가는 그런 걸로만 생각을 했어요.

윤진섭: 예, 그러니까 어느 특정한 전성기라기 보다는 계속 노력하는 시기였다, 이제 그런 말씀을, 평생 이제 그렇게 사셨다 그런 말씀이시죠?

김구림: 네, 왜냐하면은 내 작품이 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시대와 같이 늘 변해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그 시대를 파악해야만 그 시대적인 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윤진섭: 그런데 지금 선생님 연세가 80에 가까우신데, 그만큼 청년처럼 늘 탐구하고 또 새로운 것을 갈망하면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 시대적 어떤 요구랄까 그 흐름에 대해서 끊임없이 동참해왔다 그런 말씀이시네요?

김구림: 그렇죠. 그리고 이제 에...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일본이라던가, 파리에는 뭐 잠시 있었지만 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냥 떠났지만, 미국이라던가, 미국에서도 또 이제 뉴욕이라던가 로스앤젤레스 쪽에 어떤 이 그 장소를 바꿔가면서 살아왔을 때 마다 작품이 변모되고, 거기에 따라서 내 생각도 변모되는 그러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대적인 그...반영과 그 장소성에 대한 그 문제들이 작품속에 상당히 많이 담겨있습니다.

윤진섭: 선생님은 이제 일반적으로 이야기 할 때, '최초의'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데 가령 '최초의' 한국에서 우편아트를 하셨다. 메일 아트를 하셨다 내지는 최초의 뭐... 뭐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김구림: 뭐 '최초'라는 게 상당히 많이 붙죠. 일렉트릭도 그렇고 사실은 한국에서는 발도 못 딛었지만 최초의 비주얼 아트를 또 했죠. 그 다음에 이제 다른 사람이 자기 걸로 해서 계승해왔지만 나는 조금 조금씩 전부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다 보니까, 한 가지를 가지고 끝까지 그걸 지금까지 지속해 나온 것이 없어요. 아까 이야기 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작품이 변하듯이 그 작품 자체는 그 어떤 행위라던가 제작 방법도 마찬가지였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그 내가 서양화가를 보고 그렇지만 어떤 페인팅에만 구속되지 않고 판화라던가, 설치라던가, 혹은 공연예술이라던가, 뭐...음악이라던가 모든 분야에 걸쳐서 내가 이 작품 생활을 해왔습니다.

윤진섭: 이제 1969년에서 70년도는 선생님 개인 뿐만이 아니라 한국 화단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해고, 또 그것이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사건들로 점철된 그런 시절이었다고, 이제 한국 현대 미술사는 그렇게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선생님의 메일 아트라던지, 또 실험영화, 또 헤프닝과 같은 그런 다양한 미술활동을 비롯해서, 또 제 4집단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에... 예술적인 리더로서의 그런 활동을 많이 보여주셨는데, 그 시절에 대해서 좀 더 언급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구림: 제 4집단을 만들게 된 동기는 이 그 당시에 내가 다른 어떤 작업을 하다가 보니까 거기에는 페인팅만 하면 별로 문제가 없었는데, 기계를 다루는 작품이라던가 여러 가지 뭐 빛을 다루는 작품이라던가 혹은 소리가 들어가는 작품이라더가, 이런걸 하려고 보니까 혼자 힘으로는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이제 소위 콜라보레이션 에... 다른 사람이 도와주고 같이 해야 하는 그런 작업들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거는 먼 훗날 협업이라는 것에 의해서 작품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 4집단을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제 제 4집단을 만들어서 우리 회원들이 이 거리 퍼포먼스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때 이제 이 거리 퍼포먼스 중에서도 어떤 봉투에다가 글을 넣고, 다른 어떤 약품은 아니지만은 사람한테 해롭지 않은 이런 것들을 넣어가지고, 이 내가 어떤 장소에서 화가 자신이 장소에서 여러 사람들이 오게 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 스스로 하는 퍼포먼스, 이런 것들을 행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이제 서울 문리대, 지금의 대학로이지만, 문리대 안에서 그런 걸 나눠 주고 했을 때, 문리대 생들한테 욕을 먹고 쫓겨난 적도 있고 여러 가지 일화들이 많지요.

윤진섭: 제 4집단하고 결성과 관련해서 여러 의상이라던지, 영화라던지 아니면 뭐 연극이라더지 뭐 이런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대략 어떤 분들이 있으며, 그 다음에 그 직제가 아주 독특하더군요. 그런 부분. 또 성명서 같은 거, 이런 것들 좀 소개 좀 해주시지요.

김구림: 여러 사람들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다 있었지만, 내 주동이 된 사람들은 같은 화가였었지요. 지금은 죽고 없지만, 정찬승이라던가 혹은 또 이제 무언극을 주로 하는 에저또라는 그런 극단 단체가 있었어요. 거기에 대표인 방태수라던가. 혹은 또 의상 디자인하는 손일광이라던가 그 외에 또 여러 사람들이 이제 많았습니다.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고. 그런데 이제 그런 사람들과 이제 활동을 하면서 이 나는 또 거기에 이제 회원들과 같이 하는 것도 있지만 타 분야에서 슈트에야성이라는 그런 연극 단체에서 연출도 했고, 연극을 가지고 이제 무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전위 연극을 이제 해가지고 그 당시에 신문에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킨 그런 기사도 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간단하게 이야기 해서, 그걸 길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오태석씨, 그 지금 연출을 하죠? 그분의 이제 웨딩드레스라는 작품을 가지고 내가 각색을 했어요. 그대로 실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가지고 관객 속에다가 배우를 넣어놓고 무대에서 그 이제 연극도 하면서, 전 일심동체가 되도록.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연극 배우가, 참여하는 그러한 연극을 한 적도 있고요. 그리고 무용 관계 같으면, 이제 세종문화회관에서도 했고, 저기 중앙아트홀, 지금 중앙일보죠? 그 아트센터 그런 데서도 했고, 그 이제 뭐, 대학로에 그 지금 무슨 극장입니까? 아르코 그 예술극장, 거기서도 여러 가지 무용관계를 했고, 그런데 이제 그 당시에 나는 미술 쪽에서는 상을, 상이란 게 뭐 대단한 것은 아닌데, 처음으로 이제 상을 타봤는데, 무용 쪽에서 이제 상을 먼저 한번...

윤진섭: 아, 무대미술로 상을 받으셨군요?

김구림: 예, 그것도 받고, 이제 연출로도 이제... 그런 적이 있습니다. 그 외 뭐, 일일이 이야기하면 많아요. 국제 현대 음악제를 내가 연출하기도 했고요. 지금의 명동 극장이죠.

윤진섭: 그 때, 그 제 4집단 결성과 관련해서 당시 이제 시대상황이 제 3공화국, 그러니까 이제 군사독재가 종식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는 그런 일종의 강압적인 통치라고 할까요? 그런 현실에서 그 직재와 관련해서 뭐 통령이니 이렇게 명칭을 쓰셨다고 하는데. 그런 어떤 그 아이디어. 또 그런 것 좀 소개를 해주시고, 무체사상에 대해서도 좀 말씀을 해주시죠.

