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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섭: 2017년 7월 11일 화요일. 오늘은 강운 스튜디오에서 구름의 작가, 강운 작가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안녕하세요.
강운: 안녕하세요
윤진섭: 최근에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를 하고 오셨죠?
강운: 네
윤진섭: 프랑수아즈 리비넥(Françoise Livinec Gallery) 갤러리인가요? 굉장히 유명한 갤러리인데, 처음 전시를 갖게 된 것이죠? 프랑스에서?
강운: 네네
윤진섭: 개인전으로서는?
강운: 네네
윤진섭: 그 갤러리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라든지 또 그 전시가 갖는 어떤 개인적인 또는 광주 화단에서의 의미라던가 이런 것이 있었을 텐데, 가서 직접 보고 느낀 점에 대해서 얘기를 좀 편안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운: 네, 프랑수아즈 리비넥 갤러리는 2년 전에 한국 국제 아트페어에서 37m 정도 되는 벽면에 한국 갤러리하고 미국 갤러리가 협업해서 공간을 마련했는데, 그때 200호라든지 150호 정도의 대작을 가지고 거기를 채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프랑수아즈 리비넥 갤러리 관장은 굉장히 인상적으로 봤나 봐요. 그랬을 때부터 서로 조금씩 서로 이렇게 그 전속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고 가다가 작년에 광주 아트페어에서 프랑스가 주빈국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갤러리가 대거 광주에 왔었는데 그때 수석 큐레이터도 제 작품을 보고 '아 이 작가구나'라고 하면서 프랑스에 꼭 소개해야 되겠다고 해서 이제 전격적으로 전속 계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됐는데, 그 전에 뭐 조율을 조금씩 했죠. 근데 조금 미진한 점이 있어서 직접 그 프랑수아 관장이 직접 날아와서 인천을 통해서 광주로 와서 제 전시를 보게 됐습니다.
강운: 그러면서 조율을 한 끝에 다소 한 2박 3일 동안 좀 진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 국가마다 어떤 정서가 있는데 그 정서적인 부분들에 있어서 계약 맺는 부분에 다소 약간 어떤 시각 차이가 있었는데, 결국에는 프랑수아즈 리비넥 갤러리가 작가의 입장을 좀 많이 존중하는 상태에서 계약이 성사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것을 전부 다 계약에 반영해 주었고, 또 제가 직접 프랑스에 가서 전시를 하다 보니까 재불 작가들을 통해서 제 계약 조건이 아주 파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강운: 또 프랑수아즈 리비넥 갤러리는 뭐 세 군데 공간을 갖고 있더라고요. 첫 번째는 파리에 팡티에브르(Penthievre)라는 거리에 주 공간이 있고, 맞은 편에 마티뇽(Matignon)이라는 갤러리가 있고, 그다음에 브루타뉴(Bretagne) 윌고트(Huelgoat) 지방으로, 파리에서 한 일곱 시간 반 정도 가는 거리에, 휴양지에 에꼴데피(École des filles) 라는 어떤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은 옛날 여학교였더라고요. 그것을 개조해서 어떤 동양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 그리고 컬렉터들, 그 다음에 어떤 그 정체성을 생각하고 얘기했던 학자들하고 같이 해서 공동으로 심포지엄도 하고 포럼도 하고, 전시도 하고, 이런 어떤 전시였습니다.
윤진섭: 파리에서는 갤러리에서만 전시를 했었나요? 아니면 세 군데서 다 하신 겁니까?
강운: 저는 세 군데가 아니라 한 다섯 군데서 했습니다.
윤진섭: 다섯 군데나 했어요?
강운: 네, 그 저기 파리 아트페어도 했었고, 그다음에 베니스에 있는 곳도 했었고, 여러 군데서 했다는데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아트페어 세 군데에다가 또 개인적 전시를, 개인 전시를 두 군데 정도 하게 됐습니다. 대개 프랑스 평론가들은 일단 저를 처음 소개시키는 어떤 입장에서 전체적인 평은 되게 어떤 그 굉장히 그... 뭐랄까 좀 시각적이고 현상적인 작업인데 굉장히 개념적으로도 자유롭고 이런 어떤 것들이 어떤 대기의 변화에 대한 어떤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라고 평가를 하면서 관람자 측에서는 '보는 모든 사람들을 되게 황홀하게 만든다.' 이런 어떤 평이 있었는데. 모르겠습니다, 이제 처음 데뷔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될 것 같습니다.
윤진섭: 앞으로 이제 활동이 또 이제 귀추가 주목되겠고요. 이제 화제를 좀 돌려서 그렇다면 강운 작가가 어렸을 때 어떤 환경에서 작가가 되는 그런 어떤 감수성의 토양이랄까, 그런 것이 형성이 됐는지, 기억을 좀 되돌려서 가족의 어떤 배경이라든지 어떤 성장 과정이라든지, 간략히 좀 얘기를 해주시죠.
강운: 네, 저는 양친이 교직에 계셨고요. 제가 태어난 곳은 강진군 도암면 용흥리라는 아주 그 청자가 생산되었던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거기서 또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님은 아버지 태몽으로 별'성(星)'자를 지었고, 별이 굉장히 빛나는 밤을 꾸었답니다. 그 이름을 지어 놓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뭐 산부인과가 있었겠습니까 거기에? 한 40분 있다가 또 제가 태어났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좀 서운하셨나 봐요. 그래서 전라도 말로 덤으로 얻은 자식이니 '우에 것'이라고 하거든요.
강운: "당신 태몽으로 지으소" 이렇게 이야길 하셨는데, 어머님 태몽이 되게 심상치 않았답니다. 맑은 개울에 정말 그 순금이 개울가에 떠다니는데 긴 황소를 끌고 갔답니다. 그런데 코뚜레가 굉장히 길었대요. 그 개울을, 맑은 개울을 건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만상의 구름들이 너무나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꿈을 깨셨는데, 구름 '운(雲)'자 밖에 생각이 안 났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면에 나와서 호적을 올렸는데 구름 '운'자 한자만 적게 됐죠.
윤진섭: 아, 그러니까 이제 태몽에서 이미 미래의 강운 작가의 어떤 회화의 세계를 얘기하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이 들고,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셨나요?
강운: 아니요. 모르겠어요. 다른 형제들에게 비해서 제가 초등학교 때 공부에 뛰어나지도 않고, 뭐 여러 가지 좀 부족했나 봐요. 부모님의 기대에는. 그런데 이거 하나만큼은 잘했나 봐요. 그림을 참 잘 그렸답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놓으면은 어머님께서 이웃 사람들한테 그렇게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제 마음에, 내가 부모님한테 최초로 받은 인정인 것 같습니다.