김구림: 네, 그게 이제 이 보통 일반 무슨 뭐 협회라던가 다른 데서는 그렇게 붙였어요. 그렇지만은 우리는 조금 다양한 분야에서 모였으니까. 이 무슨 협회니 이런 말은 빼자. 그래서 이 소위 집단이란 말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그것이 집단이라는 말을 붙였나 하면은 물론 여러 방면의 사람들이 모여있지만 그걸 전국적이 규모로 확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각 시도군읍면 단위까지 학벌은 제외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여기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모든 회원들 다 참여시키는, 그런 식으로 했기 때문에 상당히 방대하게 이제 범위를 넓혀보자 이런 의미에서 했는데. 직제 같은 거는 이... 뭐 그걸 가지고 회장이네 뭐네 이렇게 하면은 또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이왕이면 아예 그냥 집단으로 했으니까, 큰 의미를 갖도록 해보자고 해서 '대'자를 뺀 '통령' 이 회장을, 그 다음에 부회장을 이제 '총령'이니 이런 식으로 만들게 된 거죠.

윤진섭: 그게 이제 그러니까 이제 말하자면, 정권에서 볼 때는 좀 약간 이 불온이 아니냐 그때 당시 좀 강압통치 기간인데, 그래서 좀 어려움이 있으셨을 거 같은데...

김구림: 아이 어려움이 있었지요. 그게 이제 그렇게 되니까 오해를 가지게, 정부에서는 오해를 가지게 된 거지요. 그래서 내가 유치장에도 들어가서 이 심문도 받고, 그 당시에는 소위 간첩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이제 간첩들이 많았기 때문에 소위 이북에서 작업을 받아가지고 그러한 것을 하지 않느냐 이런 심문도 받고, 여러 가지 고통을 좀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재판정에 가가지고 무죄로 풀려났지만 그 이후에 더 고통이 많았었어요. 활동을 못하게 하고 그리고 이제 또 내 담당 형사가 있어가지고 늘 미행을 당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아버님이라던가 우리 집이 완전히 박살이 났고, 아버님까지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서 심문도 받은 적이 있고, 이런 이제 고통을 받았는데, 그 후에 도저히 생각하니까 이것이 나 혼자만 생각해서 안되겠다. 내가 전체 회장 격이나 회원들 작품을 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하겠다 하고 내가 해체 선언을 했습니다.

해체 선언을 하고 나니까 나는 한국에서 활동을 못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 그러한 일이 생기니까 그 참 일부 화단에서 뭐 전부 다는 아니지만 나를 또 시기하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김구림이가 뭐 작가도 아닌데 말이야 어떤 그 매스컴에 나오기 위해서 그런 짓도 한다 뭐 이런 말부터 해서 여러 가지 말이 있었지만, 그래서 도저히 내 그러면 나 자신을 실험을 해보자 실험의 대상이 되어 보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가서 이제 활동을 하게 되었죠.

윤진섭: 아, 그래서 일본을 가시게 된 계기가 그렇게 됐군요.

김구림: 그래서 일본을 처음 가게 되었죠.

윤진섭: 그래서 그 제 4집단 그 선언문 결성식을 당시에 뭐 명동 소림극장 아니, 그 다방에서 가지셨다고요. 언제 그게 70년이 됩니까 그러면?

김구림: 그 69년도

윤진섭 69년이고요. 그 당시 정황을 이제 좀...

김구림: 그 다음에 70년대에 이제 70년대는 그걸 했죠. 본격적인 전국 대회를 가졌죠.

윤진섭: 어디서요?

김구림: 사직 공원에서요.

윤진섭: 아, 그게 이제 사직공원이고...

김구림: 그래가지고 그 해에 우리가 해방된 날로 정하자 해가지고 8월 15일날 사직공원에서 전국대회를 가지면서 그 날로 해가지고, 우리 어떤 기성 어떤 문화라던가 예술을 한강으로 띄워 보내자. 이래가지고 그 이제 시가행진을 하다가 내가 이제 경찰에 잡혀가게 된 거죠.

윤진섭: 네... 그때 정황을 조금 더 들었으면 하는데, 그래서 이제 8월 15일날 정오에 선언문을 낭독을 하셨나요?

김구림: 그렇죠.

윤진섭: 선언문을 낭독을 하시고 이제 관에다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집어 넣으시고, 꽃으로 덮었다.

김구림: 기성 어떤 못 쓰는 낡은 것들 그런 문화를 우리는 한강 물에다가 한강 가에 가서 띄워 보내고, 우리는 어떤 새로운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의미를 가진 관을 만들었었죠.

윤진섭: 그러니까 관속에 이미 무슨 기성문화라고 할 수 있는 책 같은 거를 집어 넣으시고, 책을 집어 넣으시고, 이제 그 흰 깃발, 무체사상을 의미하는 흰 깃발을 들었다.

김구림: 그렇죠, 우리 이제 그 의미는, 흰 깃발을 한 거는 평화와 백의 민족이라는 그런 걸 상징하기 위해서 흰 깃발을 했습니다.

윤진섭: 그래가지고, 그 이제 그 행렬이 광화문을 지나서, 국회 의사당

김구림: 관이 시청 앞을 통과했죠. 그때 이제, 지금은 없어졌지만, 덕수궁 모퉁이에 파출소가 있었습니다.

윤진섭: 그 전에 국회의사당이 거기...

김구림: 국회의사당을 지나서죠.

윤진섭: 지금 서울시 의회를 지나서...

김구림: 네네, 지나서...

윤진섭:지나서 그 영국대사관 들어가는 데, 그 문화원 들어가는 데 그 입구. 거기 이제 파출소가 있었고.

김구림: 저기 그... 덕수궁

윤진섭: 덕수궁 돌담.

김구림: 돌담 옆에 파출소가 있었습니다.

윤진섭: 그때 거기서 연행을...

김구림: 네, 거기에 있다가 이제 그 나를 연행했죠. 근데 이제 연행해야 될 이유가 없으니까 교통, 도로교통법에 의해가지고 내가 잡혀갔죠. 그렇지만 거기에 잡혀가고 난 다음부터는 이 심문이라던가 이런 거는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이북에서 작업을 받지 않았느냐 뭐 그런 여러 가지 그런 관계의 어떤 심문이 있었지요.

윤진섭: 네네, 그랬군요. 그 다음에 69년도인가 김섭 선생님하고 메일 아트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구림: 네, 근데 이제 이러한 그런 나는 작품을 하게 되면은, 두 사람이 해야 하는 것도 있고, 세 사람이 해야 하는 것도 있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나 혼자 되는데, 메일 아트는 두 사람이 꼭 필요한 거였습니다. 그... 상대방의 어떤 호기심을 자아낸다던가 그걸 좀 그 생각을 혼돈시키는 의미가 있어서, 그래서 내가 그 아이디어를 만들어 가지고 그...김차섭이가 그 당시에 서대문에 있었어요, 화실이. 거기를 찾아 갔습니다. 가서는 이런 내가 생각을 했는데 같이 좀 할 수 없겠느냐고 하니, 아이 좋다고 말이지 그래가지고 같이 하게 된 겁니다.

윤진섭: 네, 그래서 이제 메일 아트를 두 분이 하셨는데, 그 때 그 메일 아트라고 하는 그 형식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 얻으신 거예요?

김구림: 그거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내가 그 구상하게 되었나 하면, 이... 문자라는 것이 앞으로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먼 훗날에는 문자가 없어지는 그런 시대도 오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가지고 그래서 이제 메일 아트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그걸 하기 위해서 계산을 많이 했어요. 우체국에 가서 몇 시에 배달이 되며 몇 시에 도착하는가 하는 걸, 첫 배달이 몇 시부터 시작한다하는 거, 이런 거부터 해가지고 그렇게 그 계산된 어떤 이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걸 받은 사람들은 이제 반응이 다 다른 그러한 반응들이 나오게 되죠.

윤진섭: 그때 뭐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김구림: 아, 재미있는 게 많죠. 그... 많지만은 그 중에 한 두 세가지만 들게요. 어떤 사람은 이 처음에 지문이 찍힌 수신인, 보내는 사람의 이름 없이 저기 그 봉투를 하나 어떤 분, 100 사람한테 보냈는데, 받은 사람 중에, 그 중에 한 사람이 뭐 찢어진 종이에다가 지문이 하나 찍힌 게 딱 도착을 했거든요. 이것이 누가 보냈는지 아무런 것도 없고. 그래서 가만히 받은 사람이 생각을 하니까. 내가 10년전에 참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너무 내가 이 생활고에 바빠가지고 연락도 못했더니 나하고 절교하자는 의미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한 사람도 있었고요.

다음에 어떤 사람은 이게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을 텐데, 이게 불에 비추면 글씨가 나올 것이다 하고 불 앞에 가가지고 종이를 비춰 보기도 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물속에 넣으면 글씨가 나온다고 해가지고 대야에다가 물을 떠놓고 그걸 담구어 보기도 한 사람도 있고. 그 별의 별 어떤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었어요. 그리고 찢어진 걸 본 어떤 사람은 공포에 떨어가지고 아 이거 굉장히 그 심각한 문제구나, 혹시 나한테 무슨 해로운 뭐가 닥치지 않을까 이렇게 공포에 떤 사람도 있을 거고. 여러 가지의 어떤 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윤진섭: 그러니까 그 작품을 통해서 그 때 당시에 이미 인터엑티브(interactive)아트를 하셨네요. 그러니까, 반응을 그렇게 피드백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왔으니까 그 참 상당히 재미있는 일화라고 생각이 되고요. 또 선생님 뭐 기타 일렉트릭 아트도 하셨죠?

김구림: 그렇죠.

윤진섭: 그게 언제인지 한번 좀 소개를 해주시죠.

김구림: 그게 60...이제 그 오브제를 붙이기 시작한 게... 그 외 다른 어떤 기계를 붙인 거는 이 70년대 초부터 참 60년대 초부터 붙였는데 그 후에 이제 그 오프아트가 들어왔어요 우리나라에. 오프 아트 형식의 이제 그 오브제를 붙인 거는 그게 68년도, 68전이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내가 발표를 했습니다. 거기 이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가지고 탁구공 같은 걸 같이 그 반 잘린 그런 거를 이제 쫙 붙여가지고 만들었는데, 그 다음 해에 또 다른 어떤 외국에 보내야 될 그런 작품이 있었어요. 그래서 여기다가 내가 전기를 한번 넣어보자. 그래가지고 일렉트릭 아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윤진섭: 그러면 그걸 만드셨을 때가 대구에 뭐 섬유회사인가요? 거기에 근무하시면서...

김구림: 그때는 대구의 섬유회사에 있을 때가 아니고, 부산의 섬유 회사에 있을 때입니다.

윤진섭: 부산에서 하실 때, 일하실 때...

김구림: 그 이제 기계 부속을 붙일 때는 대구의 섬유회사에 있을 때고, 그거 할 때는 부산의 섬유회사에 있을 때 이제 내가 그런 걸 만들었죠.

윤진섭: 그러면 아무래도 선생님 이제 그 섬유회사에 근무하시면서 여러 부품 같은 거, 기계 부품 같은 것도 쉽게 구하실 수 있었을 거 같고, 관련이 있습니까? 그런 직업하고?

김구림: 그 관련이 있지요. 거기에서 나온 부속품을 가지고 그게 이제 그 사려고 하면 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내가 거기 또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대구에 있을 때는 관리 부장으로 있었고, 여기서 부산에 있을 때는 사장 다음, 사장은 아무 권한이 없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그 정도의 어떤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비서도 두고. 그랬기 때문에 그런 걸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죠.

윤진섭: 그러면 언제 이제 그런 그 회사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 생활로 뛰어드셨나요?

김구림: 나는 무슨 그 학벌도 없지만은 대학을 못나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학교 쪽에는 대학 졸업장을 가졌다 해도 별로 흥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차피 작품생활을 하려면은 돈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 일반 회사더라고요, 그 당시는. 그래서 이제 그 쪽 회사로 취직하게 된 거죠. 그러데 이제 회사에서 취직을 해도 그게 어떤 처음에는 평사원으로 들어갔죠. 평사원으로 들어갔는데 내가 거기서 좋은 아이디어를 자꾸 내니까, 나중에 결국은 계장이고 과정이고 내 부하가 되는 말이지, 그런 식으로 진급을 굉장히 빨리 했어요.

윤진섭: 그러면 그때 회사생활 하시면서 서울 화단과는 어떤 교류가 있었었나요?

김구림: 서울 화단은 이제 그 연관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처음부터는 서울 화단이 연관이 안되니까 처음에는 이제 대구에 있었잖아요. 대구에 있으니까 홍대 졸업생들 서울 미대 졸업생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이제 고향에 돌아 왔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 젊은 사람들 하고 같이 활동을 한번 해보자 하고 그 사람들하고 접촉했어요. 그래 우리 젊은 사람들끼리 어떤 서클을 하나 만들어 보자.

이랬더니 이제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호응을 안 했지요. 안 하다가 이제 내가 어떤 이론적인 것을 가지고 달려드니까, 아 이게 뭐냐 하고는 같이 그러면 그런 걸 만들어 보자 해가지고 만들게 되고, 그 다음에 이제 거기서 있다가 나는 화단에, 대구 화단에서 진출을 하게 된 거죠. 근데 그 당시는 이제 대한 미협과 한국 미협이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상당히 그 서로의 어떤 그 갈등 같은 것이 많았어요. 거기에서 내가 휘말려 들어가지고, 이 내가 신문에다가 글도 쓰게 되고, 언론에서 상당히 또 나에 대한 그런 비난도 있고 해서, 이왕 까짓 거 그렇게 될 거 서울로 튀자 하고는 서울로 올라오게 된거죠.

윤진섭: 그게 한 68,9년 그 무렵 되나요?

김구림: 네, 68년도죠.

윤진섭: 68년 회화68전 같이 하시면서 그렇게 들어오셨고. 그 다음에 이제 그렇게 해서 69년에 일련의 메일 아트 그 다음에 대지예술, 그 다음에 제 4집단이라는...

김구림: 제일 내 활동 시기가 젤 많았던 때가 68, 69, 70, 71,72년도...

윤진섭: 72년 서울에서...

김구림: 네, 그 한 4~5년 사이에 가장 그 활동이 많았었죠.