강운: 그게 아마 저한테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가 됐고, 또 어렸을 때 제가 하는 행동이 좀 재미있었나 봐요. 유화를 그리고 싶은 거예요. 전남대학교에 가서 연못에서 겨울에 무등산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데, 전혀 제가 생각지도 못한 재료로 (어른들이)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데 그게 유화였던 겁니다. 그래서 집에 냉큼 달려와서 어머님한테 그런 얘길 했죠. 유화로 된 이런 그림을 그리더라, 이게 뭐냐 하니까. '그것은 기름으로 그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것은 포스트 컬러고 수채화로 그린 그림이다'라고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강운: 그래서 얼른 창고에 들어가서 석유를 타가지고 그것을 섞어서 그리는 모습을 보고 어머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면서 이것은 석유를 섞는 게 아니라 기름이어도 유화에 섞는 기름이 있단다 그러면서 스케치북을 사주시더라고요. 좌우지간, 어렸을 때 부모님한테 받은 최초의 인정과 또 학교 선생님들이 인정해 주고, 양 벽에 붙여 주는 것들,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내성적이었지만, 그림 그리는 일에 아주 흥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윤진섭: 그러면 초등학교 때 이제 전남 대학교에 가서 유화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그랬다는 것이죠?
강운: 그렇죠.
윤진섭: 그러니까 이제 조숙했다고 생각이 되는데, 예술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창의성인데 그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지금 강운 작가의 어떤 행동반경이라든가 매체 사용, 이런 것을 보면 굉장히 다양한 매체를 사용하고, 또 비단 회화뿐만이 아니고, 미디어아트라든지, 사진이라든지, 파노라마라든지, 이런 다매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창의성이 형성되게 된 어떤 계기가 어린 시절에 있었는지...
강운: 음...창의성이라면은 뭐라고 할까요. 되게 제 자신을 믿었던 거 같아요. 예를 들어서, 대학을 다니면서 이론 공부를 하고, 그러면서 광주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광주 비엔날레도 하고, 그래서 어떤 지역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을 저는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안다는 개념을 떠나서 자신을 좀 믿어야 되겠다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된 거죠.
강운: 그게 아마 내 창의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 같고, 그런 것들이, 또 작업할 때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굉장히 뭔가 어슴푸레하게 작업하면서 보이긴 보이지만 딱히 규정할 수가 없어요. 분명히 내 안에 뭔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정말 규정할 수 없는 뭔가의 혼돈이 있는데, 이 혼돈이 있음을 알고, 나는 내 개인적으로 나 자신, 내 속에 있는 내 카오스를 믿어야 된다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윤진섭: 자기 확신?
강운: 네, 그래서 간간이 후배들한테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된다. 그러므로서, 어떤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을 좇지 않고, '아, 이거다.' 싶으면은 한 10년 정도 꾸준히 숙성을 시키므로 인해서 자기 작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가집니다.
윤진섭: 이렇게 창의성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유년 시절이 보통 흔히 얘기하길 교육자 집안의 어떤 교육, 뭐 환경이랄까 또는 부모님의 어떤 태도가 '도덕적으로 바르게 살아라' 뭐 이런 규범적이고 어떻게 보면 또 때로는 억압적일 수가 있는데, 부모님이나 어머님의 교육 태도가 개방적이셨는지 그런, 그것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좋고요. 대략 간략하게 얘기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운: 많이 성장을 제가 해 가지고 이제 한창 작업 활동을 하면서 영상 작업을 할 때가 있었어요. '샘'이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렸을 때, 유년기에 관사에서 자랐으면서 관사 샘터에서 물로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을 꾸준히 그리면서 굉장히 즐거움을 느꼈는데, 이제 성장을 해서 아, 이 작업이 굉장히 조금 개념적이고,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을 그린다는 행위에 대한 어떤 의미 부여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 생각이 나서 아이들하고 같이 이서에 있는 조그마한 분교를 찾아갔죠.
강운: 거기에는 샘이 있었습니다. 그 샘에서 같이 아이들하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비디오로 그런 부분들을 촬영하고 또 똑같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니까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즐겁게 막대기에 물을 찍어서 난을 치기도 하고, 아니면 스프레이로 운동장에 가서 병아리며, 여러 가지 자기가 그릴 수 있는 것을 마음껏 그리는 어떤 모습을 보면서 그것들을 촬영해가지고 편집해서 제 최초 순수 형태 '샘'이라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강운: 동심을 가지고 아이들이 생각하는 순연한 어떤 예술에 대한 어떤 행위들. 의식을 하든 안 하든. 그러면서 즐거움을 느껴 가면서 찾아가는 것들, 이런 것들을 이렇게 보면서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했던 적이 있는데, 그 작품을 한번 발표를 하다 보니까 "그 전에 어떤 그 작가들, 비디오 작가들은 굉장히 조금 차갑고, 개념적이고, 좀 자극적이다. 근데 강운씨 손에만 가면 이렇게 따뜻한 작품이 나오는 데 감동을 받았다."라는 어떤 그런 격려을 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윤진섭: 그래서 그런 어렸을 때의 그 샘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이제 그 자녀들한테도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또 최초의 2005년인가, 최초의 미디어 작업이 그런 그... 물로 그림을 그린다든지, 모래 위에, 뭐 이런 것들과 연결되어 있지 않나요?
강운: 네, 저는 줄곧 광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광주에서 시골로 갔습니다. 그때는 98년, 99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변화가 있으면서 20세기 유토피아가 내 눈앞에서 이렇게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한국적이고, 영구적인 소재를 찾아서 시골로 떠났죠. 그런 어떤 과정에서 음...음... 잠깐, 방금 뭘 얘기를 하셨더라?
윤진섭: 그러니까 그...미디어 아트를 보면 이렇게 땅에다가 물로 이렇게 형상을 그리는데 그것이 또 없어졌다가 인물로도 되고, 또 그러다가 변환이 되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것하고 연관이 된다고 볼 수가 있겠죠? 그거는 이제 그렇게 넘어가고..
강운: 아니요, 그래서 그때 굉장히 유년기에 그런 작업들 하고, 그다음에 제가 아마 오랫동안 시골에서 작업을 하다가 아마 쌈지 스페이스에 99년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쌈지 스페이스가 있는데 2기 작가로 뽑혀 가요.
윤진섭: 그때가 그러면 암사동인가요, 거기가?
강운: 암사동에서 6개월 살고, 홍대입구에서 1년을, (도합)1년 6개월을 저는 그때 2기 작가로 보냈었는데, 그때 되게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때는 아마 쌈지 스페이스가 굉장히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어떤 레지던스 프로그램이어가지고, 주로 이제 한국에서 공부하고 외국에 유학 갔다가 오면 삼십 대 중후반이 되거든요. 그런 작가들을 주로 모집해서 레지던스를 했었는데, 저도 유학생이라고 뽑혀 갔더라고요.
강운: 그래서 무슨 발상인가 했더니, 그때 거기 대표님께서 이 작가는 전혀 문화가 다른 어떤 외국으로, 그래서 그 문화도 습득해야 되고, 언어도 습득해야 되고 이런 어떤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유학의 과정을 갖는데, 이 작가는 대도시에서 오히려 남쪽 땅끝에 있는 해남이며, 황산면이며, 이런 어떤 담양, 화순 이런 식으로 시골을 전전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물론 그런 어떤 문화적인 환경은 다르지만, 그림에 대한 공부는 남다르게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것도 광의에서 유학으로 봐야 된다고 해서,
강운: 쌈지 스페이스에 들어가면서, 저는 개념적으로, 교과서적으로, 텍스트적으로만 아는 현대 미술을 아주 가까이에서, 동료들을 통해서 그 작업하는 행위를 보면서 '아, 내가 만약에 이런 다매체를 쓴다면 여러 가지 또 나만의 정서를 가지고 내 생각 속에서 이걸 할 수 있겠다.' 아마 그것이 조금은 어떤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여러 가지 매체를 쓰는 어떤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윤진섭: 그때 쌈지 스페이스의 1회 레지던스 입소 동기가 아마 정연두씨도 있었나요? 그때? 지금 굉장히 유명한 작가들이 되었는데...