윤진섭: 활동이 많으셨고, 그 다음에 이제 AG활동을 하시게 되는 게, 사실 AG라는 단체는 ST와 함께 우리 70년대 한국 현대 미술에서 굉장히 중요한 그룹들입니다, 아주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그런 작품 경향으로 유명했고, 또 김인환, 오광수,이일과 같은 당대 비평가들의 참여와 함께 AG라고 하는 동맹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아주 탄탄한 그런 그룹으로 성장을 하게 되는데, 듣기에는 선생님께서 김차섭, 곽훈 또 최붕현 이런 분들과 함께 AG 그룹의 초기 물고를 튼 그런 의미 있는 역할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시기에 어떤 상황에 대해서 좀 말씀을 해주시지요.

김구림: 처음에 몇 사람에 의해가지고 그게 됐어요, 우연히 앉아 가지고. 그런데 처음에 AG 그걸 같이 하자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은 AG의 창립회원도 못되고, 결국은 한 번도 그 참여 못한 작가도 있습니다, 사실은. 그런 작가도 있었는데, 그 외의 다른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거기서, AG에서 나가고, 나간 사람이 있었고. 결국은 AG에서 끝까지 남은 사람은 김차섭과 나입니다. 내가 처음에 그 AG를 발의해서 AG를 만들자.

윤진섭: 김차섭, 최붕현, 이태현, 무동인들...

김구림: 무동인들 대표 이제 최붕현이었거든요. 그 다음에 이제 그 곽훈하고 김차섭하고 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곽훈이 있었고 내가 있었고, 넷이 이제 처음에 그런 걸 만들자, 그런 말이 나왔어요. 그러다가 이제 최붕현씨는 어떤 그 당시에 미협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어가지고, 지방으로 어떤 학교를 옮기게 되고, 그래서 참여를 못했고...

윤진섭: 그래서 이제 선생님이 이제 70년에 AG 1회때부터 참여를 이제 하신거죠. 창립멤버로?

김구림: 창립 멤버 몇 명 없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이 각 그룹에 있는 대표 작가들을, 이강소 같으면 뭐 신체제입니까?

윤진섭: 신체제.

김구림: 아, 신체제 이광수를 잡아넣고, 이건용 ST에서 또 하나 잡아넣고, 이런 식으로 자꾸 이제 그걸 넣기 시작한거죠. 그래가지고 나중에 이제 좀 방대하게 된 거죠.

윤진섭: 그래서 1회전 때 경복궁 국립 현대 미술회관인가요? 선생님이 그 통나무에 팬티 바람으로 앉은 도. 그 1회 때 하신거죠?

김구림: 그거는 AG전이 아닙니다.

윤진섭: AG전이 아닙니까?

김구림: 그건 한국미술협회전입니다. 그때 이제 옆에는 이승택이 그 하고, 그 다음에 한쪽에는 이건용이 나무 그거 이제 그 해가지고 그걸 하고 그랬습니다.

윤진섭: 그것도 역시 이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거죠?

김구림: 그렇죠. 그게 이제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라. 지금은 그 뜯어져 없어졌습니다.

윤진섭: 경복궁.

김구림: 경복궁 현대미술관이라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일본의 잔재물이라고 해가지고 지금은 다 뜯어 없어졌어요 그게.

윤진섭: 그게 전시장은 꽤 컸던 걸로 기억을 하는데...

김구림: 굉장히 컸어요. 컸죠. 거기에서 내 작품들이 많이 버려졌어요. 그 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이제 감아가지고 묶는 작품이라던가

윤진섭: 그게 이제 사진만 남아있죠?

김구림: 네, 묶는 작품이라던가 그리고 그 경복궁 미술관에 입구로 들어가면 거기에 그 미음자로 이렇게 쫙 그렇게 되어 있는데 가운데 조그마한 방이 하나 있었어. 거기에 완전히 창문도 없이. 그 방에다가 내가 저기 얼음 작품을 쌓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거는 또 이제 미협전하고는 다르고, 그게 언제 있었나 하면은 한국일보에서 주최하는 한국현대미술전이었습니다. 그게 이제 나는 초대작가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갈 수 있었는데, 결국은 초대 작가이면서도 모든 것을 철거 당하고 그런 사건이 이제 벌어졌죠. 그래가지고 내가 이제 한국일보를 상대로 이 소송사건이 벌어지고 그랬습니다.

윤진섭: 아 소송을 거셨어요?

김구림: 네, 그래가지고 결국은 이제 무마되었지만, 내 작품은 철거되고...

윤진섭: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러면은 이번에 테이트 모던 전시에 초대 받은 그...바디 페인팅, 모델들 몸에 바디 페인팅 하는 그런 작업은 언제였습니까?

김구림: 그게 69년도 일겁니다, 아마. 그게 이제 지금의 JTBC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TBC라고 동양 방송이었습니다. 동양 TV 방송이었습니다. 그게 중앙일보에서 했던 거거든요. 그 당시에 이제 거기 내가 잔듸에다 불을 태우고 할 때도 이 KBS하고 MBC가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별로 그런 걸 취급 안 했어요. 근데 새로 생긴 동양 방송 동양 테레비 방송이나 TBC에서 촬영이 나왔어요. 거기서는 언제나 좀 앞장 선 그런 걸 많이 보도를 했었죠. 그래서 이제 그 잔재 불 태우는 거 이런 거까지 거기서 이제 촬영해가지고 방영하기도 하고, 내가 이제 거기 출연해가지고 거기에 대핸 어떤 설명과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그 후에 내가 저 거리 패션쇼를 하게 되었습니다. 최초로. 그래가지고는 거리 패션쇼가 명동과 광화문, 이대 앞에서 이제 벌어졌어요.

그랬을 때 이제 그 우리 나라 1세대 모델들이죠. 이런 사람들하고 내가 굉장히 친해졌어요. 친해졌을 때, 바디 페인팅을 한번 해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이제 그 어디 할 데가 없어서, TBC에서 자기들이 그걸 아, 바디 페인팅을 하면 우리가 방영을 하고 우리가 잡아야 되겠다 하고는 TBC에서 분장실을 빌려 줄테니까 여기서 해라. 그래서 거기서 자기들이 전부 다 찍어가지고 방영하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좋다고. 거기에 대해서, 거기에 필요한 어떤 설비라던가 이런 요금이 들어가면 자기들이 다 해주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분장실에서 내가 부탁을 했죠. 1세대 모델들한테, 이런 걸 하는데 해줄 수 있냐고 했더니 그 때 그 전부 다 자기들이 무료로 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분장실에 이제 모든 것을 해가지고 벗기도 하고, 했는데 이걸 이제 촬영을 했어요. 했는데 그런 거는 이제 방영이 못됐습니다.

윤리에 걸려가지고, 그래서 어떤 옷 입은 것만 이제 됐는데, 그때 주간지에서 워낙 떠들었기 때문에 주간지를 다 차단시켜 버렸어요. 그런데 그 때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일보에 있는 그 주간 여성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 주간기자. 거기에 최갑식이라는 기자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어떻게 숨어 들어왔어요, 그 속에. 그래가지고 가만히 그 방송국 모르게 살짝살짝 촬영을 해가지고 갔습니다. 그게 많이 촬영을 해가지고 갔는데, 그게 이 심사에서 국장급에서 아 이거는 윤리위원회에 걸리니까 안 된다고 해가지고는 이 다리 있는 부분만 그런 것만 살짝 말이지 주간지에 막 그 터뜨려버린 겁니다. 근데 그 당시에 참 좋은 어떤 장면들이 많았는데 그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그 때 주간지에 났던 그것만 으로 남게 되어가지고 그거 밖에 없는 겁니다, 사실은. 그러니까 그게 너무 아쉬운 거죠.

윤진섭: 그때 이제 그... 선생님 스스로 이제 카메라맨을 고용해서 찍을 그런 거는 없었죠?

김구림: 없었죠. 그거는 그 방송국에서 다 촬영을 하고 하니까.

윤진섭: 그 테이프가 있습니까 지금?

김구림: 테이프가 없어졌지요. 그래가지고...

윤진섭: 확인은 해보셨어요 선생님?

김구림: 확인했죠. 작년에 시립미술관 할 때 JTBC가 생겼잖아요. 그래서 혹시 그게 남아 있는가 해가지고 그쪽하고 연락을 해가지고 모든 걸 뒤지고 했는데, 그 당시에 다 불사르고 없대요.

윤진섭:하아, 그 폐국하면서...

김구림: 네, 그런 것들이 상당히 많아요. 그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자료들이, 방송국에 남아 있는 것들이. 나는 못 가졌지만 그래가지고 그것이 없어져가지고 참, 지금 와서, 내가 증거가 없잖아요. 증거 없는 거는 내가 이런 퍼포먼스를 그런 걸 했다고 소리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조그만 자료라도 남아 있는 거는 이제 내가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거리 패션쇼도 신문에 , 주간지에 조그마하게 그게 사진과 같이 보도 된 것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거리 패션쇼를 했다고 말하지. 그마저도 없으면 이 말을 못하는 거지요. 이 마찬가입니다. 바디 페인팅도 마찬가지예요. 그 때 그 기자가 와서 주간지에 보도 안 했으면 영원히 다른 자료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했다고 말을 못하는 거죠.

윤진섭: 그러면 또 선생님이 이제 그렇고, 그 또 판화에 대한 열정도 상당히 남다른 그런 측면이 있다고 보는데, 상당히 일찍 판화가로써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누구도 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판화를 실제로 초창기에 그렇게 실천을 해오시고, 80년대 초반에는 구림 판화공방이라는 그런 공방을 여셔서 판화의 대중화에도 앞장섰는데, 이 시기에도 어떤 활동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김구림: 60년 중반부터 했습니다.

윤진섭: 60년대 중반부터, 대구나 부산 시절부터 하셨나요 그럼?

김구림: 그렇죠. 옛날에 이제 그게 어떻게 됐냐하면,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판화 프레스가 없었어요. 프레스가 없어서, 이게 말이야 외국의 책 같은데 보니까 프레스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연구를 했어요. 보니까, 이걸 한번 만들어 보자. 이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이제 이 인쇄공장에서 롤러 같은걸 폐기처분하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걸 이제 사다가 철공소 가서 끊어가지고 이렇게 좀 만들어 주세요 하고 처음에 만들어가지고, 프레스를 처음에 만들어서 사용했어요. 그러니까 그게 제대로 됩니까? 그런 식으로 내가 이제 판화를 시작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이제 나중에 이제 참 그 내가 나중에 일본을 가게 되어서 일본에서 활동을 하면서 판화를 본격적으로 내가 거기서 배워 왔습니다.

배워와서 보니까 우리나라는 판화가 황무지였었거든요, 그 당시에. 와서 내가 전람회를 하니까, 이 판화전과 여러 가지를 시리즈를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 이제 설치 작품도 하고, 평면 작품도 하고 판화전도 했는데, 판화전 하니까 전부 다 와서 깜짝 놀라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판화가 이렇게 될 수 있습니까 이러는 거야. 그러면서 예를 들어서, 판화에 대한 용어를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거는 메조틴트 기법이라고 하고, 이거는 판화 기법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에칭이라는 거 이거 하나 밖에 몰라요. 목판화, 고무판화, 에칭 이거 세가지 밖에 몰랐어요. 우리나라에서.

그래서 이거는 아쿠아 틴트다 그리고 에칭도 그냥 에칭이 아니라 에칭에도 세 가지 용어가 있다. 하드 그라운드 에칭, 소프트 그라운드 에칭, 리프트 그라운드 에칭 그게 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 방법이다. 다르다. 이런 설명까지 하고, 이랬더니 이제 그 당시에 이제 판화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몰려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 집에서 그 내가 많이 가르쳤지요. 그러다가 이제 생활 하다 보니까 판화공방이라는 게 외국에는 있어가지고, 판화를 참 그, 이 많은 작가들이 판화를 할 수 있는 편리한 게 있었기 때문에 이런걸 한번 만들어 보자 해가지고, 내가 사비를 털어가지고 판화 공방을 만들었어요.

윤진섭: 판화 공방을 만드셨어요. 그 때 당시에...

김구림: 최초로.

윤진섭: 최초죠. 그 당시에 판화공방이라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김구림: 아이고, 공방이라는 그 자체를...

윤진섭: 80...80 몇 년도죠?

김구림: 81년도입니다. 81년도 11월 1일에 그걸 문을 열었어요.

윤진섭: 아...문을 여시고...

김구림: 네, 그래가지고는 그걸 하니까, 판화에 대한 호응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1년도 못 가서 결국은 그 망했지요 나는.

윤진섭: 근데 제 기억으로 70년대에 이미 계간 미술에 선생님 작품이... 그 왜, 구독자를 위해서 이렇게 하나씩 주는 그 샘플...

김구림: 그렇죠. 그걸 했었죠.

윤진섭: 그것도 들어간 게 기억이 나고...

김구림: 네, 그거는 이제 그 당시에는 이제 판화 활동을 하고 나중에 이제 저기 그 판화공방이 필요하다고 해가지고 그때 만들게 된 거죠.

윤진섭: 근데 판화를 하시면서 70년대에, 선생님이 이미 동판화로써 굉장히 유명하시고, 또 이런 저 작품...선생님 하시는 인스톨 작품, 시간과 관련된, 그런 또 꽃이라 던지 뭐 기타 사물을 아주 단수하게 스케치 해서 판화를 하셨는데, 어떻게 생계에는 도움이 되셨나요?

김구림: 그 당시에 생계에 도움이 안되었어요.

윤진섭: 팔리지 않았습니까?

김구림: 안 팔렸습니다.

윤진섭: 굉장히 유명하셨는데 이미 70년도에...

김구림: 그 당시는 이제 그...판화가로만 알았습니다. 나를. 워낙 판화로 유명하고, 판화를 내가 많이 보급시켰거든요? 그리고 이제 그 참, 저 지금은 나이가 들었지만, 판화 작가들 있잖아요. 누구를 뭐 거론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1세대 판화 작가들 전부 다 내 손에서 배웠습니다. 심지어 이제 그 다음에 우리나라도 이제 판화 저기 그 프레스도 만들게 되고, 처음에는 이제 돈 있는 사람들은 외국에서 수입해왔어요. 프레스를. 그런데 이제 수입해왔는데, 이거를 할 줄 모르는 거야. 어느 날, 누가 전화가 왔어요. 판화 하는데, 뭐 대학교수인데, 아 이거를 아무리 해도 안 찍힙니다. 이러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요? 찍힐 텐데? 내가 이랬거든요.