강운: 네, 뭐 1, 2, 3회 작가들은 다 이렇게 유명하죠. 홍순명 선생님이 1회라면 예를 들어서..
윤진섭: 홍순명?
강운: 홍순명이요. 2기 그러면 함경아씨라든지 여러 작가들... 요즘은 활동들을 다 많이 하고..그 이후 세대들도 아마 여럿 있었는데 초창기 분위기는 아주 좋았었고요. 그다음에 또 쌈지라는 후원도 좀 많았었고요. 저는 시골에서 서울에 상경해서,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1년 6개월 동안 그런 것들을 많이 습득하고 나서, 그 이후에 다른 레지던스에서 오라고 요청이 있었지만, 나만의 어떤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나는 좀 더 고독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것을 만류하고 다시 시골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윤진섭: 다시 시골이라면 어디로 가셨어요?
강운: 그때 동복으로 다시 들어갔죠.
윤진섭: 동복, 화순..
강운: 네
윤진섭: 아,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성장 과정도 그렇고, 또 그 나중에 학교, 대학을 졸업하는 해가 80 몇 년도죠?
강운: 90년도에 졸업했습니다. 90년도 2월...
윤진섭: 90년에 졸업하고, 83년에 입학을 하시고, 중간에 군대를 다녀오셨죠.
강운: 네.
윤진섭: 그래서 이제, 그 시기라고 하는 것이 80년에 이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그렇다고 보면 2년 정도 지난 뒤에 미술대학에 입학을 했는데, 그때의 어떤 분위기라던가, 그때 군대 가기 전까지의 학교 때 그렸던 그림의 경향은 어떤 것인지 좀 설명을 해주세요.
강운: 대게 이제 내가 83년도에 전남대학을 입학했을 때는 굉장히 아카데믹한 교육을 시키는 그런 공간이고 또 사회에서는 굉장히 어떤 민중미술이라는 커다란 흐름이 있었죠. 또, 제가 고1 때 518이 터졌고, 저도 데모를 했었거든요. 그 이후에 뭐 83년도에 입학했을 때는 캠퍼스에 전경들이 더 많았었죠. 그때는 모두가 어떻게 하면 어떤 미술의 역할을 중요시했던 겁니다.
강운: 근데 저는 직접적인 투쟁보다는 좀 더 간접적이고, 그림으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더 중요한 어떤 지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단생활을 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민중미술이 아닌 공리적이면서 휴머니즘적인 미술을 해야 되겠다. 그러면서 사회 참여적인 것을 그려야 되겠다. 그래서, 그때 보면 뭐 아침부터 보도 기사를 보면서 이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들을 스크랩해서 마치 그 신학철 선생님이 한 서사적인 리얼리즘처럼 그렇게 막 작업을 하기도 하고, 우리 국토를 남해에서 동해까지 가면서 어떤 풍경들을 그리기도 하고, 뭐 그런 어떤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졸업 작품은 아마 '금남로'라는 100호 열 점을 연결해서 했던 작업이 있는데, 그 마치 그로테스크한 살점이 도로 위에 찍히는 그런 장면을 연출해가지고, 아주 은사님한테 노여움을 산 적이 있습니다.
윤진섭: 그러면은 그 그림은 아까 뭐 공리적 미술이라고 그랬나요?
강운: 네, 휴머니즘적 공리적 미술.
윤진섭: 휴머니즘. 그래서 이제 애써서 민중미술하고는 차별화시키는 자신의 작품을. 그런 의미인가요 그럼?
강운: 다소 차별화시킨 의미죠. 예를 들어서, 공리성을 갖지만, 진한 인간적 휴머니즘이 들어가 있지 않다면 그때도 아마 저 자신은 굉장히 소통을 중요시했던 것 같습니다. 왜? 진정한 민중들이 내 작품을 보고 어떤 서정적인 느낌, 유한, 맑음, 이런 것들을 좀 느끼기를 원할 것 같아서. 그때 지점이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림이라는 게 세상을 바꿀 수도 있고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게 있어서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쭉 서정시가 나오는 것처럼, 뭔가 서정은 사회를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자기 자신의 어떤 순수성을 지켜 줄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느냐. 그래서, 저는 두 개 다를 얻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강운: 그리고, 또 대학에서 은사님이 오셔 가지고, 또 다른 민중미술이나 아카데믹한 미술이나, 미니멀한 미술이 아닌 또 다른 어떤 미술, 형상 미술이라는 걸 또 이론하시는 교수님께서 소개를 시켜 줘서 조금씩 독서를 통해서 내 시야가 넓혀졌던 것 같습니다.
윤진섭: 그래서 이제 한 작가의 그 작업을 살펴보면, 저는 뭐 평론하는 입장이니까. 두루 이제 여러 작가들의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유년 시절의 추억이라든지 자랐던 환경,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금 구름을 소재로 다양한 어떤 변형을 가져오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그림을 제작하고 있는데, 강진에서 태어나 가지고 또 쌈지 스페이스에서 레지던스를 마치고 또 화순 동복에 가서 마찬가지로 이제 자연에서 작업을 한단 말이죠.
윤진섭: 그랬을 때 자연의 어떤 환경이 새로운 모티브로 작업에 들어오게 되고, 그것이 시점으로 볼 때, 대학에서 약간 실험을 했던 그런 사회적 공리주의 미술, 그런 것이 다음에 나타나는, 그러니까 구름이죠. 구름을 소재로 한, 말하자면 캔버스에 하늘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고, 그 밑에 소나무라든지 어떤 숲, 숲이 대비적 묘사가 되는데, 그런 것은 시기적으로 언제쯤 나타납니까?
강운: 그러니까 이제 대학을 졸업하면서 사회적인 변화가 있었죠. 국제적으로. 20세기 미술이 내 눈앞에서 와해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좀 더 영구적이고, 한국적인 뭔가를 찾아야 되겠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내가 그때 그 머릿속으로는 진도에 가면 시킴굿이라는 게 있어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치유 해주는 그런 어떤 굿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생각했을 때는 굉장히 현대 미술의 어떤 함축된 내용 같아요. 거기에는 퍼포먼스도 있고, 또 회화적인 요소도 있고, 춤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다 모이고 그래서, 그것을 좀 보면서 내가 조금 더 어떤 원형에 가까운 현대 미술에 대해서 좀 가야 되겠다.
강운: 그러고 나서 이제 길을 떠났죠. 가족, 그때는 이미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놔두고 혼자 그것을 좀 찾아보기 위해서 떠났는데, 진도의 입구 쪽에 황산면이란 곳이, 해남군 황산면이란 곳이 있는데, 지금은 이제 방재 공사가 되어서 그런 어떤 풍경이 없는데, 하구 댐을 막기 전에는 마치 그 하구가 바닷물, 짠 물이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넓은 호수 같은 거였습니다. 하늘과 땅이 모두 다 어떤 그 바닷속에 투영이 되는 거죠.