그러다가 내가 어쩌다가 생각이 나서 종이를 어떻게 했느냐 물었더니, 종이를 그냥 그 판화 종이를 넣어가지고 찍었다는 거야. 넣는데, 넣기 전에 어떻게 했냐고 했더니, 그냥 종이를 넣었지요. 이러는 거야. 아하, 거기서 내가 그걸 물에 담그시오. 그랬더니 네? 그걸 왜 물에 넣습니까? 이러는 거야 종이를. 물에 넣으면 종이 다 안 버립니까? 이러더라고. 그게 아니라 물에 넣었다가 한 30분이나 이렇게 넣어 놨다가 그걸 다시 촉촉한 면 보자기에 촉촉하게 만들어 놨다가 그래가지고 한 번 찍어 보시오. 이랬거든요. 그랬더니 전화가 와가지고 아유 기막히게 잘 찍힙니다. 그러니까 그걸 활용을 할 줄도 몰랐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윤진섭: 네네, 그러면 한동안 이제 판화를 하셨고, 제 기억으로 70년대 중반이면 이미 선생님이 무슨 에꼴드 서울이런데를 통해서 현대 미술제, 상당히 당시에 중견 작가로 유명하셨는데,

김구림: 맞습니다.

윤진섭: 주류 미술계에서...

김구림: 그렇죠.

윤진섭: 근데 이제 어떻게 해서 또 미국으로 또 떠나시게 됐는지, 그 과정을 조금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김구림: 그런데 내가 그 당시에 이제 그렇게 있으니까 또 여러 가지로 이제 그 화단에서 말이죠. 좀 괴로움이 많았어요. 내가 저...대학을 못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인맥과 학연이 없으니까 그런데다가 나 자신이, 내가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한국 바닥에서... 그래서 더 큰 곳으로 가서 한번 활동 해보자. 그런 의미로서 이제 미국으로 떠나게 된 거죠. 왜 미국을 택했느냐 하면은, 내가 그 전에 파리를 갔었어요. 파리에 가서 딱 몇 개월 있어보니까. 나하고는 전혀 안 맞아요 이게. 그 전에 이제 저 파리를 가기 전에 미국 여행을 한번 갔다 왔습니다. 갔더니 결국은 내가 갈 곳은 뉴욕 밖에 없구나. 그래서 다시 이제 뉴욕으로 진출하게 된 거죠.

윤진섭: 뉴욕으로 가셨다가 나중에 LA로 가신 거죠?

김구림: 그렇죠.

윤진섭: 근데 LA에 더 오래 계셨죠?

김구림: LA에 오래 있었죠.

윤진섭: 대략 언제까지?

김구림: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되었냐 하면, 뉴욕에 있다가, 뉴욕에 있는데, 뉴욕에서 상당히 그 그때 한참 말이죠. 내가 막 솟아 오를 때입니다. 그 때 이제 거기 브루스 뉴먼이니 세계적인 작가들 이런 사람들과 그룹에 끼어서 같이 전람회도 하게 되고 이런 시절인데, 동양 사람으로는 최초로 그 모던 뮤지엄에서 이 개인전에 초청이 되었어요.

윤진섭: 모던?

김구림: 모던 뮤지엄.

윤진섭: 모마요?

김구림: 모마가 아니고, 모던 뮤지엄이라고, 캘리포니아에 산타나에 있는 그 미술관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제 거기에 가 보니까 그 때 데이비드 호크니전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 그러면서 그 관장이 일본사람하고 결국은... 되다가 당신이 선정이 되었다고 그러면서, 3년을 남겨 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동안 이제 작품을 준비도 해야 하고 하니까. 그 사람들은 굉장히 일찍 그거를 해요. 그래서 나는 참, 야 내가 미국에 있으면서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참 기뻐했죠.

그래서 작품을 이제 큰 1000호짜리 이런 것도 해야 하는데 뉴욕에서 스튜디오를 옮겨야 되거든요? 내가 스튜디오가 작았습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그래서 아무리 찾아봐도 너무 렌트비도 비싸고, 그래서 안되겠어요. 그래서 다시 내가 LA로 내려갔습니다. LA로 내려가서 이제 그... 스튜디오를 찾아보니까 반값 밖에 안 되는거야. 그래서 LA에서 큰 스튜디오를 얻었지요. 막 그 천장이 7미터는 되고 말이지요. 이런 그... 그렇게 해가지고 3년을 앞으로 남겨두고 일부 이사를 그리로 옮겼어요. 짐은 다른 사람한테 좀 맡겨 놓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한 3년간 제작을 했습니다.

윤진섭: 작업을 하셨군요.

김구림: 네, 그래가지고 이제 그 전람회를 했는데, 전람회 끝나고 다시 뉴욕으로 올라 가려니까, 짐이 너무 많아져 가지고 올라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뉴욕에 이제 남겨 둔 짐을 오히려 LA로 끌어 내린 거지요. 그래서 이제 LA에 정착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이제 한국에 나오게 된 거지요.

윤진섭: 한국으로 다시 오신 시점이 90?

김구림: 2000년도에 나왔습니다.

윤진섭: 2000년도에 오셨습니까?

김구림:예, 2000년도에...

윤진섭: 90...동숭 갤러리 그거는 뭐였죠?

김구림: 그거는 다른 거였죠.

윤진섭: 미술회관...

김구림: 미술회관에서...

윤진섭: 91년도, 아니, 2,3,년도 93년도인가요?

김구림: 그건 아니고, 그거는 그 전에 다른 전람회 있었고요. 그 저 문예진흥원에서 한 거, 지금은 아르코 미술관으로 변했지요?

윤진섭: 아르코 미술관. 네, 거기서 한 전시...잠깐 나오셔서 하셨나요?

김구림: 그때... 그 땐 잠깐 나온 게 아니고, 2000년도에 완전히 나오게 된 거죠.

윤진섭: 2000년도에.

김구림: 그 전에는 잠깐 나왔다가 가고 이랬지만 이... 2000년도에는 그 당시에 김찬동씨가 그 미술 관장으로 있었어요.

윤진섭: 그렇죠. 문예회관

김구림: 그래가지고 거기에서 저 미국에 연락이 왔더라고요. 선생님 저기 그... 내년에 선생님 작품전을 하고 싶은데, 그 좀 허락을 해주십시오.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 내가 지금 당장 전화로 말이야 뭐라고 이야기 하지 못하겠고, 내년 3월 초에 가서 같이 의논 합시다. 이래가지고는 이제 그 이듬 해 3월 초에 나왔었어요. 나와가지고는 보니까 나를 위해서 상당한 예산을 세워 놓고 그랬더라고요. 그래가지고는 이제 2000년도에 내가 모든 짐을 싣고 나오게 된 동기가 어떻게 되었나 하면은, 미국에 살면서 이제 내가 재혼을 했거든요. 재혼을 했는데 우리 애가 하나는 유치원이고, 하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거기서 내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제 미술관에서도 전람회 할 때 여러 가지, 자꾸 그 미국 시민권을 따라. 이런 강요부터 해가지고, 그리고 이제 우리 애가 학교를 다니다 보니까 동양 사람이라고 굉장히 말이지 교장이고 뭐고 차별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런 데서 화가 많이 났어요. 내가 여기서 미국놈 만들기 싫다. 애들 키우기 싫다. 이런 기회에 거기서 보험을 들어서 다 해준다니까, 이 진흥원에서. 이 때 한국으로 나가자. 그리고 애들한테 정체성을 심어주자 하는 그런 의미로써 마누라는 거기 친정이 전부 미국입니다. 그리고 저기 그... 한국인은 아무도 친척도 없는데, 애를 위해서 나는 가야 되겠다. 그래가지고는 그 해 2000년도 7월에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윤진섭: 그러면 전시회는 언제? 언제 하셨습니까?