강운: 그때 그걸 보면서 '아, 내가 이렇게 땅에 발을 딛고 살았는데, 땅에 대해서 내가 이제껏 애정을 가져 보지 못했구나. 그러면서 굉장히 합리성이나, 이성적인 것들을 떠나서 정말 감동과 감정이 전이가 있는 그 어떤 지적 투명함이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서 해남이라는 곳에서 그냥 주저앉아서, 뭐 진도에서 올라오라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반 고흐가 된 느낌으로 열심히 그렸는데 한 6개월 되니까 밑천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 이런 어떤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강운: 고민을 한참 했는데 창밖을 보니까 유유자적 구름이 흐르는 것을 봤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리의 3대 원칙이 시간, 공간, 빛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회화의 구성 요소도 시간, 공간, 빛이 이렇게 그 구름 속에 녹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거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본래 이렇게 예술의 품격이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선조들 같은 경우에는 사군자 같은 걸 그려서 그 어떤 추상적인 품격을 감정적으로 전달하는데, '내가 구름을 가지고 이 추상적인 어떤 개념을 감정적으로 내가 일단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달할 수도 있겠다.' 라는 어떤 인식의 계기가 된 거죠. 그게 아마 가장 결정적인 동기가 됐을 겁니다.
윤진섭: 네,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보면 그...강운 선생의 근작에서도 그렇고 또 '물 위를 긋는다' 뭐 그런 어떤 단색화적인 요소를 지닌 그런 작품을 봐도 그렇고. 굉장히 시적이에요. 감성적이고, 감각적이고, 시적인데, 여기서 어떤 시의 요소, 회화에서 시의 요소, 이런 것이 좀 스며들어 있지 않느냐. 그게 이제 아까 이야기한 인문학적인 어떤 그런 정서도 연결된다고 보는데, 그런 그 요소를 도입하게 된 배경 같은 건 뭐가 있을까요?
강운: 아마 그것은 제 성향일 수도 있겠지만, 자연이 주는 선물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일 처음에 구름에 또 한가지 집중하게 된 계기는, 이제 시골로 내려왔지 않습니까? 갑자기 1년 6개월 동안 도시 생활하다가 시골로 내려오니까 똑같은 풍경에, 똑같은 사람에, 똑같은 길에 너무 무료한 거예요.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무료함을 극복할 수가 없는데, 이렇게 하늘 속에는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 감성이 있지 않습니까? 구름 속에서. 날씨에 따라서 또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그때 아 이것을 가지고 내가 작업을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어떤, 시간, 공간, 빛을 가지고, 굉장히 비정형적이면서 추상적인 어떤 형태이지 않습니까.
강운: 그것들이 굉장히 시적으로 이렇게 함축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다음에 또 시어를 이렇게 자주 쓰게 된 게, 지는 석양을 이렇게 보면서 왠지 하루 중에 이렇게 태양이 반음인 상태, 아침이나 저녁쯤에 더 그러죠? 반음인 상태일 때 나 자신을 이렇게 숙연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더라고요.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다.
강운: 그래서 딱히 이걸 표현하기가 좀 어려워서 쓴 게 '내재율'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순수 형태-내재율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나를 되돌아보면서 나의 마음속에서 흐르는 내재율이 있다. 이것은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전파사에서 제목도 모르고, 누가 한지도 모르지만 어떤 음이 나를 굉장히 정서적으로 심화시켜주는 것처럼. 그 심연이. 그런 어떤 요소들을 시골에서 발견하게 된 거죠. 그래서 저는 그 이후부터 굉장히 그 함축적인 시에 대해서 조금 관심이 있었던 것 같고. 또한, 제 행위하고도 굉장히 연관성이 있습니다. '물 위를 긋다'라든지, '공기와 꿈'이라든지.
윤진섭: 시상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사실 그 광주에는 이제 무등산이 있고, 많은 시인들이 무등산에 대해서 많은 시를 읊었다. 이제 이렇게 되는데, 무등산과 관련해서 뭐 미디어 작품을 한 적이 있었죠?
강운: 네네.
윤진섭: 관련해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강운: 2012년의 (광주비엔날레) 라운드 테이블 전(展)이었습니다. 그때 광주 작가로 이렇게 뽑았는데, 그땐 융복합 작가들을 뽑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때 공학도라든지, 영상작가라든지, 뭐 저같이 페인팅 작가, 설치 작가, 소통하는 작가, 이 다섯 사람이 모여서 계속 그 인문학적인 리서치를 좀 했어요. 그런데 그때 아시아 문화전당도 생기고 그래서 정작 우리 지역 자체에서 그런 어떤 융복합을 할 수 있는 그룹이 좀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해서 굉장히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물리적인 어떤 무등산이 아니라, 우리가 인문학적 무등산을 써야지 애향으로서의 어떤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그런 작업을 리서치하고 있었는데, 그때 2012년 라운드 테이블에서 우리가 뽑히게 된 겁니다.
강운: 그래서 그때 굉장히 고민을 했죠. 그러면 우리가 제일 첫 작품을 뭐로 해야 할 것인가 생각을 했는데, 그럼 무등산을 가지고 한 번 해보자. 그래서 무등산의 어떤 내용을 가지고 할까 되게 고민하면서 제가 방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자정 넘어서인가 우연히 그 식영정에서 맥주를 혼자 이렇게 마시다가 현판을 보니까 쉴 '식(息)' 그림자 '영(影)'자를 쓰더라고요. 그림자도 쉬어 가는 곳이다고 해서 아, 이게 그렇다면 한번 따져 봤죠.
강운: 보니까 장자의 '어부편'에 나오는 이야기더라고요. 그 내용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발자국과 그림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조금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걸었답니다. 그런데 발자국과 그림자가 따라오거든요. 그래서 내 노력이 아직도 부족한가 보다 하고 더 열심히 뛰다가 그냥 죽어 버렸답니다. 그림자가 싫으면 그늘 밑에 쉬면 되는 것이고, 발자국이 싫으면 멈추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장자가 2000년 전에 나한테 편지를 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쉼은 무엇이냐. 환경이 많이 다른데, 2000년 전에도 쉼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다면 인간에게. 그래서 고민하다가 같이 이렇게 비빔밥팀들하고 같이 회의를 계속하다가 심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진섭: 심장?
강운: 네. 우리가 보통 심장은 멈추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의학적으로 보니까 심장도 두 번 박동하고 나서 피를 분출하고 난 다음에 잠깐 쉬는 순간이 있더라고요. 마치 현대인들이 쉬는 게 이렇게 잠깐 쉴 수 있는 것이지 뭐 계속 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렇다면 심장에 비유해서 현대인의 쉼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 보자. 어떻게 만들 것이냐? 일단 좀 더 정체성 있는 작업을 위해서 한글 자음과 모음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글 창제 이론을 보게 됐는데, 그걸 이해하려고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는데, 그것을 설명하는데 한자가 더 많더라고요. 그래서 참 그걸 해석하는 데 애를 먹었는데, 결국 자음과 모음으로 하나의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강운: 그래서 식영정에서 '쉰다'라는 '쉼'자를 딱 쓰면은 집으로 이렇게 그 자음과 모음을 건축적으로 이야기하다 보면 집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런 집을 가지고 작업을 좀 해야 되겠다. 그래서 '산속의 집', '숲, 숨, 쉼, 그리고 집' 뭐 이런 식으로 어떤 한글로 끊임없이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광주의 어떤 여러 가지 사건들, 일 들을 이렇게 글 속에 조금씩 삽입을 하면서, 세상의 모든 집을 짓기 시작을 했습니다.