김구림: 10월에 했죠.

윤진섭: 10월에 하고, 7월에 이제 작품하고 모든 걸 다 갖고...

김구림: 다 가져 왔죠. 그 때 이제 몽땅 다 싣고 왔죠. 그래가지고는 이제 그 아르코 미술관에서 와가지고, 전부 다 자기들이 작품 막 그걸 하고 말이지요. 전시회 할 걸 전부 다 준비하고 그랬지요. 인쇄물 할 거 하고 전부 다...

윤진섭: 그래가지고 이제 바로 이 지금 이 집 자리로 들어 오신 건가요?

김구림: 그렇죠. 바로 이 집 자리로 들어왔습니다.

윤진섭: 예... 그리고 토탈 미술관하고도 관계가 있었고...

김구림: 그렇죠. 토탈 미술관 때문에 이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겁니다. 미국에서.

윤진섭: 토탈 미술관에서 그래피티 그 전시회, 그거를 제안 받은 거는 어떤...

김구림: 그거는 이제 잠시 내가 한국에 나왔을 때.

윤진섭:아... 그러니까 그거는 그 전에.

김구림: 그 전이죠. 훨씬 전이죠.

윤진섭: 그게 몇 년도입니까? 대략? 90...

김구림: 모르겠어요. 그 뒤에 그...

윤진섭: 예예, 90년대 뭐...

김구림: 예, 90년대죠. 90년대.

윤진섭: 예예. 그래서 잠시 나오셨을 때 그걸 만드셨군요.

김구림: 그... 잠시 한다는 게, 잠시가 안 되더라고요. 그때. 한 달간인가? 하여튼 그걸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체류하고 있었어요. 한국에. 금방 한다는 게 이게 잘 안되지를 않더라고. 조수를 한 두 명 썼는데도 안되더라고요.

윤진섭: 그래서 그거는 언제까지 프로젝트가 그, 전시가 됐죠? 일반 대중들한테.

김구림: 그게... 오랫동안 했다가, 토탈이 이제 그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잖아요. 그 때 그 다 이 불도저 가지고 다 없어져 버렸죠. 밀어 부쳐가지고. 그 아까운 것들이.

윤진섭: 아하, 그렇게 됐군요. 2000년이면 선생님께서는 다시 이제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다시 이제 완전히 돌아오셔가지고 활동하는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뭐 문화예술 위원회 미술회관에서 주최하는 지금 현재 아르코 미술관이죠. 주최하는 선생님의 어떤 초대전 계획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되고요. 그 이후에 이제 한국에서 생활을 하시면서 어떻게 다시 국내에서 작가적 입지를 다시 다져 나가게 되셨는지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구림: 처음에 미국에 참 오랫동안 살다가 에... 와 보니까. 첫째 내가 먹고 살 길이 없더라고요. 먹고 살 길이 없어서 여기 저기 참 그... 내가 자격이 안되지만, 보따리 장사를 했습니다. 보따리 장사를, 강사를 하게 된 거죠.

윤진섭: 뭘 가르치셨어요? 주로.

김구림: 이제 그 당시에 딱 왔을 때는. 홍대는 회화과에 나는 그런 걸 하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우선은 판화과에 들어 갔어요. 판화과에 이제 그 대학원에 강사 자리를 했고, 그 다음에 이제 여기 저기 다른 데 또 하기도 하고. 이... 덕성인가? 거기에서...

윤진섭: 덕성여대.

김구림: 네, 거기에 이제 부인들 이제 그 하는 그게 있었어요.

윤진섭: 아...평생교육원 뭐...

김구림: 평생교육원 같은 게. 그런 데서도 나와 달라고 해서 그런 데서도 하고. 중앙일보 또 이제 거기 그 뭐 문화교실이라는 게 있잖아요.

윤진섭: 문화센터.

김구림: 문화센터 같은 거. 그런데 가서도 하고. 여기 저기 막 그런 식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서. 겨우겨우 말이지. 연명해나갔죠.

윤진섭: 그러면 이제 상대적으로 작품에는 조금 아마 시간적으로 소홀하게 되실 수 밖에 없었죠?

김구림: 그래도 뭐...열심히 했습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큰 대장은 못했죠. 대장은 못하고 이제 많이 그...했어요.

윤진섭: 그런데도 지금 이제 귀국하시고서...

김구림: 그때 이제 2000년대에 귀국 했으니까 2000년대 귀국해가지고 보니까, 이 강남 같은 데 가서 보니까 참 이쁜 애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방에 앉아서 멍하게 이쁘게 한 애들 쳐다보다가 보니까 나중에 착각이 일어나는 거야.

윤진섭: 무슨 착각이 일어났어요?

김구림: 아니, 어떤 착각이 일어났나 하면 그 때, 나도 깜짝 놀랐어요. 그게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말이지. 이 그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이쁜 마네킹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윤진섭: 그게 성형수술 때문에 그럴 거예요 아마.

김구림: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강남에 막 병원에 간판들이 성형외과라는 간판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 때 내가 충격을 받았어요. 충격을 받아서 2001년도부터 성형에 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었어요. 그게 이제 소품들이에요. 그렇게 큰 작품을 못 만들고, 요만한 작품들이죠. 그런 것들 몇 백 점을 만들었어요, 내가. 집에 있으면서. 그때부터 이제 그게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윤진섭: 그래서 이제 보면은, 지난번에 아라리오 전시에서도 선생님의 작품이 굉장히 에로틱한 경향의 작품이...

김구림: 맞습니다.

윤진섭: 그렇게 있는데, 언제부터 그런 작업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까? 바로 그 시점이었나요?

김구림: 그 시점이죠. 귀국해서... 그런 게 뭐 팔리는 작품도 아니고, 그렇게 된 거죠. 그리고 이제 또 잡지를 보니까 모든 게 막 여성 위주로 물건들이 있고, 그리고 잡지에 어떤 그런 것도 서양사람의 얼굴들이 나와 가지고, 한국 사람으로 하니까 별로 그 광고 효과가 없는 모양이더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 서양 사람들을 광고 모델로 세워가지고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나오고. 그리고 성형하고 나 온 사람들도 서양 사람까지 되기를 원하고 말이지. 이런 세상으로 변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보면, 그 성형에 대한 작품들을 보면 서양 사람의 어떤 얼굴들을 많이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 어떤 질문을 받았나 하면, 이 제시카 모건이 우리 집에 왔었어요. 와가지고 그 성형에 대한 작품을 보자고 해가지고 내가 한 100점을 보여줬어요. 보여줬더니, 왜 전부 서양 사람을, 동양 사람을 안하고 서양 사람을 그 주제로 삼아서 했느냐 라고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성형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양 사람 얼굴을 가져가서 코도 이렇게 높여주고 서양 사람 같이 해주십시오. 그걸 원하더라. 그래가지고 내가 서양 사람을 등장 시켰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윤진섭: 예... 어... 그리고 이제 선생님 작품은 뭐 인스톨레이션 비교영상, 일렉트릭 아트, 또 뭐 오브제, 퍼포먼스, 모든 걸 다 이제 섭렵하고 계시는데 말하자면 이제 멀티 플레이어라고 할까, 멀리 아티스트이신데, 어떻습니까? 발상이 떠오르시면 바로 실천에 옮기세요? 아니면 좀 숙성 기간을 필요로 하십니까?