강운: 그게 아마 반향을 일으켜서 그것을 이렇게 짓고 나서 좀 더 인터랙션(interaction)도 이렇게 하고 대중들도 참여하고, 그러면서 SNS상에서 그런 어떤 이야기들도 이렇게 이런 쉼의 집이 있다, 옛날에. 보면서 '당신의 쉼은 무엇인지' 지금 '쉼'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삼겹살 한 번 구워 먹고 하는 것이 쉼이다."라고 하는 것, "나는 일요일날 열심히 자는 것이 쉬는 것이다." 뭐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쉼이 나왔는데, 전혀 의외로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냥 사는 대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너네들이 예술이라는 어떤 내용을 통해서 쉼을 나한테 던져줬기 때문에 나는 지금부터 내 인생에서 쉼을 좀 생각해 보겠다." 그때 보람이 있었죠.
강운: 그러면서 또 한가지 존 라이크만 교수가 한 번 와 가지고, "다른 비엔날레에서는 다 볼 수 있는 그만그만한 작품인데, 이 '숲, 숨, 쉼 그리고 집'이란 이 작품만큼은 광주 비엔날레에서밖에 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라면서 칭찬을 또 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나름대로 지역의 정체성을 가지면서 인문학적 무등산을 쌓자는 어떤 그런 리서치를 할 수 있는 게 앞으로도 되게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아시아 문화전당 창제작 센터도 적극적으로 기회가 된다면 활용할 생각입니다.
윤진섭: 그게 이제 내용을 보면 그 전시장에 그 한 20겹 정도 되는 커다란 대형 망사천으로 만든 스크린을 통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포개서 설치를 하고, 앞, 그다음에 옆면, 사방 면에서 그 프로젝터로 이미지를 투사한 거죠?
강운: 네.
윤진섭: 그게 이제 자음, 한글에, 자모인가요? 이제 뭐 시옷이라든지, 뭐 미음이라든지, 흩어진 어떤 자모음을 갖다가 투사를 하고 또 무슨 구름과 같은, 털과 같은 이미지들이 계속 투사가 됐던가요?
강운: 그 생명의 입자들이요.
윤진섭: 예? 입자들? 생명의 입자들. 그래서 이제 관객이 다가가서 어떤 액션을 취하면서 흩어진다든지. 어떤 그런 인터랙티브한 그런 관객 참여적인 작업을 보여 줘서 상당히 좀 다양한 그런, 말하자면, 작품의 어떤 변화를 시도했다 이렇게 느껴지네요.
강운: 네네.
윤진섭: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이 광주 비엔날레를 한 번만 참여하셨나요?
강운: 아니요, 2000년도에 한 번 또 했는데, 그때는 또 밀레니엄이다 그래 가지고 서서히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떠오르는 것을 대형 캔버스에 그... 순수한 페인팅으로만 그렸던 작품들입니다. 그때 저는 비엔날레만 뽑히면은 사람들이 굉장히 현대 미술, 비엔날레의 형식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윤진섭: 아, 그래요?
강운: 근데 거기에 한국 작가가 없었어요. 그래서 바이런 킴이라든지, 권소원이라든지, 이순주라든지 뭐 저라든지 이런 작가들 한 네 명을 해서 또 뽑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한국 대표작가를 하나 뽑으려고 하더라고요. 심포지엄에도 참가하고, 직접 초대하는 작간데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골똘히 생각하다가 저를 뽑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굉장히 놀랐습니다.
강운: 근데 그 타니 아라타는 그때 뽑아 가지고 그런 어떤 카탈로그 서문에 써 주셨더라고요. "아시아 작가, 특히 동북아시아의 작가들, 일본이라든지, 한국이라든지, 중국이라든지, 하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하늘을 사유화한 풍경화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에 산수화를 그렸을 때, 산봉우리와 산 계곡 사이에 운무로 처리하듯이 사유화하는 길이었다. 이것을 시각화시키려는 전통은 없었다. 근데 서양 예술을 공부한 한국 작가가 그것을 다시 동양적인 어떤 입장에서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새로운 어떤 젊은 세대들의 스타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강운: 이런 것 하나하고, 그다음에, "정말 그 하늘이, 내가 그림을 그려서가 아니라 하늘이 나를 시켜서 어떤 망상의 현실화처럼 표현해 냈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거 하나하고, 그다음에, "회화의 르네상스를 극대화한 작품이고 또 한가지 모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다시 재정비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회화를 펼쳐 나가고 있다"고 말을 해서. 저는 그 평을 듣고 굉장히 감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꿈이 커졌습니다. 아, 내 개인사적으로 굉장히 큰 인정의 역사였습니다. 어려울 때면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윤진섭: 네, 그래서 그 우츠노미아 미술관장을 그 당시에 하셨던. 타니 아라타 선생이 결국에 아시아, 오세아니아 섹션에 강운 작가를 발탁을 해서 전시를 하게 하고, 그다음에 이제 후속적으로 또 일본에서 순회전 하고, 여러 작가 중의 한 명으로 포함이 되면서 연결이 됐다. 그런 이야기죠?
강운: 네.
윤진섭: 네. 그다음에 이제 조금 더 구름 작업을 조금 더 심화시켜서, 또 곁들여서 '물 위를 긋다'라고 하는 테마에 제목에 그 단색화적인 경향의 작품이 있었죠? 그것에 대해서 좀 구체적으로 한 번 일점일획론을 주장하셨는데, 그거 관련해가지고 설명을 좀 해주세요.
강운: 그것은 아마 2005년 모리 미술관하고 금남로 전시를 하면서 제가 매체를 확 확산했습니다. 매체가 바뀌면서 저는 굉장히 그 새로운 작업에 대한 어떤 그 상태가 유지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양한 현대 미술, 내가 특히 쌈지에서 느꼈던, 체험했던 것들, 그다음에 광주 비엔날레에서 체험했던 것들, 그다음에 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아이덴티티를 갖다가 플러스시켜서 사진, 부조, 설치, 영상, 뭐 페인팅, 담채, 다 이 작업을 아주 최대한 다 쏟아서 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상업 갤러리하고 좀 멀어져 버리더라고요. 상업적인 작품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작품으로...
강운: 그렇죠. 그 전에는 제가 소위 말해서 블루칩 작가였습니다. 구름 페인팅할 때.
윤진섭: 오, 그때는 잘 팔리고.
강운: 아주 잘 팔렸습니다.
윤진섭: 상업적으로도 잘 나갔다 그 얘기예요?
강운: 예 예. 근데 이제 그 이후에 새로운 실험 작업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니까. 완전히 상업 갤러리하고는 결렬이 된 겁니다. 그리고 저는 거진 7년 동안 그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외국 아트페어라든지, 비엔날레를 참가하고 들어 올 때면, 뭔가 조금 그... 아무 의심 없이 내가 서양 교육을 받아 가지고 서양의 재료를 써 왔는데, 그때만큼은 이제 그때가 40대가 되어 가면서 어떤 나만의 표현 어법을 좀 쓰고 싶다 그렇게 그때 느낌이 현대적인 감각으로 농경수묵 민족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어떤 나만의 매체와 어법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강운: 그렇게 되게 고민하고 있었던 중에 우연히 표구점을 지나가는데, 계속 표구를 하면서 붙였다 뗐다, 붙였다 뗐다 하면서 계속 공기와 시간도 그 속에서 흐르면서 어떤 그게 중첩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게 굉장히 저한테는 의미가 있어 보였습니다. '아, 백색이 계속 겹치면서 결국에는 무한 여백이 되고, 무한 공간이 된다.' 이런 어떤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운: 아, 그다음부터 종이를, 이제껏 많은 사람들이 종이를 써 왔기 때문에 저는 종이를 물질적으로 안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하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써야 되겠다. 그래서 기존의 어떤 선배 작가들 중에서 굉장히 미니멀한 작가분들이 단색화를 많이 했고, 또 미니멀한 어떤 작품도 그 전에 작가들이 좀 했고 근데, 저는 또 제 정서만으로 내가 생각하는 어떤 또 다른 포스트 이상의 어떤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여러 가지 작업을 하다가 '공기와 꿈'이라는 작업하고, '물 위를 긋다' 작업하고 동시에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강운: '공기와 꿈' 작업은 어떤 그... 코팅 안 된 아사천 위에다가 천연 염색된 한지를 붙이고, 그다음에 세상에서 가장 얇은 한지를 잘게 썰어서 계속 겹겹이 붙이면서 공기의 층을 앞에 있는 작품처럼 만듭니다. 그다음에 거기에 그 위에다가 구름을 표현하고 바람을 표현하게 됐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때 구름을 통해서 일단 보이는 것이 있었고, 또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든지, 공기라든지 이런 것들을 표현할 수가 있었습니다.
강운: 그래서 제가 그... 그러면서 이 작업의 행위 자체가 굉장히 반복적이거든요. 그래서 계속 붙이는데, 정말 잡념이 없어질 때까지. 아무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붙이는 어떤 과정에서 내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운 어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는데, 그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그래서 저는 저 작업이 기도의 작업,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기도의 작업이라고 일단 했었고.
강운: 또 하나인 '물 위를 긋다' 작업은 뭐... 일획을 형상화한 작업입니다. 근데 그 작업은 그냥 그 코팅 안 된, 우연히 책상에서 드로잉 하다가 발견된 거예요. 보통 우리가 동양화를 하는 분들은 모포 위에서 드로잉을 하지 않습니까. 근데 나는 테이블 위에서 하는데 테이블 밑에 유리가 깔려 있는 거예요 유리판이. 그래서 거기서 드로잉 하다가, 아 종이와 유리판 사이에 공기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근데 그것도 시각화시킬 수가 있겠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아크릴판 위에다가 화선지를 놓고 분무기로 물을 뿌린 다음에 붓으로 짧게 묻혀서 일 획을 이렇게 긋습니다.
강운: 그러면 그것이 한지에 스미면서 주위로 번져 나가는 어떤 그런 상태가 되는데, 이 작업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날그날의 온도나 습도, 그다음에 제 몸의 컨디션에 따라서 굉장히 달라지는 겁니다. 또 종이를 어떻게 부착시키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요. 근데 대충 비슷하게 나온 거 같지만, 굉장히 공기의 표정이 다양합니다. 그래서 아... 이런 어떤 작업이 마치 어떤 주위의 굉장히 예민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나의 컨디션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오는 것들이 나한테는 하나의 놀이이고, 그림일기 같다고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이렇게 '플레이 : 프레이(Play : Pray)'작품을 보니까 제가 오전에는 '물 위를 긋다' 작업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오후에는 '공기와 꿈' 작업을 하더라고요.
강운: 근데 굉장히 내용이 서로 조금, 형식은 굉장히 좀 다를 수 있는 거죠? 근데 내용은 같은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공기와 꿈' 작품은 공기 속에서 들어 있는 물이 성층권으로 가서 찬 대기, 공기하고 만나면은 구름이 된 거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걸 '공기와 꿈'으로 표현했고요. '물 위를 긋다'라는 일획 작업은 공기 속에, 아니 물속에 들어 있는 공기를 이렇게 딱 그으면 공기 기포가 이렇게 정확히 나타나더라고요.
강운: 근데 대게 우리가 '한 일(一)자만 그어도 도를 깨닫는다'는 우리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시각적으로 너무 건조한 겁니다. 일획 속에서 그걸. 근데 이 유리판 위에서 그것을 긋고, 그 배채법, 뒤로 뒤집어서 배채법을 쓰다 보니까 디테일한 부분들이 다 나오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어떤 그런 동양의 생각들. 어떤 이게 마치 그 도자기처럼, 도공이 유약을 바르고 가마 속에 넣을 때까지는 도공의 어떤 역할이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근데 불이라는 자연의 비가식적인 에너지하고 합일 했을때 명품이 나오듯이, 이 작업도 매번 긋지만 그런 어떤 자연적인 요소와 내 어떤 기운들이 보태져서 나오는 게 이런 것이라고 해서 매일 아침 긋게 됐습니다.
윤진섭: 일종의 우연의 효과 같은 것? 우연성?
강운: 우연인데, 우연치고는 예민하게 주위 환경과 나를 관찰하는 작업이 됐죠. 내 신체적 행위에 대해서.
윤진섭: 신체적인 행위와 우연이 아니라면 배채법을 했을 때, 뒤에서 벌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이런 어떤 결론이 나오잖아요?
강운: 네
윤진섭: 그랬을 때, 우연성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그러면은 구체적으로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들...
강운: 하나의 어떤 그 기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면, 온도, 습도가 있죠?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그다음에 긋는 최소 내 행위가 있습니다. 그건 내 나름 호흡에 의해서, 내 신체를 이용해서 긋는 거거든요. 그리고 또 여기에 어떤 그런 요소들이 매번 하루 하루 날씨라든지 환경에 의해서, 내 컨디션에 의해서 계속 달라지는 것 자체가 제가 생각하는 어떤 놀이이자, 추상적인 어떤 나의 그림일기처럼 느껴 지더라고요. 이게 같으면 그런 느낌이 안 들었을 텐데. 일기를 구체적으로 쓸 수도 있지만, 회화하는 사람으로써 추상적으로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제 하루 일과가 오전에는 '물 위를 긋다' 오후에는 '공기와 꿈'이라는 이 두 가지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강운: 그래서 포스코미술관과 사비나미술관 전시를 하면서 특히 사비나미술관 전시를 하면서 '플레이 : 프레이(Play : Pray)'라는 타이틀을 제가 붙이게 됐습니다. 전시할 때 그랬거든요. 나는 '공기와 꿈'은 굉장히 시간이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기도하는 작업이라고 생각을 했고, 플레이는 일필일획 작업이기 때문에 굉장히 유희하는 작업이라고 했는데, 정작 대중들은 딱 보면서 일필일획 작업을 굉장히 명상적이고 수련적인 작업으로 생각을 해서, '프레이' 기도하는 작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공기와 꿈'은 바람이 노는 거잖아. 그러니까 자기들은 그것을 '플레이' 노는 작업이라고 생각을 하더라고요.