김구림: 나는 오랜 숙성기간은 안 합니다. 발상을 하면 일단은 드로잉을 해요. 드로잉을 하고 난 다음에는 예를 들어서 평론가가 질문을 한다던가 외부에서 누가 질문을 던질 때, 왜 이런 짓을 했느냐. 그 의미는 뭐냐고 질문이 날아 왔을 때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는 걸 글로 씁니다 일단은.

윤진섭: 아, 글을 쓰세요?

김구림: 네, 그런 글을 해놓고 이제 그 다음에 그것이 완성 됐을 때 이제 발표로 들어갑니다 나는 바로. 바로 작업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내가 좀 성질이 급해요. 그래서 이제 밤을 세우더라도 그런 게 어떤 생각이 나면은 그걸 완료해가지고 바로 이제 이 작업에 들어가는 경향이 많아요.

윤진섭: 선생님의 경우에는 사실 정식 그 제도 미술교육을 받지 않으시고 작가로서 성공한 그런 희귀한 예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 동안 한 50년 이상 작가로서 활동을 하시면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가령 미국의 뭐 제프 쿤스라던지, 영국의 데미안 허스트 같은 경우에는 그런 미국과 영국의 거대한 상업 자본주의 시스템을 등에 업고 수백 명이나 되는 그 조수들을 거느리면서 작품을 만들게 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그런 상황이 있습니다만...

선생님 역시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여러 가지 제약이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선생님 스스로 작업을 혼자서 해야 하는 그런 시스템이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후학들이나 아니면 정부나 이런...데에 선생님이 바람이 있다면, 작가로서 또 미래적 전망을 위해서 어떤 말씀을 들려주고 싶고, 또 그 다음에 어떤 소망이 있는지 좀 간략하게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김구림: 글쎄요. 그 뭐...내가 오늘까지 누구 도움을 받고, 그래 본적이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그리고 내가 그런 걸 또 굉장히 싫어해요.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번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윤진섭: 그냥 혼자...

김구림: 그냥 내 할 일만 충실히 한다. 이런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지요.

윤진섭: 근데 이제 이게 굉장히 또 연계되는 질문을 드리는 건데, 사실 미국에도 오랫동안 살아보셨고, 파리도 가서 살아보셨고, 또 일본도... 몇 년 사셨죠? 일본에?

김구림: 한 3년.

윤진섭: 한 3년 사셨고. 이제 외국의 경우 이렇게 보게 되면은, 사실 뭐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저는 뭐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차이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 소위 자본 시스템이라 던지, 작가를 지원하는 서포팅 시스템이 이제 한국은 앞으로 나아지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아직까지는 척박하잖아요. 선생님 같은 대가도 직접 이 작품 혼자 하셨지 않습니까?

김구림: 그렇죠. 혼자, 나는 조수도 없이 혼자...

윤진섭: 근데 가령 데미안 허스트나 제프 쿤스 같은 경우에는 그 뭐 상당히 굉장히 좀 젊은 나이인데도 뭐 조수들이 한 백여 명 붙어서 그걸 다 실현하잖아요. 이제 그런 걸 봤을 때, 그것이 반드시 뭐 작가의 재능 탓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좀...그런 거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김구림: 그것도 이제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옛날에는 작가 자신이 꼭 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에서 작품이 나왔잖아요. 지금에 와서는 어떤 그 다양화 시대가 되어가지고 조수를 두고 아이디어만 가지고 작품을 해내는, 제프 쿤스니 뭐 소위 데미안 허스트니 이런 사람들이 그 외에도 뭐 많지만은 그런 작업들을 하고 있잖아요. 그것이 어떤 그 자본주의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생겨났다고 봐요. 그게 뭐냐하면 이 화랑들이 더 많은 작품을 팔고, 이제 그 부를 말이지 누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그렇게 됐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걸 뭐 작품을 내가 그런 작품은 못쓰겠다 이런 말은 안 합니다. 하지만 나도 사실은 살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부러울 수 있어요.

윤진섭: 아유 당연하죠.

김구림: 그리고 나도 지금도 내가 재능만 된다면 나도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해야할 작품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는 못한 게 가장 아쉬운 겁니다 나로써는.

윤진섭: 그러니까 이제 좀 더 그런, 우리나라가 이제 지금 서서히 그런 나라의 어떤 국력에 따라서 지금 그렇게 가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김구림: 가고 있죠.

윤진섭: 지금까지는 너무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 뭐 아직까지. 우리나라 말에 뭐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런 말이 있지만, 지금 현재 서서히 가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뭐 이 프로그램도 그 일환입니다만 선생님 작품이 또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또 많은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가 되고 이러면 아마 우리도 중국의 작가들이 그렇게 급속하게 지금 세계적인 작가가 된 것처럼 저는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저도 이번에 국제 평론가 협회 총회 및 콩그레스를 해봤습니다만, 그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제 우리 한국의 비평도 그만큼 성장했다 그렇게 생각이 되기 때문에 뭐 좋은 일이 앞으로 선생님 오래만 사시다면은 오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네, 마지막 이제 그 끝으로 선생님의 화업을 생각을 하시면서 꼭 이 말은 내가 좀 해야겠다 하는 말씀이 있었으면 한번 해주시죠.

김구림: 근데 사실 작가로써 더 성장하고 싶어도, 이 뒷받침이 없으면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페인팅만 하고 있을 시절이 아니니까, 하고 싶어도 되지를 못해요. 내가 지금까지 하고 싶었던 작품들이 드로잉이 많아요, 근데 거기에 십분의 일도 지금 저기 그 내가 실현하게 없습니다. 근데 그런 것들 내가 죽기 전에 이 그런 것을 실현했으면 하는 말이지, 그런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 욕심이라기 보다 바람이지요, 하나의. 근데 그러한 이제 그 나한테 작품이 잘 팔리고 그러한 재력이 붙는다면은 조수를 데려다가라도 그런 작품을 하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어요.

윤진섭: 예, 그래서 이제 선생님 그 이제까지 작품활동을 총 결산하는 화집도 발간할 계획도 지금 있으시고...

김구림: 사실은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화집 한 권 없습니다. 너무 아쉬운 거죠. 지금은 만들려고 하고 있지만. 그게 빠르면 내년쯤 아마 나오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윤진섭: 네, 그래서 이제 그 좋은 화집이 나오게 되고 또 세계적으로 선생님의 뭐 지금 해오신 독특한 작업 세계가 서서히 알려지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저는 생각하기에 이제 곧 조만간 좋은 그러한 계획들이 나타나리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 동안 더 좋은 작업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주시고요. 선생님 장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구림: 감사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제작

진행 : 윤진섭 박사

카메라, 조명 및 음향 감독 : 프랑수아 사이칼리

영상 편집 : 프랑수아 사이칼리

자막 및 번역 : 김소영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