강운: 그래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것을 정신에 두느냐 신체에 두느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때 하나 깨달은 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지만, 최종 완성은 대중들이 하는구나. 보는 사람들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좀 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단색화나, 뭐냐 이런 어떤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윤진섭: 그래서 이제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이 구름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한지, 염색된 한지를 잘게 오려서 붙이는 그런 반복적인 노동, 그 행위가 어떻게 보면 전기 단색화 원로 작가들의 어떤 반복의 행위, 촉각성, 이런 거하고 일맥상통한다는 그런 생각이 이제 드네요.
윤진섭: 그러나 이제 또 강운 작가의 이런, 물론 단색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또 구름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한다 그거죠? 그래서 그것이 이제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단색화는 순수 추상이라고 하는 그런 그 어떤 정의랄까 개념에는 약간 좀 위배되는 그런 그 내용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작업을 실제로 할 때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염두에 두고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까? 가령, 사진을 찍어다가 그것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이런 방법이 나타납니까? 아니면 마음속에서 만들어 내는 어떤 허구적인 이미지가 주가 되어서 나타나는 건지 그게 궁금하네요.
강운: 참, 그 부분은 다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사진기를 들고 와서 특별한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그것이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무수한 사진 속에서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왜냐하면 구름이라는 것은 굉장히 순간적이고 찰나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그 느낌이 되게 중요합니다. 근데 구름을 오랫동안 관찰을 하다 보면 층이 있습니다. 지상에서 가까운 하층부터 중층, 상층으로서 대기압의 상태에 따라 변하고, 그다음에 하층에는 어떤 구름, 중층에는 어떤 구름, 고층운, 뭐 적운, 뭐 이런 식으로 다양한 형태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소위 말해서, 나는 마음속에 있는 그림을 제일 처음에 이 작업을 통해서 시작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비슷비슷해요. 연작을 하면 할수록 비슷한 패턴이 생기더라고요. 그것도 나는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강운: 끊임없이 자연은 변하는데. 한 번도 같은 그 형태는 없는데, 그래서 특히 내가 구름에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이게 어떤 사물은 다 구체적인 형태가 있는데, 이것은 비정형 형태입니다. 자연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 자연의 어떤 순수한 에너지의 순환적인 요소들을 되게 중요시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최근 들어서 '터치 디 에어(Touch the Air)'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은, '내가 이제까지 공기를 만지고 있었지 않느냐'라고 해서, 좀 더 그것을 추상적으로 가지고 가는 과정을 갖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정보를 얻어서 이렇게 옛날에는 선배들이라든지, 미학 저서나 정보를 통해서 어떤 마음을 이렇게 뭐랄까 불안함을 위로를 받았는데, 지금은 내 오감각으로 직관적으로 그것을 느끼면서 찾아가고 있는 어떤 그런 과정입니다.
윤진섭: 그래서 이제 그 구름 작업이 처음에는 유화로 시작해서, 그리는 작업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제 한지 작업으로. 그래서 이제 그린다기보다는 만든다고 하는 개념의 작업으로 가고, 좀 이제 플레이(Play)에서 점차 프레이(Pray), 구도, 이런 쪽으로 어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런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프라하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같은 국제전에 참여하셨죠?
강운: 네네.
윤진섭: 언제 시기이며, 또 어떤 비엔날레에 참여하셨는지 그리고 또 성과가 무엇인지 설명 좀 해주세요.
강운: 모르겠습니다. 프라하 비엔날레 같은 경우는 회화를 주로 하는 비엔날레, 동구권에서 하는 비엔날레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평면 작품, 회화 작품들을 했는데, 저는 그때 두 가지 작업을 가지고 갔었습니다. '공(空) 위에 공(空)'이라는 작품하고, 그것은 바람 위에 꽃잎이 날려 가지고 떨어지면 거기서 최소한의 어떤 꽃잎을 변화시켜 가지고 그것을 드로잉 하는 어떤 작업이어서, 조형의지를 어떤 바람에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연작이 이제 '공기와 꿈' 이전 작업이죠.
강운: 그다음에 그때 '물 위를 긋다' 작업은 그때도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작품을 가지고 작업을 했었는데, 그때도 이제 여러 가지 전시들이 많이 의뢰가 들어왔죠. 밀라노에서도 전시를 하자고 하고 그랬는데, 외국에서 그 전부터 계속 전시를 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굉장히 해외 전시가 꼭 필요하지만, 굉장히 소모적일 때도 많더라고요.
윤진섭: 아, 소모적인 측면이 있다.
강운: 네, 그리고 작가가 이렇게 그... 전속으로 할 때 굉장히 계약 조건을 따지면, 아 저 작가는 약간 조금 그렇지 않느냐, 너무 이재에 밝고 따진다고 하지만,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내가 1년에 그릴 수 있는 작품은 굉장히 제한적입니다. 그 다음에 타성에 젖지 않고 끊임없이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 안배를 해야 됩니다. 이런 부분들까지 다 염두에 둔다면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꼭 필요한 전시를 하고 싶다. 그런 어떤 생각들이 있었고.
강운: 프라하 비엔날레를 기점으로 해서, '서두를 것 없다. 내가 이 작업을 하면서 꾸준히 이 작업을 한 십 년 정도 하다 보면 적당한 시기에 또 이것을 인정해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나는 항시 어떤 국제성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을 닫아 놨을 때는 국제성을 얻지는 못하지만 내 마음을 항시 이렇게 오픈된 상태에서는 국제성을 얻을 수가 있다.' 이런 생각 하나하고.
강운: 그때 강하게 느꼈던 것들은, 한국 미술에서 보편적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나가면 별로 의미가 없더라고요. 아주 지역적이고 개별적인 것, 그러면서 어떤 특별한 사회적 이슈를, 또는 뭐 문화적 이슈가 회자될 때, 의미를 띌 때 미술로써, 예술로써 어떤 이슈화 될 수도 있지 않느냐. 뭐 이런 생각들이 점점 저 개인적으로 들더라고요. 그래서 세상의 흐름이라든지, 유행이라든지, 이런 거에 개의치 않고 오직 제가 과거의 작업, 현재의 작업, 또 미래의 작업을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나를 성찰하는 어떤 그런 과정으로 가게 된 것 같습니다.
윤진섭: 이제까지 이제 구름 작업을 하는 중간에 뭐 판화라든지, 사진, 기타 미디어 아트와 같은 협업을 통한 그런 규모가 큰 작업도 좀 하시고 했는데, 앞으로 이제, 지금은 이제 구름 작업을 많이 집중을 하고 계시는데, 어떻습니까? 앞으로 다시 어떤 실험적인 그런 작업들에 대한 어떤 계획이라든지, 향후 어떤 진로에 대해서 좀 간략히 뭔가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시죠.
강운: 이제 벌써 제가 50대가 됐습니다. 매번 20대, 30대, 40대 변화를 원했었고, 그때 마다 10년 주기로 변화를 가졌습니다. 50대 때 꼭 해야 될 작업이 뭘까, 요즘 고민이 좀 많습니다. 어... 근데 요즘은 그린다는 문제가 뭔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들어서 '물 위를 긋다' 작업을 가지고 또 좀 더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점점 이렇게 그 사물과 그림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린다는 자체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제가 두고 있더라고요.
강운: 그래서 '물 위를 긋다'라는 일점일획 작업을 이제는 긋고, 그리는 방법으로 한 번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긋는 것하고, 그다음에 그릴 때의 그 생명의 입자들로써 그 그린다는 자체에 의미를 뒀을 때, 어떤 명상적인 추상회화가 나올지, 그리고 동서 예술에 있어서 어떤 가교 역할을 할지 작업실을 옮겨서 제가 원하는 게 뭔지 한 번 찾아볼 생각입니다.
윤진섭: 음... 그렇군요. 그래서 이제 아무래도 작가이기 때문에 어떤 생계 문제, 작가로서 어떤 가정도 있고, 또 작업도 해야 되고, 그런 그 딜레마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상업 작가가 되느냐, 소위 말해서, 그냥 아주 그... 미술관을 지향하는 어떤 그 작가가 되느냐, 또 국제화 관계를 생각을 해서. 그런 측면에서 볼 때는 이제 컬렉션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이 돼요. 한때는 정말 상업 화랑들이 서로 작품을 구하려고 그렇게 안달을 하던 작가에서 소위 잘 나가는 작가에서 나중에는 이제 대형 어떤 그런 뮤지엄장의 작가로 그렇게 그...바랬고 또 그것이 실현이 되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퍼블릭컬렉션에 대해서 한 번 그 지나온 어떤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시죠.
강운: 어... 물론 현대 작가가 나름대로 경제적인 부분이 환원이 되어야지 좀 더 좋은 작품, 좀 더 스케일이 있는 작품들을 제작하게 되는데요. 저는 좌우지간 어찌 되건 이 두 개의 밸런스를 맞추고 싶은데 어떨 때는 상업 갤러리에서 가능했지만, 가능하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그거였던 거 같아요. 미술관을 중심으로서 전시를 준비하면은 자기의 어떤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진척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상업 갤러리는 어떤 일정량의 주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양의 작품을 이렇게 원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조금 어려웠는데, 저는 어찌 됐든지 2005년을 중심으로 해서 뮤지엄에 주로 핀을 많이 맞췄습니다.
강운: 그래서 화두를 잃지 않고 계속 가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국립 현대 미술관이라든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부터 시작해서 뭐 광주시립미술관, 뭐 외국에는 모리 미술관 그다음에 뭐 외국에 있는 건물들, 뭐 삼성 공간이라든지, 일본 롯폰기에 있는, 여러 가지 이제 미술관이라든지, 관공서에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은 저한테는 굉장히 행운이었고. 또 실험 작업 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상업 갤러리의 삼청 블루칩 작가가 이렇게 됐다가 사십 대에 그만두고, 그다음에 벌었던 것들 다 쓰고, 또 더 힘든 어떤 상황이 있어서 빚내서 쓰고, 빚내서 쓰면서 결국 이제 포스코미술관하고 사비나미술관 전시까지 연결되면서 또다시 회복이 좀 됐는데요.
강운: 어... 작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덕목이 뭘까 이런 생각들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정말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어떤, 그림 그리게 만드는, 어떤 지탱하는 그 진심이란 게 뭔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파는 게 아니라 자기 그림자를 판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윤진섭: 오...네.
강운: 꾸준히 내가 무엇 무엇을 하고 싶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간다라면, 어떤 상업 갤러리가 됐든, 옥션이 됐든지, 뭐 미술관 소장이 됐든지 간에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내가 생각하는 어떤 세계에서 마지막 내가 무엇 무엇을 하고 싶다는 그 욕구를 계속 자가동력할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나를 끌고 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지금 입장에서는 '회화란 나한테 무엇이냐' 라고 생각했을 때, 회화란 것은 경험된 것이 아닙니다. 경험 그 자체라고 생각을 합니다.
강운: 그래서 지금 뭐 내가 앞으로의 어떤 작업 '터치 디 에어(Touch the Air)'라는 작품에서 공기를 가지고 작업하고 싶다고 한 얘기는 또 다른 어떤, 이 작업을 함으로 인해서 또 생산되는 어떤 게 있을 겁니다. 그게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나 자신도 궁금하고 앞으로도 더 그 부분들에 대해서 의식을 하면서 화가로서의 어떤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떨 때는 기존의 기득권, 지금 내가 '공기와 꿈'하고 '물 위를 긋다'에서 뭐 어느 정도 경제적인 부분들이 성취됐다고 하더라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그것을 놓고 다시 도전해야 되겠다는 그런 생각,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윤진섭: 전업 작가로서 그렇게 뭐... 수십 년을 산다는 게 쉽지가 않은 일인데 가정에서는 어떤 부인의 내조, 이런 것들이 상당히 중요한 그 역할을 했고, 그것이 작가로서 성공하기까지는 그 비중이 있었으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강운: 음... 그래요. 내가 제일 처음에 삼십 대에 가정을 떠날 때, 내 집사람은 그 초대 가든 미술관 큐레이터였거든요.
윤진섭: 음... 그랬군요.
강운: 그러면서도 지원을 했었고, 내가 사십 대 때 상업 갤러리와 결별을 하면서 실험 작업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그동안 샀던 집이며, 작업실 부지며, 이런 것들을 다 팔았습니다. 원래 자기 아파트에 손대는 것을 일반 가정주부들은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그런 것까지 다 온전히 내주면서 매번, '작가는 때가 있고, 인생은 굉장히 제한적인 유한의 삶을 산다'라고 같이 한, 그 나한테는 아름다움을 공유할 수 있는 배우자가 있었죠.
강운: 음... 그런데 앞 전에 제가 '숲, 숨, 쉼 그리고 집'이라는 작품을 융복합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모든 집을 다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것은 제 집사람에게 헌정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 내 집사람은 암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내 집사람이 평소에 굉장히 바라는 집을 물질적인 집을 줄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그림으로 많은 집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에...모르겠네요. 갑자기 그 얘기를 하니까 매 순간 어려운 고비가 있었습니다. 근데 어, 그림이 뭔지, 그리는 게 뭔지 뭐 내가 좀 더 시간이 지나 봐서 화가로서의 진심이 뭔지, 아직도 좀 근대적이고,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하게 된 그 진심이 뭔지 저도 좀 궁금합니다.
강운: 요즘 세상은 뭐,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적인 어떤 사고가 아니고,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이런 소비 패턴에서 또 어떤 뭐 21세기 미래 보고서, 앞으로 20년이 있으면은 세상은 알파고 시대가 되고 인간의 역할은 굉장히 축소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의 몫은 그다음 세계에서도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인간의 어떤 진심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런 어떤 작가가 되고 싶네요.
윤진섭: 네, 아무튼 오늘까지 이런 강운 작가가 있기까지는 부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가족의 어떤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되고요. 앞으로 더욱더 노력하셔 가지고, 진짜 명실공히 국제적인 스타로 자리 잡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강운: 감사합니다.
진행: 윤진섭 박사
카메라, 조명 및 음향 감독: 프랑수아 사이칼리
영상 편집: 프랑수아 사이칼리
자막 및 번역: 김소영
기술 및 구성: 밥 젠슨 박사